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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3:34:32

마막

馬邈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교전 없이 항복?2.2. 제갈첨의 선봉?2.3. 마막과 강유관에 대한 고찰
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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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2. 정사 삼국지

263년에 강유관(江油關)을 지키고 있었던 수문장이다. 강유관은 강유수(江油戍)라고 불리기도 한다.[1]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경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

당시 정벌군을 이끌던 등애가 음평으로부터 우회해 들어오자 항복한다. 다른 사항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2.1. 교전 없이 항복?

한국 인터넷 상에는 교전없이 항복하였다는 설이 정사처럼 퍼졌으나, 이는 삼국지연의의 서술로서 정사가 아니다.

따라서 기록을 통해 볼 때 강유관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은 명백하다.

2.2. 제갈첨의 선봉?

현대와 달리 고대의 육로 수송은 대단히 비효율적이므로, 사천 분지와 상당한 거리를 둔 산길인 강유관이 병사가 항시 주둔하는 요새라고 보기는 어렵다. 보급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으므로 설사 항시 군대가 주둔하여 둔전하였더라도 그 규모는 대체로 천 단위 미만으로 작았을 것이다. 따라서 마막은 항상 강유관에 머불렀다기보다, 촉한멸망전 당시 강유관에 파견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촉멸전 당시 이 방면으로 파견된 촉군은 제갈첨이 유일하다.

이상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가설을 부정하는 근거로는 다음이 있다.

적당히 절충하여 "황숭은 제갈첨에게 본대를 들고 강유관에 주둔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제갈첨은 머뭇대며 일부 병력만을 파견하였다." 등의 주장도 주장으로서 성립은 가능하나, 이를 확정지을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단 마막군의 소속 및 종회가 보낸 군이 격파한 촉 3교의 정체가 불명확한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2.3. 마막과 강유관에 대한 고찰

강유관은 지금의 쓰촨성 몐양시(绵阳市) 핑우현(平武县)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지역은 강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원래 광한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이후 광한속국에 속하게 된다. 동한 건안 24년(서기 219년)에 유비는 광한속국(廣漢屬國) 강저도(剛氐道) 경내에 군사 요새인 강유수(江油戍), 일명 강유관(江油關)를 설치해 북방의 조조 세력이 음평고도(陰平古道) 마천령(摩天嶺) 남쪽을 넘어 침입할 경우에 대비하였다. 이후 촉한 건흥 7년(서기 229년)에 새로 편입된 음평군에 소속됐다. 즉 강유관은 처음부터 위나라 세력을 막기 위해 지어진 요새였다.

반면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학예사 증궁석(曾窮石)의 논문 '대역사에 가려진 소사건, 강유성의 수비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 따르면, 강유관, 그러니까 강유성의 설립계기를 달리 설명한다. 강유관은 제갈량의 2차 북벌 후 생긴 것으로 경곡 → 강유 → 부관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된다. 이 점으로 봐도 등애의 진군로가 처음부터 없었던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즉, 경곡이라는 산중 깊숙한 험지 계곡 사이로 길이 있었던 셈이다. 강유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위치한 관애(關隘)였던 것.

또한 증궁석은 꽤 흥미로운 얘기를 제시하는데 바로 이 관애가 ‘한족 문화권과 비한족 문화권을 구분하는 경계’였다는 것이다. 즉, 부수 상류에 있는 이민족을 막기 위해서 설치되었다는 것. 그들이 바로 ‘백마씨(白馬氏)’였다는 것이며 이들은 저족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변의 강족 및 농우의 한인까지 유입되는 구간에 위치해 문화적으로 한화(漢化)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 바로 제갈량이 이들의 통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강유관을 이의 대비에 필요한 요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논문대로라면 괜히 연의에서 강유성의 존재가 제갈량의 개입이 있었다고 나오는게 아닌것이다.

