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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8 21:31:32

모리스 드 버클리

성명 모리스 드 버클리
Maurice de Berkeley
생몰년도 1271년 ~ 1326년 5월 3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버클리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월링포스 성
아버지 토머스 드 버클리
어머니 조앤 드 페러스
형제 토머스, 존, 마거릿, 앨리스, 제임스
배우자 에바 드 라 주쉬, 이사벨라 드 클레어
자녀 토머스, 존, 모리스, 이사벨라, 밀리센트
직위 제2대 버클리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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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고, 디스펜서 전쟁에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따랐지만,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월링포드 성에 갇혀 옥사했다.

2. 생애

초대 버클리 남작 토머스 드 버클리와 제5대 더비 백작 윌리엄 드 페러스의 딸 조앤 드 페러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머스[1], 존[2], 마거릿[3], 앨리스[4], 제임스[5]가 있었다. 1295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의회에 소환되었으며, 1308년부터 버클리 기사로 간주되었다. 1308년 에드워드 2세대관식에 참여했다.

그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여러 차례 참여했으며, 아버지가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펨브로크 가문을 섬겼다. 1297년 에이머에게 정식으로 충성 서약을 했고, 1297년, 1298년, 1299년, 1308년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에 에이머의 수행원으로서 참여했다. 1312년, 에이머는 글로스터 시의 감독권을 그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동안의 공로를 보상했다. 1314년 6월 배넉번 전투에도 에이머의 수행원으로 참여했고, 아버지와 형제 토머스가 스코틀랜드군에 붙잡힌 것과는 달리 웨일스 보병대를 이끌고 전장을 탈출했다.

1315년 4월 18일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손꼽히는 베릭 수비대 사령관을 맡아 1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수비대의 상태가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9월에 왕에게 급여를 줄 돈이 없고, 식량도 공급받지 못하고 있으니, 조속히 베릭 주민들을 피신시키고 군대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다음해 겨울, 모리스는 베릭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왕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316년 1월 17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공세를 격퇴했다. 1년 후 베릭 사령관에서 물러난 뒤 1316년 6월 사우스 웨일스의 순회판사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자격으로 1316년 7월 로저 모티머와 존 찰튼의 협력을 받고, 브리스톨 성주 바스톨로뮤 드 베틀스미어에게 반기를 든 브리스톨 시를 포위했다. 7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브리스톨 시는 7월 26일 항복했다.

