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관철 Moon Kwan Cheol | |
생년월일 | 1960년 4월 27일 ([age(1960-04-27)]세)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남평 문씨 |
가족 | 2남 1녀 중 막내 슬하 1남 1녀 |
학력 | 배재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 / 학사) |
데뷔 | 1987년 2월 20일 정규 1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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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프로듀서.2. 생애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창원에서 잠깐 보냈고 이후 서울에서 살았다. 록 밴드 시나브로의 보컬, 기타리스트로 참여해[1] 1980년 TBC 젊은이 가요제, 1981년 국풍가요제에 참가했다. 국풍가요제에서 같은 밴드의 기타리스트 안지홍의 곡인 '을지문덕'으로 연주상을 수상했고, 이후 같은 해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해 《안개》로 동상을 수상했다. 팀이 해체되고 1987년 1집을 발표해 솔로가수로 활동하였다.그 후 3집까지 냈으나 반응이 좋지 못했고, 시작했던 통신사 사업까지 실패하여 2001년 가평 화야산에 홀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이후 2006년 산에서 내려와 만난 피아니스트 임인건을 통해 재즈 피아노를 공부했고, 2011년 4집 앨범을 내고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3. 비운의 가수
유명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 《그대와 영원히》를 가장 먼저 최초로 녹음한 가수이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작곡가인 박성식이 문관철에게 가장 먼저 준 곡으로 이미 1984년에 녹음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앨범 제작비 부족으로 발표가 기약없이 지연되면서 결국 작곡가인 박성식(1961)은 선배인 김현식(1958)의 부탁과 압력에 의해 해당곡을 넘겼다. 이후 《비처럼 음악처럼》은 1986년 김현식 3집에 수록되면서 비처럼 음악처럼은 김현식의 노래가 되었다.[2] 《그대와 영원히》도 본래 작곡가인 유재하가 문관철을 생각하고 만든 곡이라고 가수 권인하가 밝혔다.#[3] 심지어 이 노래의 '헝클어진 머리결, 이젠 빗어봐도 말을 듣질 않고' 는 "유재하가 카페 시나브로에서 거의 숙식했는데, 문관철 파마머리가 아침마다 떡 져 있는 걸 보고 지은 노래죠. 유재하가 관철이형 주려고 이 노래를 지었다’라고 했죠.” 라는 권인하(1959)의 증언이 존재한다. 또 심히 안타깝지만 역시 제작비 부족으로 앨범을 내지 못해 이 곡은 이문세가 1985년에 먼저 발표하게 되었다.이런 사실 때문에 극 소수의 제대로된 내막을 알고 있는 팬들에겐 '두 곡의 최초 원곡 가수는 사실 문관철 이다' 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불어 두 곡의 원곡 가수는 발표를 먼저한 김현식, 이문세가 맞다라는 극소수의 김현식과 이문세 광팬들의 주장도 있으나 애초에 두 곡의 작사, 작곡을 김현식, 이문세 본인들이 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김현식, 이문세가 단독 원곡자로서의 권리가 인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문관철은 1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 안타깝게도 묵혀두었던 해당 두 노래를 삽입하면서 이 것을 증명했다.
문관철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 노래인데 그가 부르고 싶어 한 걸 어떻게 합니까'#라는 표현까지 썼으며 엄연히 문관철에게 곡을 먼저 준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원작곡가(유재하, 빛과소금의 박성식)가 존재하며 유재하는 아예 한술 더떠 '헝클어진 머리결' 이라고 문관철의 외모를 보고 서술한 가사를 지을 정도로 문관철에게 헌정한 노래가 맞다라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정이 가능하다.
