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F0DF><colcolor=#000> 프로방스 백작부인 사보이아의 마리아 주세피나 공주 Principessa Maria Giuseppina di Savoia | ||
이름 | 이탈리아어 | 마리아 주세피나 루이사 베네데타 (Maria Giuseppina Luisa Benedetta) |
프랑스어 | 마리조제핀 루이즈 베네딕트 (Marie-Joséphine Louise Bénédicte) | |
출생 | 1753년 9월 2일 |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토리노 왕궁 | ||
사망 | 1810년 11월 13일 (향년 57세) | |
영국 잉글랜드 버킹엄셔 하트웰 하우스 | ||
배우자 | 루이 18세 (1771년 결혼) | |
아버지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
형제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마리아 엘리사베타 카를로타, 마리아 테레사[1], 마리아 안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마우리치오, 마리아 카롤리나, 카를로 펠리체, 주세페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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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이자 프랑스 왕국 루이 18세의 아내. 남편이 공식적으로 국왕이 되기 전에 사망하여 왕비가 되지는 못했고, 시조카 루이 17세 사후 명목상의 왕비였다.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결혼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에서 피에몬테 공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의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차남[2]이자 왕세자였고 어머니는 펠리페 5세의 3녀로, 마리아 주세피나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1771년, 17세의 마리아 주세피나는 프랑스 왕국의 루이 스타니슬라스 왕자와 결혼했다.[3] 마리아 주세피나는 사르데냐 왕국의 공주로서 프랑스 왕자에게 매우 적합한 신붓감이었으며, 뒤바리 부인이 결혼을 지지했다. 두 사람은 그랑 도팽 루이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기준으로 7촌이기도 했다. 결혼식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성대하게 열렸고 5000명 이상의 하객이 참석했다. 마리아 주세피나는 결혼 후 프랑스식 이름인 마리 조제핀으로 불렸다.
<rowcolor=#000> 루이 스타니슬라스와 마리 조제핀 |
2.2. 프로방스 백작부인
프랑스 궁정 내에서도 마리 조제핀에 대한 험담이 가득했다. 마리 조제핀은 제대로 씻지도 않고 이를 닦지 않으며 무식하다는 소문이 돌았다.[5] 프랑스 대사가 사르데냐 대사에게 마리 조제핀의 청결 관리에 대해 주의를 줄 정도였다고. 남편 프로방스 백작도 이런 아내를 항상 무시했다.
아내에 대한 험담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형 루이 오귀스트 왕세손 부부를 의식했는지 프로방스 백작은 활발한 부부 관계를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다만 프로방스 백작이 불임의 원인 중 하나인 심각한 비만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는 편.[6] 마리 조제핀은 1774년과 1781년, 두 차례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고 이후 아이는 없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고 루이 16세가 즉위한 이후 루이 16세와 프로방스 백작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루이 16세가 장남 루이 조제프를 낳기 전까지 프로방스 백작은 자신이 왕위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며 험담을 주고받았다. 다만 마리 조제핀은 정치적 영향력이 별로 없어서 음모를 꾸미는데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 프로방스 백작과의 관계도 소홀해졌다. 프로방스 백작은 마리 조제핀의 시녀인 안 드 발비를 포함한 여러 애첩을 두었고, 마리 조제핀 역시 자신의 시녀인 마르그리트 드 구르비용과 염문설이 나는 등[7]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2.3. 프랑스 혁명과 망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튈르리 궁전에, 프로방스 백작과 마리 조제핀은 뤽상부르 궁전에 거주했다.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과 여동생 마리 테레즈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이미 피신한 뒤였다.1791년 6월, 마리 조제핀과 프로방스 백작은 무사히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망명했지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탈출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망명한 뒤에도 여전히 남편과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마리 조제핀 혼자 독일로 떠나 연인 마르그리트 드 구르비용과 함께 살았다.
<rowcolor=#000> 마르그리트 드 구르비용 |
1799년 조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의 결혼식이 열렸을 때, 루이 18세는 마르그리트 드 구르비용을 못마땅하게 여겨 독일에 두고 혼자 참석하라고 했다. 그러나 마리 조제핀은 마르그리트를 결혼식에 데리고 왔고, 마르그리트는 그곳에서 체포됐다. 마리 조제핀은 분노하여 마르그리트와 함께 할 때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등 소란을 피웠다. 이후 마르그리트 드 구르비용은 파벨 1세를 설득하여 러시아에서 루이 18세를 쫓아내 이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복수했다.
2.4. 말년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마리 조제핀은 남편의 곁으로 돌아와야 했고 프랑스 왕족들이 망명하고 있던 잉글랜드 하트웰 하우스에 정착했다. 이 당시 마리 조제핀은 부종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결국 오랜 망명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마리 조제핀은 1810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죽기 전 남편 루이 18세에게 용서를 빌었고 그 또한 아내에게 나쁜 감정이 없다고 확인해주었다.[8]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가 1년 뒤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9]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사보이아의 마리아 주세피나 (Maria Giuseppina of Savoy) | <colbgcolor=#fff3e4,#331c00>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Victor Amadeus III) |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Charles Emmanuel III) |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Victor Amadeus II) | |||
안 마리 도를레앙 (Anne Marie of Orléans) | |||
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릭세나 (Polyxena of Hesse-Rotenburg) | |||
헤센로텐부르크 방백 에른스트 레오폴트 (Ernest Leopold, Landgrave of Hesse-Rotenburg) | |||
뢰벤스타인베르트하임로슈포르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Löwenstein-Wertheim-Rochefort) | |||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Maria Antonia Ferdinanda of Spain) | |||
펠리페 5세 (Philip V) | |||
프랑스의 도팽 루이[10] (Louis, Dauphin of France)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 |||
엘리사베타 파르세네 (Elisabeth Farnese) |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 |||
팔츠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e of the Palatinate) |
[1] 샤를 10세의 아내다.[2] 다만 장남 비토리오 아메데오 왕자가 요절하여 사실상 장남이었다.[3] 루이 스타니슬라스 왕자는 한 때 마리아 주세피나의 고모인 마리아 루이사 공주와 엘레오노라 공주의 혼처로 거론된 적이 있다.[4] 첫 아이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결혼 8년만에 낳았다. 사실 이 시절 동양이든 서양이든 10대 초반에 결혼하는 것이 흔했기에 결혼 10년만에 첫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많았으나,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시점에서 이미 15세-14세였기에 당대 다른 왕족들 같으면 결혼 3~4년만 되도 첫 아이가 나올 법도 한데 하다못해 임신했다가 유산되었다는 소식조차도 없었으니 더더욱이 가임능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5] 소문과는 다르게 마리 조제핀은 굉장히 지적인 여성이었다. 문학에 대한 깊은 교육을 받았고, 개인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6] 거기다 형 루이 16세 부부는 뒤늦게나마 2남 2녀를 낳기라도 했지 루이 18세 부부는 두 번의 유산 외에는 자녀 자체가 아예 없었기에 그런 말 할 자격이 없기도 하다.[7] 당시 마리 조제핀이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와 매일 밤을 같이 보냈다고.[8] 마리 조제핀 사후 루이 18세는 지인들에게 아내를 사랑했으며 그리워한다는 편지를 남겼다.[9] 사르데냐 왕국 선언 이후 사보이아 가문 일원들은 대체로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으나 그녀는 아직 피에몬테를 수복하기 전 사망해서 칼리아리에 묻혔고 사후 수페르가 성당으로 이장되지 않았다.[10] 루이 14세의 장남이자 펠리페 4세의 외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