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7: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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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 헤르만 괴링의 조카딸과 결혼하였고 신임을 받았다.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 베르그하우젠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딜스는 모친이 매춘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제국군에 종군했지만 종전 후인 1919년에 귀센 대학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과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에 공부보다는 음주와 싸움, 유희에만 정신이 팔려 제대로 졸업을 하지 못해 늘 만년학생의 신분이었다. 그의 얼굴에 남겨진 상흔은 대학시절 결투에 의한 것이었다.
1930년에 공산주의자 대책전문가로 프로이센 자유주의 내무성에 들어간 딜스는 바로 프로이센의 고급경찰관료가 되어 공산주의자 및 나치스 등 정치적 급진활동가들을 다수 잡아들였다. 1933년 1월 30일에 나치당 당수이던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임명되자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주의 내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괴링은 1933년 2월 6일에 딜스의 능력을 알아보곤 그를 정치경찰부 1A과 과장으로 임명했다. 1932년 2월 27일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일어나자 딜스는 범인인 판데르뤼버를 고문하고 28일에 4천명의 공산주의자를 잡아들였다. 4월 26일에 괴링이 기초한 법률에 의해 프로이센 주의 모든 정치경찰은 프린츠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 접수되었던 호텔로 이관하여 후에 게슈타포라고 약칭한 '프로이센주 비밀경찰국(Preussisches Geheimes Staatspolizeiamt)'이 만들어졌다. 딜스는 이 게슈타포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나치당의 정권장악 후 바이에른 주의 경찰을 감독하던 친위대의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괴링과 딜스가 감독하던 프로이센 주 및 베를린의 경찰도 장악하려했다. 힘러 일행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딜스 및 게슈타포에 관한 경고를 알려 대통령이 괴링에게 압력을 행사하게 했다.
4. 좌천과 숙청위기
1933년 9월 말, 괴링은 딜스를 게슈타포 국장에서 해임시켜 베를린 경찰의 부장관으로 좌천시켰다. 딜스의 집이 가택수사에 들어가자 위기감을 느낀 딜스는 잠깐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버트로 달아났다. 10월 말에 다시 괴링의 부름을 받은 딜스는 게슈타포 국장자리에 재임명되었다. 얼마 후 괴링은 돌격대에게 대항하기 위해 친위대와 화해하여 1934년 4월 20일엔 하인리히 힘러를 게슈타포 국장보다 상위직인 게슈타포 감사관 및 장관의 자리를 주었다. 힘러는 취임 후 바로 딜스를 게슈타포 국장 자리에서 해임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후임으로 앉혔다. 딜스에겐 친위대 대령계급이 주어졌지만 그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딜스를 경계하여 장검의 밤 사건 당시 그가 작성한 숙청리스트에 딜스의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이를 안 괴링은 명부에서 그 이름을 삭제했다. 딜스는 괴링의 조카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후에도 괴링의 후원을 받아 베를린 경찰서장 및 쾰른의 행정관 등 고관자리를 유지했다.
한편 1940년대부터 딜스는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명령은 거부했기에 게슈타포에서 축출당하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괴링의 비호로 그는 곧 풀려났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측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한 딜스는 1950년부터 서독의 내무부에서 일하다가 1953년에 은퇴했다. 은퇴한 딜스는 여가를 즐기던 도중 1957년 11월 18일에 사냥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