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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블랙모어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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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블랙모어 Ritchie Blackmore | |||
<colbgcolor=#4C4C4C><colcolor=#fff> 본명 | 리처드 휴 블랙모어 Richard Hugh Blackmore | ||
출생 | 1945년 4월 14일 ([age(1945-04-14)]세) | ||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웨스턴어폰메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 ||
소속 | 딥 퍼플, 레인보우, 블랙모어스 나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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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그릿 볼크머 (1964 – 1969) 에이미 로스먼 (1981 – 1983) 캔디스 나이트 (2008 – ) | ||
자녀 | 위르겐 블랙모어, 로리 블랙모어, 어텀 블랙모어 | ||
신체 | 179cm, 76kg | ||
종교 | 무종교 (유신론)[1] | ||
활동 기간 | 1960년 – 현재 | ||
사용 악기 | 기타 | ||
장르 | 하드 록, 블루스 록, 메탈,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네오 클래시컬 메탈 | ||
레이블 | Polydor, BMG, Edel, SPV, Ariola, Frontiers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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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록 기타리스트이다.2. 상세
하드록, 헤비메탈 기타의 창시자 중 한 명이자 락 역사상 가장 유명한 리프 Smoke on the Water의 주인공이다.전설적인 하드록 밴드 딥 퍼플[2]의 전 기타리스트였고, 자신의 솔로밴드 레인보우를 거쳐 현재는 자신의 부인인 캔디스 나이트와 바로크풍 포크 밴드인 블랙모어스 나이트(Blackmore's Night)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화려한 기타플레이와 더불어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강렬한 외모의 미남 기타리스트로 스타성까지 갖추고 있었던 독보적인 존재였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당시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던 블루스적인 즉흥 연주를 지양하고, 클래식에 영향을 받은 짧고 강력하며, 정교하게 계산되어 하모니를 맞춘 리프와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기타 솔로를 추구하여 현대 하드록 헤비 메탈[3] 계열 기타를 탄생시킨 기타리스트이다. 이 사람부터 시작해 하드 록과 헤비메탈이 블루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음악장르로써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록 기타 1세대 테크니션 중에서 실력면에서 최상위에 존재하는 기타리스트 라고 할 수 있으며 에디 밴 헤일런, 랜디 로즈, 제이크 E 리, 타카사키 아키라, 잉베이 말름스틴[4] 등등 수많은 1970, 1980년대 슈퍼 기타리스트들의 탄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개척자 격인 인물이다. 거의 동시대에 활약한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 같은 거물 조차도 리치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5]
대표적인 완벽주의자로, 리치는 녹음 당시에 녹음의 완벽함을 위해 동료 밴드 멤버들의 관리까지 철저하게 시켰다고 하며, 완벽한 연주를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반복했다고 한다.[6] 이것 또한 즉흥성, 유연성보다는 계획성과 반복훈련이 우선했던 클래식 베이스 음악가들의 정체성이다.
딥 퍼플 결성 이전에도 영국의 세션계에서는 지미 페이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있었다. 즉 리치와 지미의 라이벌로서의 의식은 두 사람이 각각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 이라는 역사적인 밴드를 이끌기 이전 부터 있어 왔었다는 말이다.[7] 특히 이 시절 지미 페이지는 레드 제플린이라는 그룹 자체가 그랬지만 워낙 나사가 심하게 빠져있어서 스튜디오에서 좋은 퀄리티의 앨범을 만들고도 라이브 무대에 올라가면 약빨고 꼴리는대로 연주하거나 스카치 위스키로 병나발을 불고 비틀거리면서 연주하는 일이 잦아, 멤버들 음정 하나 틀리는 것 조차도 발광해서 욕을 퍼붓는 리치의 딥 퍼플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14살 때 자전거를 타고 수 마일 밖에 있는 기타 선생님에게 가서 기타를 꾸준히 배웠다고 한다. 학창시절 유독 학교 성적이 매우 안좋아서 이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는데, 그래서 딴건 몰라도 기타만이라도 탑클래스가 되고자 엄청나게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학교 선생님들도 리치 블랙모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리치가 성적은 진짜 안좋은데 기타는 엄청 잘 치지 않냐?"라고 평했다고 한다.