증궁석은 논문에서 더욱이 백마씨는 조조의 서쪽 경략 후(즉, 한중전 이전) 위나라에 흡수되어 있었으므로, 촉한 입장에서 이들의 방비가 필수적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이 만에 하나 이들이 경곡을 넘어올 경우 당장 촉한의 익주 분지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후일 등애가 강유성을 넘어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꽤 오랫동안 요새화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제갈량의 정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되는 부분이다. 결국 이 주변 지역이 전부 위나라의 통제 하에서 촉한의 측면을 위협해왔고 제갈량은 그 위협을 제거하고 백마씨를 회유하기 위해 음평과 무도를 친 것이며 강유성은 바로 그 요새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음평군) 무평현에 관위(關尉)가 있다. 경곡(景谷)에 보도로만 통행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 강유의 좌담(左儋)을 경유하면 부(涪) 지역으로 나갈수 있다. 등애가 이곳으로부터 촉을 정벌했다. 유씨집안이 통치하던 당시에 의수(義守)를 설치했는데 관위(關尉)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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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국지 한중지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도 장차 다하게 되어 자주 위태로움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등애전
마침내 음평에서부터 아무 사람도 없는 7백여 리를 가서, 산을 깎아 길을 통하게 만들고, 교각(橋閣)을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서, 매우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 이르렀고, 또한 양식의 운반도 장차 다하게 되었으며, 형세가 매우 어려움에 임박하게 되어, 등애 자신도 자리를 싸들고, 밀면서 굴러 내려 갔다.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나무에 올라가서 절벽을 이어가니, 물고기가 꿰인 것처럼 나아갔다.
자치통감

파일:강유관2.png파일:강유관3.png

강유관은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에, 산을 넘고 좁은 협로를 지나서 성을 처음 조우했을때 강(부수)가 둘러쳐 있는 반월형 평지에 서 있는 성이 길목을 막고 있고 삼면이 강이라는 자연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다. 방자 측의 규모가 충분한 경우 유리함을 점할 수 있는 위치이다. 등애는 강을 따라 오지 않았고, 지도를 기준으로 동쪽 방면의 산악지대를 뚫고 강유관에 도달하였다.

"당연히 수비가 가능했어야 할 지형이 아니냐" 같은 주장도 물론 가능하겠으나, 강유관의 당시 규모나 주둔한 마막의 병력이 충분했으리라는 보장은 존재하지 않고, 무엇보다 마막을 향한 역사적 책임론도 당대 서술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강유에 주둔했을 병사들은 위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치른 군대가 아닌 후방의 병력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애초에 촉보다 국력 면에서 몇 배는 상위호환이었던 위 또한 모든 성이나 관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했던 건 아니었다. 장특의 일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합비신성같은 경우도 강유관에 비하면 보급 지원을 받기는 훨씬 쉬운 환경에 있었지만 할당된 병력은 겨우 3천이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 촉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강유와 황호를 위시한 제갈첨, 동궐 등의 내정파와의 정치적 혼란상을 감안하면 강유관에는 천 명이나 병사가 있었을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게다가 여러 기록을 교차해서 보았을 때 마막에게 책임을 논하는 비평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애초에 당시 강유관은 군사 거점으로서 군대를 막을만한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요컨대 소수의 별동대나 공작 부대가 검각을 둘러싼 산 능선을 돌아 행동을 개시하려 할 때 이것을 막으려는 것은 가능했을지언정, 어엿한 군대로 분류될 수 있는 1만이라는 수의 병력을 막는 것은 무리였을 가능성이 높다.[6]

또한 이들은 원정을 주도한 사령관이었던 강유가 실각을 두려워해 답중으로 병력을 끌고 도망치는 걸 보았고, 바로 그 사령관이 주도한 작계 변화로 인해 한중이 고작 한 달만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7]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등애가 이끄는 1만의 정예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진격해와 자신들을 포위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고, 결국 싸움 끝에 항복을 해버린 것이다.

