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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21:02:30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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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1412년 ~ 1420년 1화 ~ 12화 펠로폰네소스 원정
1420년 ~ 1421년 13화 ~ 45화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1421년 46화 ~ 59화 정변기
1422년 ~ 1423년 60화 ~ 124화 제1차 대오스만 전쟁
1423년 ~ 1428년 125화 ~ 176화 1차 전간기
1428년 ~ 1432년 177화 ~ 225화 세르비아 십자군
1432년 226화 ~ 247화 제2차 대오스만 전쟁
1432년 ~ 1435년 248화 ~ 277화 2차 전간기
1435년 ~ 1436년 278화 ~311화 나폴리 전쟁
1436년 ~ 1438년 311화 ~ 356화 제3차 대오스만 전쟁
1438년 ~ 1445년 357화 ~ 377화 재건기
1446년 ~ 1448년 378화 ~ 407화 맘루크 전쟁
- 408화 ~ 410화그 후

1. 개요2. 정치3. 정세
3.1. 아나톨리아&중동3.2. 유럽
4. 경제&문화5. 종교6. 황실 일원들의 행적7. 외전: 현 세계관 속 서유럽의 정세에 대하여(대전쟁까지)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드라가시스 황제, 이하 회생제 사후의 주인공 행적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본 문서는 사신이 보여주는[1] 제국의 역사를 여러 가지로 재분류해서 정리해 놓았다.

2. 정치

회생제 사후 제위에 오른 토마스는 지속적으로 조카인 안드레아스 황자를 통해 권력 욕망을 내비치며 세력화하려는 소피야 황후를 계속 견제했다. 대법관 데미클레오테스에게 7인 위원회 법관들 모두에게 항상 소피야를 주시하고 위법한 행위를 하면 즉각적으로 제지하며, 소피야의 주장에 동조하는 군부 장교들이 나오지 않게 최대한 막아놓으라는 토마스의 지시를 그대로 실천함에 따라 소피야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게 된다.

허나 그렇게 하면서도 토마스는 끝내 혼인도 하지 않았기에 소피야는 나름 만족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고, 자신의 사후를 나름 생각했던 토마스는 사석에서 여러 번 찾아와 황위와 회생제 혈통의 속박에 대해 이야기하는 안드레아스에게 소피야의 야망에 대한 위험성을 말해주며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고, 이에 따라 1467년 공식으로 안드레아스가 토마스 황제의 양자가 되어버리면서, 끝내 소피야는 회생제 생전에 다짐했던 황태후로 서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5년 뒤 전설의 계승자였던 토마스도 숨을 거두게 된다. 시호는 완성자, 향년 63세였다.

토마스 사후 황위에 오른 안드레아스 황제부터 시작해 후대의 수많은 황제들은 회생제나 토마스 황제만큼의 업적을 남기진 못했지만 다들 공통적으로 회생제의 유지[2]에 따라 국가 번영과 때에 맞는 개입 전쟁으로 국가를 경영해왔고, 또한 이들 모두가 회생제 드라가시스 황제의 혈통이었던 만큼 정통성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드라가시스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넘어 이젠 회생제 다음으로 최고의 칭호라는 명예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전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 황제는 의회를 상대로 함부로 윽박 지르지 못해 권력 분산이 문제 없이 이루어졌고, 제국 의회의 위상이 굳건함을 확인했던 알바니아의 제르지, 그리고 세르비아의 라자르는 미래 제국의 발언권 확보를 위해 각각 디라키온 총독, 서방 사령관이라는 제국 관직을 더 내세우며 제국에 자발적으로 흡수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까지 제국은 황실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황실, 의회, 봉신국들 모두 회생제의 권위를 빌린 탓에 황실을 폐지하자는 발언은 제국 내부에서 반역자 취급을 받는다.

3. 정세

3.1. 아나톨리아&중동

오스만의 멸망 후 제국은 회생제의 유지인 아나톨리아 안정화를 위해 아직 남아있는 투르크 부족 소탕 작전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구심축 역할로 서던 오스만 정부가 완전히 소멸하면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은 수많은 부족으로 분열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 경쟁이 벌어진다. 이런 경쟁에서 밀려난 작은 부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국에 투신함과 동시에 하나 둘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믿음을 지켰던 제국 내 이슬람교도들도 자신들을 버린 맘루크 칼리프에 크게 실망하여 세속주의 성향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이렇게 제국에 귀순한 투르크인들은 할리드의 관리 하에 무르타티가 되어 군인으로 있다가 제국 영토 전역에 퍼져 살게 되었고, 무르타티라는 명칭은 회생제와 같이 재건 전쟁에 함께했다는 어마어마한 상징성이 붙어 회생제가 죽은 지 불과 반 세기만에 그냥 "투르크계 제국인"이라는 무난한 단어로 남게 된다.