위대한 기타리스트임이 틀림 없지만 굳이 단점을 들자면 딥 퍼플 당시에는 톤 다이내믹이 부족하며 대부분의 프레이즈가 비슷비슷하다. 사전에 작곡한 부분들이나 몇몇 염두에 두고 배치한 멜로디들은 인상적이지만, 거의 모든 솔로 연주에서 손버릇에 가까운 3연음을 지겹게 들을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 빠르다는 칭송을 받은 프레이즈를 들어보면 같은 패턴의 3연음 런 주법이나 한 줄 트레몰로 피킹이 거의 고정적으로 나오는걸 들을 수 있다. [8]
다만 라이브에서 다른 멤버들과의 좋은 즉흥연주 앙상블로 크게 지루함을 주지는 않았으며,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시키는 플렉시 사운드는 그것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레인보우 시대로 가면 공간계를 좀더 수용하며 딥 퍼플 때 생각하기 힘들었던 아름다운 톤도 곧잘 뽑아낸다. 사실상 기타리스트로서의 완성은 이 시기였다.
3. 밴드 활동
3.1. 딥 퍼플 시절
젊었을 무렵에는 꽤 잘생긴 편이었던데다가 라이브에서 열정적인 연주 퍼포먼스를 보여줘서 많은 팬들을 거느린 기타리스트였다. 인기가 어느정도였나 하면 딥 퍼플과 투어활동을 돌던 시기 어느 날 리치가 감기에 걸려 공연을 하루 쉬고 대타를 보냈는데 관중들이 리치가 보고싶다고 난리를 피워서 아예 공연자체가 중단되기도 하였다.다만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력에 비해 인간성은 많이 까이는 편이다. 딥 퍼플 시절에는 멤버들마다 일일이 공연 시 그들이 위치해있을 자리를 정해주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다른 멤버들이 오지 못하게 했다는 루머도 있고, 자신의 성격을 늘상 다 받아주는 존 로드에게 버럭 버럭 화를 내거나[9] 작사가이자 보컬인 이안 길런이 라이브를 하다가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면 리치 블랙모어가 "가사를 왜 틀리냐"며 큰소리로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10] 결국 이안 길런과 로저 글로버가 "저런 놈이랑 더 이상 같이 못 해먹겠다"며 딥 퍼플을 나오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Ritchie Blackmore's Story를 보면 음악적 견해 차이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리치나 이안 길런이나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리드하길 원했고, 서로 타협을 잘 못봤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이안 길런이 리치에게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불러주겠다고 하면, 리치가 방향성을 내놓고, 그러면 이안은 "그건 블루스 스타일이잖아, 난 그런거 부르기 싫어!" 이런식이었다.
리치 블랙모어도 후임으로 들어온 데이비드 커버데일, 글렌 휴즈와 음악적 갈등으로 로니 제임스 디오와 그가 활동하고 있던 엘프라는 밴드의 멤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밴드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를 결성하고 밴드를 나오게 된다. 하지만 휴즈나 커버데일이나 인터뷰에서 리치에게 많은 것을 배웠었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자주하였다.
다만 이렇개 자신의 밴드 멤버들과 사이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협업이 끝난 후에는 그들에 대한 험담을 거의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음악성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했던 것으로 보아 인간적인 결함이 있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완벽성을 병적으로 추구하는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3.2. 레인보우 시절
자세한 내용은 레인보우(밴드)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재결합한 딥 퍼플
딥 퍼플 재결합에 참여하였지만, 이 때도 이안 길런과 대판 싸우는 등 사이가 안 좋았다. 중간에 이안이 다시 나가서 레인보우의 보컬이였던 조 린 터너를 데려왔지만, 존 로드를 중심으로 다른 멤버들이 조 린 터너를 노골적으로 하대했고 앨범의 실패로 리치를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에게 쫓겨나게 된다.[11]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의 모금활동을 위해 Rock Aid Armenia에 이언 길런과 같이 참여하여 퀸[12], 러쉬[13],블랙 사바스[14], 아이언 메이든[15]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16] 등 영국의 내로라하는 밴드의 세션들과 같이 Smoke On the Water의 합주한 버전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의 안좋은 소문만 알고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곡을 손대는 것을 맘에 안들어할 것 같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상당히 긍정적이었고 본인도 인정하는 프로들[17]이 연주한 자기곡을 들으면서 상당히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에이전시 쪽은 다시 이안을 데려오기로해서 데모 테잎을 보내서 보컬 부분만 녹음해서 듣게했는데 'Perfect Strangers' 때와 더 악화된 목소리 때문에 이안과 일을 못하겠고, 무대에 서더라도 BGM마냥 구석에 박혀있을것이라고 했는데, 에이전시쪽은 이안과 같이 일만 해준다면 돈도 계속 주고 구석에서 연주를 하던 상관없다고 했다. 최강의 패조차도 먹히지 않아서 결국 이안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속 일을 하게된다.