3. 삼국지연의

자세한 설정들이 가미되었다. 우선 한중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정도 준비를 하긴 하는데 그저 큰 길만 수비하고, 그마저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군사를 훈련하고 돌아와 불을 쬐면서 술을 마시는데, 아내 이씨가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여러 번 들었는데 왜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마막은 "나랏일은 강유가 다 알아서 하는데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고, 이씨가 다시 "그래도 성을 지키는데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지만, 마막은 "지금 천자께서 황호의 말을 듣고 주색에 빠져서 나라가 말이 아니다. 적이 와도 항복하면 그만이니 걱정할 게 없다"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한다. 이게 장군이란 자의 마인드다. 참다못한 이씨는 마막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쓴소리를 하고, 마막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 누군가 음평을 넘은 등애가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전했고, 놀란 마막은 그대로 항복한다. 하지만 이씨는 항복한 남편이 부끄러워 자결했고 등애는 이를 의롭게 여겨 정중히 장사를 지내준다. 이후 마막의 병사는 등애의 휘하에 편입되었고 본인은 촉한 정벌군의 가이드 역할을 하며, 등애에게 지형도를 그려줘서 면죽관 공략을 돕는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kongming.net/403-Ma-Miao.jpg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739.jpg
삼국지 12, 13, 14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난 후 그 뒤로 쭉 출연이 없었다가 삼국지 7에서 오랜만에 복귀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 확립된 이미지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의리, 능력치는 바닥을 기며 백하팔인의 한 자리를 꿰찼다.

삼국지 7에서는 의외로 능력치가 통솔력 29/무력 56/지력 43/정치력 33, 통합 161로 백하팔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특기는 딸랑 수복 하나 뿐이다. 마막을 수성전에서 쓸 일이 없으니 마막을 없는 셈 치고 기술 셔틀이나 찍어서 짱박아 두던가 아니면 반자이 어택으로 적진에 보내서 죽게 만들든가 하면 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무력 8/지력 7/정치력 30으로 병법도 없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2/무력 17/지력 5/정치력 30/매력 15의 능력치를 자랑하며, 총합 89로 백하팔인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8] 당연히 특기 따윈 없다. 한데 열전에 써놓은 평이 "궁정의 부패로 촉의 멸망이 필연적인 것임을 예견, 촉한으로 침공해 온 등애에게 항복하고 성도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로 묘하게 좋다.

삼국지 11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능력치를 유지하며 여전히 백하팔인. 통솔력 19/무력 12/지력 7/정치력 35/매력 12로, 정치력이 삼국지 10 때보다 무려 5 상승하며 백하팔인 중 정치력 1위를 자랑하게 되었으나, 나머지 능력치가 모두 하향크리를 맞으면서 총합은 오히려 85로 전작보다 4가 줄어버렸다.
콘솔판에서는 아내 이씨도 나오는데 마막보다 능력치가 훨씬 좋다. 심지어 무력까지도.

삼국지 12 원본에선 짤렸지만 PK에서 추가되었는데 여기선 매력 없이도 백하팔인을 면했다.[9] 그래봤자 능력치가 통솔력 34/무력 12/지력 44/정치력 35으로, 백하팔인에 근접한 수준이긴 하다. 전법은 도발에 뜬금없이 변설 특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저 정치력으로는 쓸모가 없다.

백하팔인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이 낮은 능력치로는 얼핏 보면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수 수가 적고, 내정 시설에 장수를 배치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정 효율이 크게 차이나는 삼국지 12 특성상 완전한 잉여는 아니다. 낮은 의리치는 여전하지만 후방에 두면 적에게 뺏길 염려도 없는 등 전작에 비하면 훨씬 쓸 만하다. 물론 게임 전체로 보면 잉여급 장수인 건 맞고 이런 나쁜 놈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플레이어라면 명성 감소를 감수하고 처형하거나 병력 1000명만 줘서 반자이 어택을 보내면 알아서 폐기처분된다.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나오고 능력치는 전작 PK 때와 같으며 부인인 이씨도 PK에서 추가되었다. 이씨에게 딱히 관심 없으면 어떤 방법으로건 냅다 마막을 죽이고 주제에 원수로 지정하는 이씨도 죽이면 되지만, 굳이 이씨를 부인으로 삼고 싶다면 마막을 잘 죽여야 한다. 이씨도 타세력, 마막도 타세력에 있다면 처형시 무조건 원수로 지정되지만, 이씨가 자세력에 있고 마막은 타세력에서 잡힌 포로라면 처형해도 아무 일 없다. 이는 다른 인연 무장들끼리도 동일. 단 소속 세력이 멸망해 무소속 상태가 되어 버리면 처형 시 원수로 지정하고 하야하니 주의하자. 세력이 건재하고 포로로 잡혀있을 시 죽이는 것만 가능하다. 특기는 상업 1 / 언변 1(이씨 인연 효과) . 전수특기는 상업이다. 상성은 유언과 유장쪽에 가깝다. PK에 들어와서는 봉록 수지가 적자상태면 AI도 능력치가 낮은 애들부터 추방하기에 알아서 추방된다. 전법은 기병속공진이며 성격은 소심에 이상위명은 명경지수.왜? 라고 해봤자 딱히 부여할 위명도 없다. 양송과 동급이지만 하후무나 전상 같은 핵노답 보다는 조금 낫다. 에딧이 가능하다면 이씨와 이혼시켜 이씨를 구원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9, 무력 12, 지력 6, 정치 35, 매력 15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15, 지력이 38이나 깎여나갔다. 총합 87로 백하팔인에 복귀하였다. 개성은 소심, 소침, PK에서는 향도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명리, 정책은 방원강화 Lv 1, 진형은 방원, 전법은 없으며 친애무장과 혐오무장 역시 모두 없다. 이씨하고 혼인관계 인지라 마막을 죽이면 원수관계가 되지만 군단 설정 후 몇턴이 지나면 군단에서 등용되어 재혼이 가능하여 마막은 처형해도 괜찮다.

