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D164><colcolor=#000000> 포르투갈 왕국 주제 1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Mariana Victoria de España | ||
이름 | 스페인어 |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보르본 이 파르네시오 (Mariana Victoria de Borbón y Farnesio) |
포르투갈어 | 마리아나 비토리아 드 보르본 에 파르네세 (Mariana Vitória de Bourbon e Farnese) | |
출생 | 1718년 3월 31일 | |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 ||
사망 | 1781년 1월 15일 (향년 62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배우자 | 주제 1세 (1729년 결혼 / 1777년 사망) | |
자녀 | 마리아 1세, 마리아 아나, 도로테이아, 베네디타 | |
아버지 | 펠리페 5세 | |
어머니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 |
형제 | 카를로스 3세, 필리포 1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루이스,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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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펠리페 5세의 장녀. 루이스 1세와 페르난도 6세의 이복동생이자 카를로스 3세의 친동생이다. 포르투갈 왕국 주제 1세와 결혼해 마리아 1세를 낳았다.2. 작위
-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 전하 Her Royal Highness Infanta Mariana Victoria of Spain (1718년 3월 31일 ~ 1729년 1월 19일)
- 브라질 공비, 브라간사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Brasil, Duchess of Braganza (1729년 1월 19일 ~ 1750년 7월 31일)
-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Queen of Portugal and the Algarves (1750년 7월 31일 ~ 1777년 2월 24일)
-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Mother of Portugal and the Algarves (1777년 2월 24일 ~ 1781년 1월 15일)
3. 생애
3.1. 미래의 프랑스 왕비
1718년 3월 31일 마드리드에서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왕비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펠리페 5세의 어머니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나 빅토리아로 지어졌다. 카를로스 3세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었다고 한다.2살 때 정략결혼의 형식으로 혼사가 정해졌다. 사국 동맹 전쟁 이후 스페인은 프랑스와 결혼을 통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스는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카를로스 왕자는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동생 필리피네 엘리자베트와 약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사촌인 프랑스의 어린 왕 루이 15세와 약혼했다. 두 사람 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신부가 프랑스 궁중에서 자라다가 적절한 나이가 되면 결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아직 3살이 되기 전인 1722년 3월 2일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루브르 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루이 15세, 1723년 |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 1724년 |
3.2. 파혼
그렇게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건 시간 문제로 보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7살이 되던 해에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문제는 1723년에 루이 15세의 총신 부르봉-콩데 공작 루이 앙리가 헛된 욕심을 부리면서 시작되었다. 부르봉-콩데 공작은 혼기가 찬 자신의 여동생 앙리에트 루이즈가 왕비가 되면 왕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리아나 빅토리아를 돌려보내기 위해 일을 꾸몄다. 루이 15세는 어릴 적 몸이 좋지 않아 궁중의 누구도 그가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때마침 루이 15세가 앓아눕자 후계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루이 15세보다 8살 아래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결혼할 나이가 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에 프랑스 궁중에서는 약혼을 파기하고 빨리 왕을 결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오를레앙 공작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와 정략결혼한 루이스 1세가 1724년 8월에 천연두로 급사했다. 왕비가 된 지 7개월 만에 과부가 된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입장이 난처해졌다.결국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파혼당했고, 1725년 4월 5일에 루이즈 엘리자베트, 그리고 아직 결혼을 안한 그녀의 동생 필리피네 엘리자베트와 맞교환 형식으로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2]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떠났을 때 많은 프랑스의 궁인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이 파혼으로 빈정이 상한 스페인은 프랑스와 적대하던 합스부르크 가와 협정을 맺었다.
3.3. 포르투갈의 왕비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나 빅토리아, 미겔 안토니우 두 아마랄 作, 1773년 |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주제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두 사람 다 음악과 사냥을 좋아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주제는 기쎈 아내를 좋아하지 않아 결혼 생활 내내 여러 애인을 두었다.
1750년에 포르투갈의 주앙 5세가 사망하고 주제 1세가 즉위했다. 주제 1세는 총신 폼발 후작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를 총리로 임명했다. 주제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실질적인 통치자는 폼발 후작이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그를 매우 미워해 주제 1세가 사망하고 딸 마리아 1세가 여왕이 되자마자 폼발 후작의 작위를 빼앗고 국외로 추방시켰다.
3.4. 왕대비
오빠 카를로스 3세가 즉위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두 국가는 영토 분쟁으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직접 스페인으로 가노년에 류머티즘으로 고통받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1781년 1월 15일에 리스본에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Mariana Victoria of Spain) | <colbgcolor=#fff3e4,#331c00> 펠리페 5세 (Felipe V) | <colbgcolor=#ffffe4,#323300> 프랑스의 루이 왕세자 (Louis, Dauphin of France) | |
루이 14세 (Louis XIV) |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4] (Maria Theresa of Spain)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of Bavaria) | |||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5] (Ferdinand Maria, Elector of Bavaria) | |||
사보이아의 엔리케타 아델라이데[6] (Henriette Adelaide of Savoy) |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Elisabeth Farnese) | |||
파르마의 공세자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Odoardo Farnese, Hereditary Prince of Parma) | |||
파르마 공작 라누초 2세 파르네세 (Ranuccio II Farnese, Duke of Parma) | |||
이사벨라 데스테 (Isabella d'Este) | |||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조피 (Dorothea Sophie of Neuburg) | |||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Philip William, Elector Palatine) | |||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Elisabeth Amalie of Hesse-Darmstadt)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마리아 1세 (Maria I) | 1734년 12월 17일 | 1816년 3월 20일 | 페드루 3세[7] 슬하 2남 1녀[8] |
2녀 | 마리아 아나 공주 (Infanta Maria Ana)[9] | 1736년 10월 7일 | 1813년 5월 16일 | |
3녀 | 도로테이아 공주 (Infanta Doroteia)[10] | 1739년 9월 21일 | 1771년 1월 14일 | |
4녀 | 브라질 공비 베네디타 (Benedita, Princess of Brazil) | 1746년 7월 25일 | 1829년 8월 18일 | 브라질 공 주제[11] |
[1] 루이 14세와 그의 정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딸이다.[2] 여담으로 부르봉-콩데 공작의 동생 앙리에트 루이즈는 새 왕비 후보로 최종 4인까지 들었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폴란드 왕국의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했고, 부르봉-콩데 공작은 이듬해에 실각했다.[3]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에게 붙는 공식 칭호.[4] 펠리페 4세의 장녀이자 앙리 4세의 외손녀이다.[5] 페르디난트 2세의 외손자이다.[6] 앙리 4세의 외손녀이다.[7] 주제 1세의 동생이다. 즉, 삼촌과 조카 사이.[8] 주앙 6세 등[9]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 페르디낭의 후처로 거론되었으나,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거절했다.[10]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립(평등공)의 아내로 거론되었으나,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거절했다[11] 마리아 1세의 장남. 죽어가는 주제 1세가 간절히 원했기에 이모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