재결합 3번째 앨범인 'The Battle Rage On...' 때 이안과 리치의 갈등이 더더욱 안 좋아졌는데, 스파게티 사건이 그중 하나다. 직원 중 하나가 식사 때 리치가 먹을 소스없는 스파게티(치즈와 허브로 이뤄진 것)을 가져왔는데, 리치가 아직 안 온 사이에 이안이 거기다가 케첩으로 도배를 하는 짓을 저지른다. 리치가 이 때문에 빡쳤고 이안은 웃으면서 자기가 했다고 하자 그대로 스파게티를 얼굴에 던젔다고 한다.[18]
아무튼 투어에서 이안과 더 이상 일을 같이 못하겟다고 느낀 리치는 1993년 11월 17일 헬싱키 공연을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Good Bye"라는 말만 남기고 밴드를 떠나버렸다.[19] 딥 퍼플이 아닌 레인보우 같은 솔로 활동이야 말로 자신의 적성에 맞다고 다시 실감한다. 이 레인보우의 앨범은 원래 솔로 앨범으로 기획 되었지만, 음반사의 강요로 레인보우의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두기 화이트를 보컬로 내세운 레인보우의 마지막 앨범인 Stranger In Us All을 낸다.[20]
3.4. 블랙모어스 나이트
다시 딥 퍼플을 나온 리치는 보컬리스트인 캔디스 나이트와 블랙모어스 나이트(Blackmore's Night)를 결성,[21] 바로크 음악과 포크 음악에 심취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실 이쪽으로 노선을 옮긴 것이 리치에겐 더 다행이었다. 80년대말부터 2000년도 초까지는 메탈계의 멸종이라고 불릴 정도로 펑크/얼터너티브/이모코어 같은 신 장르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딥 퍼플도 재결성 후 예전 같은 히트를 친 적은 거의 없었다.프로듀서였던 펫 리건은 리치가 스튜디오에서 재밍을 하고 있었는데 기존의 메탈 곡이 아닌 동화에나 나올법한 포크 송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엔 그냥 "별일이네~"하고 넘겼는데 결국엔 리치는 이 노선으로 가면서 포크송 앨범들을 내게된다. 인터뷰에서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하면서 심리적으로 치유받았다고 한다. 관객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고 자신 역시 메탈보단 이쪽이 괜찮다고 생각해서 계속 블랙모어스 나이트 활동을 하게된다.[22]
헤비메탈 팬덤에선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지만, 퀸의 브라이언 메이나 키스의 진 시먼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엄청 헤비한 음악만 하다보면 나중엔 지쳐서 결국 어릴 적 처음 접했던 유들한 음악을 하게 된다고 한다. 리치는 블랙모어스 활동을 하면서 캔디스의 여러 인맥들의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딥 퍼플이나 레인보우 시절때와 달리 "과격한 관객"들이 아닌 유순한 관객들을 상대하다보니 이 시절 때 성격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순해졌다고 한다.[23]
데이빗 커버데일은 리치의 이런 행보에 대해 매우 부럽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자신은 비지니스 때문에 계속 팬들이 원하는 앨범들을 만들어야하지만, 리치는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 해왔기 때문이었다. 리치 블랙모어를 보고 기타리스트가 된 조 새트리아니는 늘 해오던 음악과 다른 음악 장르를 하고 싶으면 과감하게 바꿔버리는 리치 같은 성향이야 말로 진정한 음악가의 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밴드 활동시작으로 락/메탈 팬덤과 거리가 멀어지게되었고, 종종 후배들과 같이 공연을 하면서 계속 얼굴을 내비치는 퀸 멤버들이나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달리 리치 블랙모어는 아에 다른 세계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락/메탈쪽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졋다. 그 후 가끔 딥 퍼플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 때 대중에 얼굴을 내비쳤다.
아내 캔디스 나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치 블랙모어가 자신의 대표곡인 Smoke On The Water 등 헤비메탈 시절 곡들을 들으면 70-80년대 때 자신이 가지고있던 나쁜 기운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느낌을 엄청 받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악 메탈 음악을 거의 안한 것으로 보인다.
레인보우 시절 때 활동했던 돈 에어리(현 딥퍼플 키보디스트)도 가끔 같이 공연하기도 한다.
2013년 6월 Blackmore's Night 의 8번째 정규앨범 Dancer and the Moon 이 발매되었다. [24]
#
신보에는 레인보우의 "The Temple of the King" 커버와 함께 마지막 트랙에는 "Carry On… Jon" 이라는 존 로드 추모 연주곡이 수록 된다고 한다.