4.2. 삼국전투기

쉐임리스프랭크 갤러거로 패러디 되었다. 처음 등장한 검각 전투 (8)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간략하게 막장 쉐임리스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검각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강유관을 수비하고 있었지만 등애군이 군을 이끌고 공격하려는 순간[10] 바로 관문을 열고 항복해버리며 편의시설까지 안내해준다(...). 너무 쉽게 항복을 받아내 낸 것이 어이가 없었는지 견홍과 양흔은 사우나에서 샤워를 마친 뒤 "우리 입장에서 말하기 거시기.. 하지만, 이렇게 문을 막 열어줘도 되는 거야? 만약 우리가 실패하면 넌 배신자로 찍혀 죽을텐데?"며 물어본 건 덤. 그러자 마막 본인은 강유는 군사 담당이고 황호는 행정 담당이니 나 같은 겉절이는 그냥 대충 바람따라 물따라 살아가는 거지, 앞날 생각해봤자 고달프기만 하고 어차피 이래 죽든 저래 죽든 똑같으니 대충 살다 갈 때 되면 가는 거라고 말했다. 일단은 지금 평화로운게 중요한 거 아니겠냐고 덧붙인 건 덤. 이후 장서와 함께 국민들이 용기를 잃어가고 무기력하고 자기 보신에만 신경쓰는 촉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여담으로 작중에서 마막이 등장하기 직전 회차에선 마막을 마주작으로 패러디해 달라는 댓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다만 작가는 촉한이 멸망한 근본적 원인은 자기 보신에만 신경쓰는 촉한의 전체적 분위기에 있었으며 장서나 마막의 통수도 그 결과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했기 때문에, 혼자서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멸망을 야기한 마주작에 빗대는 것은 맥락상 부적절했을 것이다.

4.3. 아라카와 히로무의 삼국지 스피리츠

제 117회에서는 아내 이씨가 화를 내고 얼굴에 침을 뱉고 가 버리자 흥분해서 하악하악거리는 진성 M으로 묘사된다.


[1] 출전: 『中国历史地图集』第三册 22-23.[2] 촉서 제갈량전[3] 위서 등애전.[4] 위서 종회전.[5] 촉서 황권전[6] 물론 곽준처럼 소수의 병력으로도 만여명의 적을 상대하여 승리한 사례가 없진 않았으나 이건 곽준이 대단한 것이지 마막이 곽준과 비교되어 욕먹을 일은 아니다.[7] 다만 한중의 각 보루를 포기하고 싸우는 것은 원래 강유가 계획했던 일이었다. 문제는 보루를 포기한 대신 내부에 세워둔 여러 성과 군사 거점을 통해 한중을 점령하러 들어온 종회군이 보급 문제로 후퇴하게 될 시 포위 섬멸 공격을 한다는 것이 중요했는데, 이게 불가능하게 됐다.[8] 그래도 백하팔인 중에선 능력치 합은 제일 높다.[9] 마막의 매력이 높다는 소리는 아니고, 능력치 하나가 줄기 때문에 당연히 총합에서 손해본다.[10] 이 시기의 등애 군은 고된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전속은 미친 짓이라고 항변하다 등애가 죽이려 들자 그 고된 길을 다시 돌아가버린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