그리고 제국이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아나톨리아 정리에만 힘쓰는 동안 본편 후반부터 쭉 이어져왔던 흑양 왕조 vs 백양 왕조의 전쟁에서 맘루크가 종교 갈등을 뒤로 하고 시아파인 흑양 왕조를 지원해 같은 수니파이면서 우준 하산의 백양 왕조를 멸망 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일이 생기자, 맘루크에 전면 반발하여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해 이후 수백년 동안 맘루크와 여러 번 패권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이 두 국가가 이렇게 싸우는 사이 제국은 15세기 말, 아나톨리아 통일을 완수한 뒤 온전한 평화를 바랬던 회생제와 완성제의 유지에 따라 그 이상의 확장을 하지 않았고, 대신 유럽 국가들의 레반트 십자군을 후방 지원만 하면서 맘루크 견제만 하다 안티오키아를 수복하거나 트라페준타 제국을 흡수하는 선에서만 머물기만 했다.

그렇게 회생제의 뜻대로 무리한 성전 전쟁은 안하는 듯 하였으나, 제국주의가 눈을 뜨는 18세기 말 무렵, 국력이 약화된 맘루크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벌여 끝내 맘루크를 멸망시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일부 지역을 회복하게 되었고[3] 이렇게 확립된 영토로 근대, 그리고 현대까지 유지해낸다.

3.2. 유럽

한편 유럽 쪽에서는 토마스 황제 제위기 때 실질적 동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에서 각자의 분쟁에 제국이 개입해달라는 요청을 수도 없이 보내왔으나 이에 대해 토마스는 잠시 외무대신으로 올라섰던 프란치스코의 입을 통해 사신들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면서 또다른 동맹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과 아라곤 측과 험악할 수도 있었던 난처한 상황을 피해낸다.

그리고 회생제 서거 6주기, 왈라키아의 블라드 2세가 갑자기 암살당하면서 장남인 블라드 수도공[4]과 차남 미르체아 2세가 공위를 놓고 싸우는 왈라키아 내전이 발발한다. 이 내전에 대해 신롬의 알브레히트 황제는 토마스에게 내전 개입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압력을 행사했고, 토마스도 그 주장에 동의하여 중립을 유지하였으나 친 제국파였던 미르체아가 승리하자 신성 로마 제국은 이 배후에 제국이 있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양 로마 제국은 조금씩 반목하게 된다.

허나 알브레히트 황제 스스로도 지금은 제국이 아니라 북이탈리아 장악이 우선이라고 애써 무시하려고 했었기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엔 별 문제 없었으나, 알브레히트 황제마저 서거한 1458년 3월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동원에 극도의 피로를 느낀 헝가리 귀족들이 권력의 공백을 틈타 후냐디를 왕으로 내세우며 1466년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다. 이에 대해 후냐디는 의외로 처음엔 달가워하진 않았으나, 신성 로마 제국 전체가 자신의 권리를 박탈하고 파면하게 되자, 끝내 충심을 접고 헝가리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위에 오른 후냐디는 자신의 왕위 승계에 이의를 제기하며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인 폴란드를 막아내야 했고, 후냐디는 자신의 혈맹이기도 한 제국에게 참전 요청을 보낸다. 거기다 헝가리가 폴란드에게 먹히는 걸 경계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왈라키아에 대한 종주권 양도를 조건으로 제국의 헝가리 개입을 묵인하면서 이 전쟁에 블라드 3세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이 파견나가 폴란드를 저지하는 한편, 외교 차원에서도 중재하려는 등 제국의 국제적 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결국 헝가리를 놓고 벌어진 계승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국력이 심히 약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프랑스 아비뇽의 대립 교황과 교황청이 전면 대립하는 구도가 나타났고, 이렇게 지나친 경쟁 끝에 교황청이 밀려 아비뇽 교황이 우위를 차지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프랑스 정부가 아비뇽 교황을 강제 종속시키면서, 이를 본 수많은 신학자들이 프랑스와 프랑스의 개가 되어버린 교황을 비난하며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새로운 종교 개혁 운동이 발생했고, 여기에 교황을 종속한 이후 종교적으로 변질된 국가주의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두되면서 실제와 완전히 다른 종교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헝가리를 먹기 위해 나섰던 폴란드도 후냐디와 블라드 3세의 필사적인 저지로 결국 이득 없이 전쟁을 끝내면서 모스크바 공국[5]와 튜튼 기사단을 패며 만든 전성기가 저물게 되어버렸지만 이런 와중에 제국은 왈라키아 공국 종속과 폴란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크림 반도 접수로 챙길 이득은 다 가진 나쁘지 않은 전쟁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종교 전쟁과 거리가 있었던 영국과 이베리아 국가들은 1세기나 늦은 17세기가 돼서야 초기 식민주의에 눈을 뜨면서 뒤늦게 식민지 개척을 시작했지만 제국에 의해 안정화된 동방 무역로가 있던 만큼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에 큰 열의를 가지지 않았고, 이렇게 2세기가 흘러 실제 미국 건국 100주년을 넘긴 19세기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식민지 시대가 열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18세기 말, 제국이 맘루크를 정복하고 수백 년 전 분열 초기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자, 전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제 자리로 돌아온 제국을 진정 로마 제국으로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고, 이후 국제 사회 공식 석상에서도 로마 제국이라고 공식적으로 불리게 된다.