2013년 12월에는 Winter Carols 2013 이라고 해서 또 다시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을 발표 하였다. 신곡은 없고 2006년 캐럴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던 Christmas Eve 를 새롭게 편곡한 버전을 영어와 독일어로 각각 녹음하여 수록 하였고, 2006년 캐럴 앨범에 수록 되었었던 곡을 어쿠스틱 라이브 버전으로 실었다. 심지어는 또 다른 CD에는 아예 2006년 캐럴 앨범을 그대로 우려 먹었다.
캔디스 나이트의 트위터에 따르면 신보에 들어갈 곡들을 녹음하고 있다고 한다. 빠르면 2014년 상반기나 하반기에 또 신보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 되었지만, Winter Carols, Winter Carols 2013 에 이은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세 번째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Christmas Eve 라는 곡은 세 번째로 편곡 되어져
2015년 9월에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9번째 정규앨범[25] All Our Yesterdays 가 발매 되었다.
2017년 8월 11일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20주년 기념 앨범 'To The Moon And Back: 20 Years And Beyond...,' 이 발매되었다.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곡들 중에 리치가 특별히 아끼는 곡들만[26] 선별했으며, 몇몇 곡들은 기존에 녹음한 버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롭게 재녹음을 하여 수록하였다. 한 예로 블랙모어스 나이트의 첫 앨범 Shadow Of The Moon의 수록곡이었던 'Writing On The Wall'[27]의 기존 곡과 다른 새로운 편곡에 대해 리치는 마음에 든다며 흡족해 하였다.[28] 그리고 위에 언급한 레인보우의 'I Surrender'와 'Land Of Hope And Glory'도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갔다. 보너스 트랙에 유일하게 들어간 신곡 'Ghost Of John'의 원곡은 오래된 영국 민요로, 리치의 딸 어텀이 학교에서 배워왔다며 아빠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리치는 멜로디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곡을 편곡하였고, 캔디스가 가사를 다시 썼다. 노래 마지막에 흘러 나오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어텀이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레인보우 활동도 제한이 되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자체격리 중이다. 그동안 인터넷이나 각종 21세기 미디어물에 전혀 관심이 없던 리치 블랙모어가 아내의 권유로 같이 공연 생중계를 하기 시작하였다. 옛날엔 TV 매체에 꽤 나오긴 하였지만 이런 인터넷 방송은 처음인지 생중계 채팅글 같은거에 어색해하였지만 금세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5. 뉴 레인보우
자세한 내용은 레인보우(밴드) 문서의 뉴 레인보우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가족 관계
- 부모님
아버지는 루이스 J. 블랙모어, 어머니는 바이올렛 블랙모어이다.
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고, 그 유명한 "열심히 연습 안 하면 기타로 머리를 후려치겠다"라고 말한다.[29] 그 후 그는 일주일에 2-3번정도 기타 강습을 받으러 자전거를 타고 4마일 밖에 있는 곳에 왕복을 하곤 했다.
그가 음악적인 활동을하는데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부모님은 그가 기타로 돈벌고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모님을 공연에 처음 모셔왔을 때는 딥 퍼플과 오케스트라의 합동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는 아들이 거대한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주목을 받고있고, 관객들은 5천명 넘게 온것을 보고 "아들놈이 확실히 뭔가 대단한 것을 하고있구나~"라고 실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와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는데 아버지와는 안 좋은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부자지간의 정까지만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부모들이 아이에게 대놓고 '사랑한다'라는 등 애정표현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아들에게 애정표현을 스스럼없이 하였지만, 아버지는 좀 반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리치를 엄격하게 대한것도 아니었다. 뭐라 혼내려고 하면 큰 잘못이 아닌 이상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그러는거 아니다'라고 쉴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 전 부인들
리치는 캔디스 나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총 2번 결혼하고 2번 이혼 하였다.
19살때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였던 독일인 Margrit Volkmar가 있었고 그녀 사이에서 장남인 위르겐 블랙모어를 낳았다. 결혼기간은 1964-69년도까지 짧은 기간이었다.
1974년 부터 1975년 까지 1년간, 쇼산나 페인스타인 이라는 소프라노와 동거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레인보우의 첫 스튜디오 앨범 'Ritchie Blackmore's Rainbow'에 백킹 보컬로 참여했고, 'Catch The Rainbow' 와 'Still I'm Sad' 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17년 6월 한 웹진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인터뷰를 하였고, 그녀는 리치에 대해 여러 썰들을 풀었다.
