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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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 문양군 류희림 묘역 | 여계 묘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9호 | |
문양군 류희림 묘역 文陽君 柳希霖 墓域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로 363 (오금동, 오금근린공원) |
시대 | 조선 시대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수량 / 면적 | 분묘 3基, 석물 16基, 토지 534.8㎡ |
지정연도 | 2013년 7월 18일 |
관리자 (관리단체) | 문화 류씨 종친회 |
<colbgcolor=#C00D45> 문양군 류희림 묘역[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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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류희림과 그의 아버지 류복룡의 묘역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오금근린공원 경내에 있다.2. 상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바로 옆에 있다. 류희림의 할아버지인 공조참의 류인호의 묘가 장인이자 동지중추부사였던 신선경의 묘역에 마련되면서 그 일대에 류인호의 자손인 류복룡과 류희림의 묘도 같이 조성된 것이다. 즉, 일종의 가족 묘역이라고 할 수 있다.1991년 12월 24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받았다. 첫 지정 당시 이름은 '문화 류씨 묘역'이었다. 그러다가 서울특별시에서 2008년 10월 30일에 유형문화재에서 해제시키고 문화 류씨 묘역 서쪽에 있던, 유형문화재 제78호 거창 신씨 묘역과 통합하여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문화 류씨 문중의 반발이 있었고, 이에 따라 5년 뒤인 2013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에서 다시 두 묘역을 분리했다.#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은 그대로 냅두었고, 문화 류씨 묘역은 '문양군 류희림 묘역'이란 이름으로 개칭했다. 따라서 이 문서의 내용도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서와 겹치는 것이 많다.
3. 인물
3.1. 류복룡
류인호의 차남이다. 자는 공명(孔明)으로, 1478년(성종 19년)에 태어났다. 사마시에 급제하고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별제를 지냈고 이후 의금부도사와 직장, 감찰 직을 맡았다. 지방관으로도 파견되어 비안, 장수, 영평의 현령으로 근무했었는데 이때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정한 사람들을 엄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1563년(명종 18년)에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문원군(文原君)'으로 추봉되었다. 생전에 초서, 예서 등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부인 평강 채씨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었으며 차남이 아래 소개할 류희림이다.3.2. 류희림
류복룡의 차남이다. 자는 경열(景說)로, 1520년(중종 15년)에 태어났다. 1560년(명종 15년)에 성균관 유생 자격으로 불교 중흥을 비판하고 선 · 교종을 모두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다른 유생 1,000여 명과 함께 명종에게 올렸다.# 이듬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선조 재위 초반에는 지평, 장령, 집의 직 등 사헌부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이후 강원감사를 거쳐#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에는 파천한 선조를 옆에서 보필한 공이 있다하여 통정 대부로 가자받고 좌승지와 우승지로 임명받았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와 예조 참판을 지내다가## 동지돈녕부사로 있던 1601년(선조 34년)에 세상을 떠났다.#사망한지 3년 뒤인 1604년(선조 37년)에 호성공신 3등 및 '문양군(文陽君)'으로 추봉되었다.#
4. 묘
4.1. 류복룡의 묘
류복룡과 그의 아내 평강 채씨 부인의 묘로, 봉분은 2기이다. 묘에는 묘비와 상석, 혼유석, 향로석이 1기 씩 있고, 망주석, 문인석이 1쌍 씩 있고 묘 서쪽에 류복룡의 일생과 업적을 적어 둔 신도비가 있다.4.2. 류희림의 묘
류희림과 그의 아내 밀양 박씨 부인의 합장묘로 봉분 역시 하나이다. 석물은 아버지 류복룡의 묘와 비슷하게 있으나, 봉분에 호석을 설치했고 묘비가 없으며 다만, 묘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둔 자리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다르다.아버지 류복룡의 묘보다 위에 있는데, 이는 유교적 질서가 엄격해지던 조선 후기 이전에 조성한 묘역이라 그런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