1314년 12월 첫 번째 아내 에바 드 라 주쉬가 사망했고, 1316년 또는 1317년 이사벨라 드 클레어와 재혼했다. 그녀는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딸로, 당시 50세가 넘었다. 그녀는 모리스와 재혼할 때 우스터셔의 브롬스그로브와 노턴, 글로스터셔의 스탠리를 영지로 지녔으며, 1307년 이복형제인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로부터 옥스퍼드셔의 십튼과 버퍼드의 영지와 기타 특권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받았다. 모리스는 이사벨라와 결혼해 이 재산을 챙길 뿐만 아니라, 제8대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 재산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제8대 글로스터 백작이 자녀 없이 전사하면서, 그의 뜻대로 재산을 받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런데 제7대 글로스터 백작은 생전에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인 이사벨라와 조앤의 상속 권리를 제외하고, 에드워드 1세의 딸 아크레의 조앤과 두 번째로 결혼하면서 낳은 자녀에게만 상속한다는 계약을 맺은 바 있었다. 모리스는 이 계약이 부당하다고 여겼고, 에이머 드 발랑스가 자신을 지지할 거라고 기대했다. 게다가 그는 어머니를 통해 이사벨라 드 클레어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니, 클레어 가문의 재산 상속에 우선권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에이머 드 발랑스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제7대 글로스터 백작이 왕과 맺은 협약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317년 11월, 클레어 가문의 상속 재산은 제6대 글로스터 백작과 아크레의 조앤의 세 딸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에드워드 2세의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과 결혼했다. 반면에 모리스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에이머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일로, 모리스와 에이머 간의 사이는 악화했다. 1317년 10월, 모리스는 사우스 웨일스의 순회 판사에서 해임되었고, 치크의 모티머 남작 로저 모티머가 그 직위를 맡았다. 1318년 7월 31일, 에이머가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하여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협상하고 있을 때, 모리스는 동생 토머스, 왕실 기사 토머스 거니, 초대 말트래버스 남작 존 말트레버스를 포함한 가문의 여러 인사들과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펨브로크 백작령의 영지 페인즈윅의 사냥터를 급습해 사슴 200마리 이상을 죽이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에이머는 8월 8일 에드워드 2세에게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왕립 판사 4명을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버클리 가문은 재판을 막거나 지연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에이머는 1318년 12월 30일 왕실 법무관 존 호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항의했다. 1319년 1월 11일, 에이머는 책임 있는 범죄자들의 재산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고, 1월 14일에 새로운 사법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는 사냥터를 습격한 22명의 명단을 공개했고, 4월 18일에는 이 사건에 연루된 30명을 추가로 지명했다. 여기에는 토머스의 아들들인 모리스와 토머스를 비롯해 베올리의 토머스 드 버클리, 알링엄의 로버트 드 버클리 등 버클리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이 포함되었다. 버클리 가문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1319년 사법 조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1319년 6월 21일과 7월 3일 사이에 에이머의 변호사 존 에이못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버클리 부부를 9차례 회의에 소집했지만, 버클리 부부나 그들의 지지자들은 그 어떤 회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글로스터셔 보안관은 판사의 명령에 따라 버클리 부부를 1319년 10월까지 4차례의 법정 심리에 소환했으나, 버클리 부부는 그 소환에도 불출석했다. 그 결과, 모리스와 그의 동생 토머스는 10월 1일에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판사들은 보안관에게 1319년 2월 20일에 피고인을 레클레이드로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모리스와 추종자들은 회의에 참석했지만, 페인즈윅 사냥터 습격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 후 페인즈윅 주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진실을 밝히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들은 버클리 가문을 두려워 해 보안관이 5차례나 시도했는데도 1320년 7월까지 배심원단을 구성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일부 습격자는 펨브로크 백작과 직접 협상해 보상해주겠다고 밝혔다. 모리스는 형제 토머스와 함께 펨브로크 가문에 150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했다. 에이머는 이 금액과 다른 기부금을 통해 재판을 연 이래 적자가 쌓이면서 빚더미에 허덕이던 상황을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판을 계기로, 클레어 가문과 버클리 가문의 우호 관계는 완전히 깨졌다. 그 후 모리스는 제3대 위그모어 백작으로서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저 모티머의 측근이 되었다. 이 결합은 그의 아들 토머스와 로저 모티머의 딸 마거릿의 결혼으로 확고해졌다.

1320년 2월, 에드워드2세는 모리스를 가스코뉴 총독으로 선임했다. 그가 실제로 이 직책을 맡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1321년 봄에 로저 모티 모티어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웨일스 영지를 약탈했기 때문이다. 그 후 모리스는 북부 잉글랜드 귀족과 웨일스 변경 귀족들간의 동맹을 슈르번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했다. 1321년 여름, 로저 모티머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1321년 가을부터 반군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개시했다. 1322년 1월 로저 모티머가 왕실군의 압력으로 항복한 뒤, 모리스도 2월 6일 글로스터에서 휴 오들리와 함께 항복했다.

그 후 그의 영지는 왕실로 몰수되었다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넘어갔고, 로저 모티머가 런던 탑에 갇혔을 때 휴 오들리와 함께 월링포드 성으로 끌려갔다. 1323년 1월, 그의 친구들과 가신들은 그를 탈옥시키려 했다. 로저 와우튼 등은 어떤 구실을 대어 모리스를 방문했다. 그들은 월링포드 성주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성 안으로 비밀리에 밀수해 온 무기를 사용하여 그와 부주의한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버클리의 추종자 20명을 더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월링포드 성의 한 소년이 월링포드 시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시장은 즉시 민병대를 소집한 뒤 모리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봉쇄하고 왕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와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월링포드 성을 포위해, 1월 25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모리스 일당은 예배당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로저 와우톤과 다른 공모자 2명은 에드워드 2세에게 끌려간 뒤 교수형에 처해졌고, 모리스는 월링포드 성에 도로 감금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1326년 5월 31일, 그는 월링포드 성에서 옥사했다. 그 해 12월 에드워드 2세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의 정변으로 폐위된 뒤, 모리스의 장남 토머스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되찾았다. 모리스의 유해는 브리스톨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2세를 토머스 버클리가 다스리는 버클리 성으로 넘겨서 감시하도록 했고, 에드워드 2세는 그곳에서 의문사했다.

3. 가족



[1] 레스터셔 코스턴의 영주. 레스터셔 와이몬담의 버클리 가문의 조상.[2] 1317년경에 사망[3] ? ~ 1320년 이후, 토머스 피츠모리스와 초혼, 레이날드 러셀과 재혼[4] 랄프 드 스토튼의 부인[5] ? ~ 1327, 엑서터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