그 다음 에이미 로스맨이란 여성과 1981년도에 결혼했었지만 83년도에 2년만에 이혼을 하게된다.
- 위르겐 블랙모어 (아들)
리치 블랙모어는 여러 차례 결혼을 했었는데, 그 중 첫 부인인 독일인 여성 마르기트 폴크마와의 사이에서 19세 라는 이른 나이에 위르겐 블랙모어 라는 아들을 낳았고, 위르겐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레인보우의 보컬 이었던 조 린 터너가 결성하였던 레인보우의 트리뷰트 밴드 오버 더 레인보우[30]에 기타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위르겐이 어쿠스틱으로 연주한 Smoke On The Water
딥 퍼플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딥 퍼플의 멤버들과 Smoke On The Water을 합주하는 위르겐
오버 더 레인보우 공연에서의 위르겐, 연주하는 곡은 조 린 터너 시기의 레인보우의 대표곡인 Street Of Dreams 이다.
이렇게 행적만 보면 위르겐은 원래 아버지가 있어야할 자리에 아버지가 참여를 안하거나 못한 자리에 대신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을 넘지 못하는 듯.
- 캔디스 나이트 (아내)
리치와 캔디스가 처음 만난건 1989년의 한 축구 경기에서 처음 만났는데, 리치는 축구를 하고 있었고, 캔디스는 그 시합을 보러 왔었다고 한다. 당시 캔디스는 뉴욕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행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음악, 여행, 역사, 유령(...)[31] 등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금세 친해졌고, 급기야 1991년 부터 동거하다가 결혼까지 한다. 이후로는 성질이 좀 죽은듯한 모습도 보인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바로크 음악과 포크 음악이 원류다. 실제로 70년대 부터 이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오히려 락보다 더 많이 듣고 연주했다고 한다. Under A Violet Moon 뒤로 조금씩 성격이 유해졌고. 자녀를 가진 후부터는 정상인이 된 듯하다.[32]
여담이지만 블랙모어스 나이트 결성 당시 국내의 한 음악 잡지에서 리치 블랙모어에게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리치 측에서 내건 조건이 '캔디스 나이트도 함께 인터뷰 할 것'이었다고 한다. 캔디스 나이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기자들은 유일한 자료인 그녀의 사진들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인터뷰 시간까지 대기하였는데, 인터뷰가 시작되자 "내가 어렸을때 노래하면 새들이 몰려 들어와 듣곤 했다.", "내 목소리는 하늘이 내려준 천사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등 주옥 같은 공주병 어록을 쏟아내어 기자를 괴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행을 좀 보여주지만 실력있는 보컬리스트라서 그런지 인재를 보는 눈이 있는데, 캔디스에 의해 발굴된 인재가 구 레인보우 마지막 기수의 보컬인 두기 화이트고 그 다음이 신 레인보우의 보컬 로니 로메로다. 두기 화이트는 자잘한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를 하다가 뿌려뒀던 데모 테이프가 캔디스의 손에 들어가 레인보우에 발탁이 되었고, 로니 로메로는 본인이 올려둔 유튜브 영상을 본 캔디스가 리치 블랙모어에게 들려주면서 무명이었던 로메로를 메이져로 끌어올렸고 리치로 하여금 다시 레인보우를 하게 만들었다.
결혼식 때 리치가 턱시도 대신 전통 중세시대 옷을 입고 온 것으로 유명한데, 이언 길런 역시 결혼식 때 전통 조지아 복장을 입고 결혼했다.
5. 기타
- 나이가 들면서 뱃살이 엄청 붙었다. 축구를 매일 하는데도 액슬 로즈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후덕하게 보인다. 그래도 얼굴은 젊었을때의 간지를 어느정도 유지하는 편이다.
- 브라이언 메이는 리치 블랙모어가 지미 핸드릭스 이전부터 존재했던 락 기타리스트이며 락/메탈 장르의 개척자 중 한 명인데도 그가 왜 대중적으로 잘 언급되지 않는지 이상하다고 하였다. #
- 라이브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고 불을 붙인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는데, 딥퍼플 MK 3기 시절의 California Jam 1974 공연에서는 기타를 바닥에 비비고 발로 긁어대고 위로 던져서 내동댕이치는 것도 모자라 관중석에 부서진 기타를 던지고 액션캠에 쳐대고 엠프에 불을 붙여 터뜨렸다.[33] 레인보우 라이브때도 기타를 많이 부쉈지만 이때처럼 엠프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보이지는 않았다.[34] 후일담에 의하면 뒤에서 촬영하는 방송국 사람들이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게 짜증나서 그랬다고 한다.[35] 또한 앞차기를 무대 퍼포먼스에 도입한 장본인. 그리고 이 앞차기 퍼포먼스는 잉베이 말름스틴으로 계승되었다.