- 일부에서는 '뺏겼다'는 표현까지 쓰는데 애초에 곡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작곡가에게 있다. 박성식은 당시 김현식의 보컬을 직접 듣고 곡을 주기로 결정했고,[4] 유재하는 문관철과 친했던 만큼 이문세하고도 친분이 있었다.[5] 단순히 음악계 선배라서 곡을 순순히 줬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있거나 없다. 또한 김현식, 이문세가 처음부터 문관철의 녹음본을 듣고 무단으로 발표했다면 문제가 되지만, 발표되지 않은 곡을 작곡가에게 직접 허락을 구하고 발표를 한 것이기에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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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일부 극성 열혈 김현식, 이문세 팬층에서는 주장하고 있으나 곡을 받고 녹음까지 끝마친 선배가수 (문관철) 이 있으나 더 힘이 있고 끗발이 있는 선배가수 (김현식, 이문세) 와 대형기획사의 압력이 있었더라면 원 작곡가들인 유재하와 박성식은 차마 그 압력을 못 버티고 인의를 져버리고 곡을 넘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상식적으로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언정 당연히 도의적으로 문제가 된다. 최소한의 양심이란게 있는 '인간' 이라면 말이다.
- 또다른 쪽에선 문관철이 '명곡'을 도둑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사실관계를 따지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발표 후 2년이 지난 1988년이 돼서야 인기가 생겼고,[7] 《그대와 영원히》는 발표 이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문세의 '숨은 명곡'으로 평가되었다. 두 곡 모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명곡이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문관철이 1집 앨범을 빨리냈더라도 크게 주목받았을지는 미지수이기에 '명곡을 도둑맞았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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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자의적인 의견을 길게 어필해봤자 나름 문관철의 최초 레코딩 버전을 선호 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만약에 김현식과 이문세가 앞 선 문관철의 두 곡을 발표하지 않고 오롯이 문관철이 당시 국내 굴지의 음반사 동아기획의 힘을 빌려 먼저 발표하고 제대로 된 마케팅을 펼쳤다면 결과는 어찌 됐을지 지금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문관철도 대스타가 되었을지 (어차피 그대와 영원히, 비처럼 음악처럼 두 노래가 없더라도 다른 히트곡이 많은 이문세와 김현식은 대스타였을 것이다.) 그 누구도 호언 장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되려 현재에는 마약전과와 알콜중독이 의심되던 김현식 (간경화???로 32세에 사망) 의 늘어지고 찢어지는 가래 끓는 보컬과 이문세의 느끼한 그 한계가 명징하고 현재에는 어필할 요건이 없는 보컬들보다는 문관철의 순수한 날 것, 락스피릿 마저 느껴지는 소박하고 열정이 넘쳐 순박하며 그런 느낌이 오히려 세련되어저버린 한 청년의 그대로의 느낌이 충분히 어필되는 현재인 것이다.
(때문에 문관철은 '비운의 가수'라고 불리기는 하나, 말 그대로 여러모로 운이 없었을 뿐 피해자의 위치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시대상 운운하며 멀리갈 것도 없이 현대에도 작곡가가 여러 가수들한테 동일한 곡을 불러보게 하고 그 중 하나를 택하거나, 혹은 반대로 여러 가수들에게 곡을 준 뒤 부르겠다고 하는 사람을 택해서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군가를 지정해서 곡을 만들어도 그 가수가 거절하거나 사정이 생겨 발매하기 어려워지면 다른 가수에게 곡이 넘어가는건 당연한 일이다.) 라고 애써 자위해보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녹음도 마쳤고 발매할 의지도 있었는데 도저히 상황이 못 받춰져서 발매할 수 없었는데 다른 가수가 불러버린 것이 아쉽고 억울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노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렀다 라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다. 녹음을 마쳤다고 자신의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고 결정적으로 노래의 작사, 작곡은 모두 타인에게 있으니 말이다.) 라고 말해봤자...