4. 경제&문화

북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치안이 악화되자 이에 많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피렌체의 금융 산업에도 중대한 차질이 발생된다. 그래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자본가들은 통화인 플로린의 가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플로린을 기축 통화로 공인한 제국에 조폐청을 새로 마련해 둔다. 이렇게 개설된 조폐청 덕분에 안 그래도 부유한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경제의 한 축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반면에 아직 남아있던 흑해 거점을 통해 무역 수익을 챙기던 제노바는 16세기 초 제국의 트라페준타 합병+흑해 무역 장악으로 빠르게 몰락하면서 4차 십자군 이후 제국 영토 여기저기에서 자리 잡아 이득을 챙기던 서유럽 상인 세력은 완전히 축출 당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빈자리를 제국이 직접 운영하거나 무역 이외엔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아 신뢰를 쌓았던 라구사 공화국이 장악해버린다.

그리고 초대 제독이었던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는 맘루크 해군 견제와 함께 알제리 일대에서 설치던 바르바리 해적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 해군을 운영하면서 동방 항로를 수호해왔고, 그 덕분에 유럽 상인들의 인망은 물론이며, 이슬람권에서 넘어온 커피 등의 자원이 수월하게 전파되는 공로를 세운다. 해군이 주변 적대 세력들을 정리하는 동안, 이민국도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아직 동방 무역의 중간 기점인 이집트가 맘루크에 있는 상황에서 실제 역사만큼은 아니어도 무역에 갑작스런 변수[6]가 나타날 수도 있다 보니, 스프란체스 비서관과 이민국은 맘루크의 정세를 각 분기 별로 확인했으며, 동시에 서방 국가들에게 맘루크의 위험성과 맘루크를 몰아내고 제국이 무역로를 완전 통제해야 한다는 여론 조성을 한 세기에 걸쳐 해왔고[7], 이 뒷공작 끝에 제국이 수월하게 맘루크를 정복하면서 동지중해 상권 대부분을 통제하는 상황으로 이끌게 해주었다.[8]

허나 경제 번영을 위해 의도치 않게 문화 면에선 일부 지체되어 버린 부분이 있었는데, 회생제 시기 미래를 위한 긴축 재정과 군비 투자에만 집중하다 보니, 식문화나 의복 등 화려한 부분들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오스만의 멸망으로 터키 음식이 전래되지 않아 결국 가룸(garum)과 같은 서유럽 기준으로 난해한 음식 문화가 제국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9] 한편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처음 주장하던 미스트라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인 플레톤이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죽은 후, 타 지방 발전을 위한 과도한 경제 부담을 이유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조금씩 나타나긴 했지만, 로마인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회생제의 유지에 전면 대치되는 거라 다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세력화하면 바로 황실 차원에서 탄압함으로써 19~20세기의 민족주의 광풍이 제국에선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양한 문화가 하나로 융합된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5. 종교

토마스 황제 제위기까지 생존해 있었던 회생제의 측근 니케포로스 주교는 비록 총대주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총대주교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이러니 당연히 성직자들 사이에서 높은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니케포로스 주교는 이 발언권을 예전 회생제 암살 미수 사건에 정교회 주교들이 연루된 일로 추락한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사용하게 된다. 이에 대한 행보로 도시 중심의 민회가 관리하기 어려운 농촌 사회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여 민회에게 농민들의 청원을 전달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고, 총대주교와 합의하여 교회 직속 법률 학원 개교를 이끌어내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밑바닥부터 민심을 다져놓은 그의 업적 덕에 교회는 "농촌사회의 대변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었고, 후대 황제들도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교회를 무시할 수 없어 의회에 성직자 출신 의원과 황제 직속 조언자들을 여럿 배정해 두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허나 이렇게 좀 더 하면 의회나 황제 둘 중 하나를 교회 인사가 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니케포로스 주교는 회생제의 정교회 대숙청 사건을 회상하면서, 신앙 공동체는 세속을 위해 있는 게 아닌 사후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이며, 성직자들 개개인이 폭풍 같은 정치계의 압박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의 권력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는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유지를 남긴 뒤 숨을 거두면서 제국 내 성직자들은 니케포로스 주교의 뜻대로 중립을 유지하며 신앙적으로 굳건히 서게 된다.