- 딥 퍼플 재결합 이후부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리치 블랙모어는 여타 유럽인들 처럼 얼굴 하관에 수염이 골고루 나는 타입이다. 한때는 콧수염과 턱부분을 모양을 다듬으면서 길렀는데 귀찮았는지 콧수염만 기르는 중.
- 80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주 한 번씩 축구를 하고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축구광이다. 캔디스 나이트도 축구 하다가 만났다.[36][37]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음악의 음반들을 무려 2,000여 장이나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 바이에른 뮌헨 서포터다.
- 영국과 독일에서 거주하다 레인보우 결성 이후 아예 미국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데, 인터뷰에서 "독일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독일은 세금을 너무 많이 걷는다" 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골수 독빠다. 그러나 옥토버페스트는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 젊은날엔 미신을 엄청 믿는 타입이었다. 앨범 준비할 때는 외딴 곳의 집을 빌려서 합숙을 하였었는데,[38] 집에 이상한 기운이 있다고 느낀 리치는 방안에 온같 부적 같은것을 만들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십자가가 직빵일꺼라 생각해서 온 멤버들에게 십자가를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방에서 잠자던 로저 글로버가 잠결에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햇는데 일어나기 귀찮았던 로저 글로버는 저리 가라고 했었는데, 십자가가 정말 급했던 리치는 소방용 손도끼를 가져와서 문을 쪼개고 들어가 십자가를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존 로드의 말에 의하면 로저 글로버는 엄청나게 젠틀한 성격이라서 리치가 뭐라 하던 화를 거의 내는 법이 없었는데 이 때만큼은 엄청 화를 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 제작한 앨범은 fireball이다.
- UFO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심지어 두 번이나 직접 UFO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스티브 바이한테 악보도 제대로 못 읽는다고 모욕 당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스티브 바이의 인성을 보더라도 말도 안되는 악성 루머이다. 무엇보다 리치 블랙모어는 원래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사람이고 악보를 읽을 줄 안다. 그 예중 하나로 딥 퍼플 시절 때 오케스트라 합동 공연 때 악보 보면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2015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The Ritchie Blackmore Story가 나왔다. 리치와 주변 뮤지션들의 인터뷰들로 이뤄진 영상이다. 나무위키의 상당수의 정보들이 이 영화를 기반으로 대폭 수정이 되었다.
- 어린 시절 라디오 수리공으로 일한 경력이 있고, 기타와 관련된 이펙터, 앰프 등등 음향기기를 다루는데도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 이지만, 그 외의 현대 문물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
- 그레이엄 보넷의 인터뷰에 의하면 레인보우 재직 시절 때까지 리치는 운전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딥 퍼플 시절 때부터 매니저 혹은 수행원들이 계속 운전을 해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또한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는 방법은 모른다고 한다. 캔디스 나이트의 말에 의하면 비가 오던 어느 날 리치가 그의 오래된 메르세데스를 끌고 나갔는데,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집에 까지 비를 다 맞으면서 걸어 왔다고 한다. 캔디스가 왜 전화를 하지 않았냐고 묻자 리치의 대답은 휴대폰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전화를 못했다고 한다.
- 성격만 보면 다른 기타리스트들을 엄청 깔볼 것 같지만, 잘하는 사람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브라이언 메이나 에디 밴 헤일런[39]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극찬을 했고, 딥퍼플의 자기 후임인 스티브 모스에 대해서도 극찬을 하였다.[40] 상당히 완벽주의적이고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 인터뷰에 따르면 딥퍼플을 다시 나오고 시간이 수십년이 흐른 후에 팬들과 추억을 위해 딥퍼플 2기 멤버들과 같이 한번이라도 같이 공연을 하고싶었고, 멤버들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바램과 달리 메니지먼트와 에이전시가 관여하게되면 엄청 복잡해진다고 한다. 2기 멤버들의 공연은 엄청난 돈이되기 때문에 단순한 1번의 공연이 아닌 투어 등 돈 문제 때문에 무산된 것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설상가상 리더였던 존 로드는 2012년에 타계를 하였고, 다음엔 누가 또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같이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딥 퍼플쪽의 매니지먼트의 간섭 때문에 리치 블랙모어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때 일부러 참여도 안 했고, 팬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리치와 같이한 딥 퍼플 공연을 못보게 되었다.