당연히 빛과소금의 박성식에게 '비처럼 음악처럼' 의 사용권을 먼저 획득하고 유재하가 '헝클어진 머리결' 이라고 문관철 본인을 묘사해서 가사를 쓰고 그에 대한 헌정곡으로 '그대와 영원히'를 작곡했음에도 그 원초적이고 명확한 기본 사실을 부정하며 문관철의 오리지널리티 를 부정하며 악의적으로 나무위키를 편집하는 이야 말로 단순한 김현식과 이문세의 맹목적인 팬일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초극소수를 제외하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지만 결국은 출시된 문관철의 1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비처럼 음악처럼' 과 '그대와 영원히' 두 노래가 버젓이 실렸음에도 김현식과 이문세가 아무런 법적 이의와 제재를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해당 나무위키 문서를 본인의 취향대로만 악의적이고 편협적으로 편집한 당사자는 할 말이 없다.
대중의 기호는 다양하며 김현식과 이문세 처럼 명예와 금전적으로 리치 엔터테인먼트라는 로또에 당첨될 수 있었으나 비루한 환경과 여러 악운에 따라 실패해버린, 당대의 그 누구와 견주어도 꿇리지 않을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문관철이라는 비운의 가수에 대해 다양한 기호를 가진 관심이 있는 극소수는 정확한 내막을 다 알고 있으며 그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마저도 왜곡하려는 악질적인 김현식, 이문세 팬덤에 이의를 표하는 바이다. ''The Winner Takes It All'' https://youtu.be/8tE0GjSQpes 정의란 것이 존재하는가?
<그대와 영원히> 문관철 최초(1984) 레코딩, 이문세(1985)발표, 유재하 작사작곡 https://youtu.be/WpSrU-Sux64
<비처럼 음악처럼> 문관철 최초(1984) 레코딩, 김현식(1986)발표, 박성식 (빛과소금) 작사작곡 https://youtu.be/QUGG9nlzwms
4. 음반
- 정규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87)
- 《다시 처음이라오》(1990)
- 《어쩌란 말입니까》(1993)
- 《Boot From Memory》(2011)
5. 수상
- 국풍’81 젊은이 가요제 연주상
- 제 5회 MBC 대학가요제 동상
[1] 참고로 당시 팀의 건반은 김광민이 맡았다.[2] 때문에 김현식은 문관철(1960)에게 음반이 나오기 전 술자리에서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3] 참고로 문관철은 권인하의 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4] 박성식은 김현식이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자 자기가 알던 노래와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당연히 자신의 목소리를 겸손하게 여기며 장기호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를 평생 매번 들으며 함께하던 박성식에게 마약에 찌들어 걸걸대는 김현식의 목소리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이다.[5] 유재하는 이문세가 정규 1집을 낼 때 곡을 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그 곡이 바로 《그대 내 품에》이다.[6] 오히려 작곡가 입장에서는 앨범 발매일, 곡에 대한 성공여부가 불투명한 문관철보다는 김현식, 이문세에게 곡을 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것이다. 어떤 이는 문관철의 '딱한 사정' 때문에 김현식이 선배로써 그랬으면 안됐다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사정을 따진다면 문관철보다 박성식이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박성식은 작곡한 곡마다 실패해 자신에게 작곡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비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 당시에는 곡 발표 후 인기가 있기까지는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를 감안해도 꽤나 늦게 주목받은 셈이다.[8] 사실 두 곡 뿐만 아니라 문관철의 노래들은 인지도가 아예 없거나 바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1집 타이틀곡인 '오페라'도 후에 김장훈이 리메이크하고 나서야 유명해졌을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고, 1집 수록곡이자 2집 타이틀곡인 '다시 처음이라오'도 김현식 사후에 나온 7집 앨범에 수록되고 나서야 겨우 인지도가 생겼다.[9] 또한 일부 오리지날리티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문관철 버전이 더 좋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추억 보정 및 개인의 취향 차이지 명곡의 우열을 가릴 것은 못된다. 문관철이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대중에게 있어 문관철의 보컬은 여타 보컬리스트들에 비하면 한계가 명징하고 크게 어필할 만한 요건이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