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리처드 탈보트 Richard Talbot | |
생몰년도 | 1306년경 ~ 1356년 10월 2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트셔 탈보트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탈보트 | |
아버지 | 길버트 탈보트 | |
어머니 | 앤 보틀러 | |
아내 | 엘리자베스 코민 | |
자녀 | 길버트 탈보트 | |
직위 | 탈보트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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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 장성으로서 스코틀랜드군과 프랑스군에 대적했다.2. 생애
1306년경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트셔의 탈보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길버트는 젠트리 출신으로 글로스터시의 보안관을 맡은 리처드 탈보트의 아들로, 에드워드 2세의 권신인 콘월 백작 피어스 가베스턴과 디스펜서 남작 휴 디스펜서에 앞장서서 맞선 인물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맡고 있던 글로스터시의 보안관 직위에서 물러나고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지만,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되고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오른 뒤 벌금이 취소되었고, 1328년 시종장에 선임되었으며, 1330년 사우스 웨일스의 판사로 선임되었고, 1331년 6월 5일에 제1대 탈보트 남작에 선임되었다.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반 디스펜서 세력에 가담했고, 디스펜서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에 가담했다가 보로브리지 전투에서 생포된 뒤 막대한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페위되고 휴 디스펜서가 처형된 뒤, 디스펜서에게 납치된 뒤 성채에 감금된 채 영지와 수입을 헌납해야 했던 엘리자베스 코민을 구출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이후 아내의 이름으로 굿리치 성을 접수했고, 1331년부터 1355년까지 굿리치 성의 기사로서 의회에 출석했다. 1346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탈보트 남작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았다.
리처드의 아내 엘리자베스 코민은 잉글랜드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도 큰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지만,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스코틀랜드를 독립시킬 때 그녀의 아버지 존 3세 코민을 죽이고 영지를 몰수해버렸다. 리처드는 이 영지를 되찾기로 마음먹고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뒤 데이비드 2세가 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스코틀랜드 정계가 혼란에 빠지자, 그는 잉글랜드로 망명한 뒤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복위하려는 잉글랜드 귀족 집단에 가담했다.
1332년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격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왕위에 복위한 발리올은 1334년 초 리처드를 킬드미어 성주로 선임하고 마르 백작에 선임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곧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발리올을 축출했고, 리처드는 잉글랜드로 급히 달아나다가 갈스턴의 스코틀랜드 기사 윌리엄 키스에게 체포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몸값을 내주고 풀려낫다. 1337년 베릭 성주로 선임되었고, 1340년 4월까지 스코틀랜드에 있는 잉글랜드 영토의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고, 1342년 모를레 전투에서 초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 휘하에서 부관으로 복무했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었고, 이후 벌어진 1차 칼레 공방전에도 참가했다. 1356년 10월 23일에 사망했고, 외아들 길버트 탈보트가 아버지의 재산과 직함을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