- 자기관리가 철저한 타입이다. 다른 뮤지션들과 달리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문제는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흡연도 하지 않았다.[41] 취미가 축구였기 때문에 3번째 결혼 후 나이살이 생기기 전까진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고있었고, 자기 아들보다 더 스타일이 좋다.
- 택틱스 오우거의 히든던전인 망자의 궁전 최종보스의 이름이 블랙모어이고 클래스가 리치다. 디렉터 마츠노 야스미가 락덕후다 보니 나온 말장난. 후에 영문 스펠링을 블랙무어로 바꾸었다.
- 고집불통인 이미지와 달리 다른 락 장르에 대해 편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레이 콜먼이라는 멜로디 메이커가 펑크 풍의 음악을 들고왔는데 리치 본인은 꽤나 새롭고 독특한 음악이라 흥미로워했는데 반면 이안 길런은 엄청 디스를 해댔다고 한다. 섹스 피스톨즈라든가 다른 펑크 밴드들이 심플하지만 이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이안 길런은 이것을 왜 싫어하는지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리치 블랙모어의 음악적 행보를 보면 그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음악적 편견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클래식과 락의 결합이라는 본인의 스타일을 계승한 잉베이 말름스틴의 음악에 대해선 아직도 뭘 하려고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 2022년 7월에 개인 유튜브 공식 채널을 만들었다. 어떤 컨텐츠를 다룰지는 본인도 아직 잘 모르고 과거 공영 영상 위주로 올리는 듯. 아마 인터넷 매체에 친숙한 아내 캔디스 나이트가 채널 관리를 할 듯 하다.
[1] 종교는 없으나 신을 믿는다고 한다.[2] 이쪽은 1976년에 해체되었다가 1984년에 재결성 되어 지금도 활동 중이다.[3] 특히 네오 클래시컬 메탈(바로크메탈)과 파워 메탈 등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메탈 계열[4] 이 분야에서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잉베이도 리치 블랙모어 앞에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한 양이 된다. 데뷔 초 잉베이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등 많은 부분에서 리치를 그대로 따라할 정도였다.[5] 1970년대 말 에디 밴 헤일런의 등장 이전까지 기타키즈들에게 가장 존재감이 컸던 기타 히어로는 바로 리치 블랙모어 였다.[6] 이는 잉베이 말름스틴에게 이어진다. 둘 다 속주를 잘하는 것도 유사하다.[7]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하며 경계했던 것으로 알려져서 사이가 나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리치 블랙모어의 인터뷰에 의하면 둘은 알고보니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1962년 'Teen Age' 시절에 서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치는 지미가 훌륭한 뮤지션이었을 뿐 아니라 스타성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자신만만했지만 결코 오만해보이지 않았다고 극찬했다.[8] 피지컬을 필요로 하는 이런 연주는 이후 존 사이크스나 게리 무어의 해머링&풀링 6연음 또는 그 이상의 속주에 큰 영향을 주었다.[9] 리치가 아무리 성격이 더러워도 존이 4살 연상이기도 하고 워낙에 호인이라 다 받아주었기 때문에 리치 블랙모어와 존 로드의 관계는 좋았다.[10] 심지어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놈이 무대에서 Smoke on the water 의 가사를 틀릴때 마다 기타로 머리를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라면서 이안 길런을 까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리치와 이안의 관계는 썩 좋지 않다. 다만 본인은 정작 Smoke on the water 뮤비에서 솔로를 다르게 연주했다.[11] 존 로드, 이안 페이스는 그렇다치고 로저 글로버의 반응이 의외였다고 한다. 로저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레인보우를 같이했고 조 린 터너와도 같이 호흡을 맞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저는 이안 길런과 딥 퍼플 가입 이전 에피소드 식스 시절부터의 친구이기 때문에 단순 팀 동료 이상의 의미가 있다.[12]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13] 알렉스 라이프슨[14] 토니 아이오미[15] 브루스 디킨슨[16] 데이비드 길모어[17] 브라이언 메이나 토니 아이오미 같은 경우는 리치가 직접 칭찬을 한 일도 있었을 정도.[18] 이는 이안과 리치의 증언이 엇갈린다. 이안 길런은 스파게티에 캐첩을 뿌린건 자기가 아니었으며 이를 오해한 리치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스파게티 그릇을 얼굴에 박아버렸다고 한 바 있다.[19] 인사를 받은건 이안 페이스뿐이었고, 존 로드는 또 충격 먹고 방으로 달려갔다고 한다.[20] 원래 레인보우가 아닌 솔로 활동을 위해 두기 화이트를 썼다고 한다. 레인보우를 할 것이었으면 조 린 터너를 염두에 두고 곡을 썼을 것이라고 한다.[21] 블랙모어의 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아내의 성이 나이트인 것으로봐서 블랙모어의 나이트라는 의미도 가지고있다. 즉 부부의 성을 밴드명으로 한 것.[22] 아예 메탈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곡중에서는 캔디스의 스타일에 맞게 작곡된 메탈풍의 곡들도 몇몇 있다.[23] 블랙모어스 나이트 공연을 보면 대부분 연배가 좀 있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가족들과 같이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연장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무대 혹은 숲에 둘러 쌓인 야외 공연장들이다. 이런 곳에서 공연을하니 사람이 심리적으로 유들해질 수 밖에 없다.[24] 2006년 겨울에 발매했던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 Winter Carols 까지 포함한다면 9번째[25] 2006년 겨울에 발매했던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 Winter Carols 까지 포함한다면 10번째[26] 2010년에 발매했던 Autumn Sky에 수록된 곡들은 음반 유통사와의 문제 때문에 선별되지 못했다.[27]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편곡 하였다.[28] " I also didn't like "Writing On The Wall", which we had recorded a long time ago, so I tried it again. I like the new version. It has a pleasant sound. Now it's a hard rock song with a great melody. The original version sounded too soft. "[29] 이 일화가 훗날 자기가 그레이엄 보넷을 기타로 후려쳤다고 와전됨[30] 레인보우의 멤버 였던 사람들로 이뤄졌는데, 이들이 레인보우에 있었던 시기는 각각 달랐고, 유럽에서 투어를 몇 번 돌다 해체되었다. 이후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멤버들의 갈등으로 엄청 싸워서 본인은 탈퇴를 했고, 남은 멤버들은 조 린 터너를 대신할 보컬로 두기 화이트와 그레이엄 보넷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아 결국 밴드가 해체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개성과 성격이 엄청 쎈 멤버들을 다뤘던 리치의 카리스마를 알 수 있는 부분.[31] 참고로 리치 블랙모어는 보기보다 미신같은걸 꽤 잘 믿는 사람이다. 밑에서도 서술되지만, 딥 퍼플 시절에는 이러한 성향 때문에 베이시스트 로저 글로버와 싸우는 일도 있었다.[32] 이 부분은 후배인 잉베이 말름스틴에게도 계승 중이다. 잉베이도 오랫동안 메탈만 연주하다가 시골 같은데서 포크송을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33] 이 장면은 딥 퍼플 'Anthology' 앨범의 커버로 사용된다.[34] 그리고 이런 기타부수기는 후계자 잉베이 말름스틴이 그대로 따라한다. 리치 본인도 똑같이 기타부수기를 한 지미 헨드릭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35] 딥퍼플 재결합 당시의 공연때도 무대위에 올라와 찍고잇는 카메라맨에게 옆에있던 플라스틱 음료수컵을 던지고 "꺼져!"라고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36]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고 나서 베켄바워와 독일 축구의 팬이 되었었다고 한다.[37] 2015년 7월 파리에서 한 인터뷰에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파리 생제르맹을 언급하기도 하였지만, 인터뷰 장소가 파리고,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였던 지라 립서비스라고 봐도 된다. 어쨌건 축구에 열광하며 최근의 축구도 보고 있긴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즐라탄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고, "그 파리에서 뛰고 있는 스웨덴 애." 이렇게 말했다.[38] 어떤 곳이냐면 영화 007 스카이폴에 나오는 스카이폴 주택 같은 곳이었다.[39] 정작 에디 밴 헤일런이 어린 시절 리치 블랙모어의 공연을 보고 난 뒤 싸인을 요청했을 때, 욕설을 섞어가며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40] 스티브 모스는 리치 블랙모어에 대해 이야기할때 오른손에 리듬감과 박자감이 있어야 제대로 칠 수 있어야 해서 본인도 연습하기 어려웠다고 한다.[41] 더욱 대단한 것은 70년대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코카인은 마약으로 취급받지도 않던 시대였을 정도로 마약 복용이 만연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리치 블랙모어는 로버트 프립, 프랭크 자파와 더불어 마약을 혐오했던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여담으로 세 사람은 음악적으로 완벽주의자라는 점까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