이후 서유럽에서 터지는 교황 대립 분쟁과 프랑스 vs 신롬 소속 국가들의 종교 전쟁으로 교황은 물론이고 서유럽 지방 대주교들의 권위가 추락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 흔한 내전도 없이 몇 세기 동안 안정되어 있었던 제국에선 동유럽과 아나톨리아 대주교들, 그리고 동방 총대주교는 반대로 기독교의 마지막 구심축이라는 기독교도들의 인식으로 그들의 위상이 더 오름과 동시에 제국 내 기독교의 지위가 끝없이 높아지게 된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근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도 세속주의의 범람으로 제국 내 이슬람교와 함께 세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공식 국교 지위를 지키고 있으며, 때에 따라 종교적 개입을 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6. 황실 일원들의 행적

미르체아 2세와 빠른 혼인을 해 맘루크 전쟁 후반부터 팔불출 잉꼬부부를 보여주던 회생제의 황녀인 헬레네는 아버지인 회생제 사후, 볼모 생활이 종료된 남편 미르체아, 친모인 이바니아와 같이 왈라키아로 올라가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 아무리 회생제가 인정하고 아껴주긴 했지만, 사생아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 왈라키아의 보야르는 회생제를 존경하면서도 이바니아와 헬레네를 회생제와 별개의 존재로 여겨 우습게 보기만 하자 그때마다 자기들과 미르체아를 모욕하는 거라고 여긴 이바니아가 직접 나서 보야르들을 패버리는 일을 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다 6년 후 시아버지인 블라드 2세가 갑작스럽게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왈라키아의 보야르는 친 신롬 성향의 블라드 수도공과 친 제국파인 미르체아 2세로 갈라진 내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이때 여장부인 이바니아와 헬레네는 직접 무기를 들고 미르체아 편에 서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 미르체아가 내전에서 승리해 왈라키아의 대공으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미르체아와 헬레네의 가정사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신 내전과 흑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여전히 페허 상태인 왈라키아를 재건하는데 몰두를 했으며, 제국에 봉신을 자처해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왈라키아를 잘 다스렸다는 미르체아의 행적만 전해지고 있다.

한편 자타공인 회생제의 사촌으로 불려왔던 돈 프란시스코는 토마스 집권 초기에 자신의 직성과 완전히 다른 외무대신 작위를 받아 서유럽에서 참전 요청을 하러 온 사신들을 상대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짜증을 부리긴 했으나 제국의 난처한 사정을 서방에 전하는 데 성공하는 의외의 성과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신 그 방식이 말 한마디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외교계에서 상당히 무례한 어조로 전해왔었기에 제국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유럽 외교관들이 제국 정부에다 프란시스코의 방식에 대해 여러 번 항의했던 걸로 보이며, 이 항의를 넘기기 어려웠던 토마스는 프란시스코를 경질해버린다. 당사자 프란시스코는 빨리 끝나서 좋네 라는 시니컬한 반응이긴 했지만. 허나 프란시스코의 완전한 은퇴를 허용하지 않았던 토마스는 프란시스코가 병석에 누울 때까지 황실 친위대장으로 계속 굴려왔고, 결국 1468년 11월 2일, 프란시스코는 병문안을 찾아온 토마스에게 자기 삶이 종신형 당했다는 마지막 농담을 한 뒤, 숨을 거둔다.

그리고 회생제만을 바라보며 전 황제의 황후이자, 현 황제의 정부라는 애매모호한 위치를 계속 지켜왔던 요안니나는 장례식장에서도 자식을 하나라도 준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자신한테는 아이를 남기지 않았다며 농담 같은 원망을 했었지만[10], 회생제와 함께 있어왔던 순간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었는지, 이후 나이가 들어 죽어 가고 있을 때도 회생제를 그리워하며 그에 대한 조금의 원망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신을 통해 제국의 미래,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의 생애를 확인했던 회생제, 주인공은 마지막 근현대기의 한 카페에서 문화 발전이 덜되어 까나리 액젓 같은 가룸이 판을 치는 제국에서 에티오피아의 커피[11]가 들어온 게 다행이라고 하는 사신의 농담을 듣다가, 갑자기 주인공의 능력이 아깝다며 다시 한 번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사신이 권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바로 행정, 국가 관리에만 신경 쓴다고 미연시는 커녕 주변 대인 관계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무정한 삶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일거에 거절한다. 그래도 이런 주인공의 반응을 예상했던 사신은 웃으면서 돌아가면 휴가 내고 당신이 만든 세계 구경이나 하라면서 주인공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회생제로써 마지막 경의를 표한 뒤, 주인공을 원래 차원으로 돌려보낸다.

7. 외전: 현 세계관 속 서유럽의 정세에 대하여(대전쟁까지)

공식 Q&A
우선 작가는 위의 공식 Q&A를 끝으로 해당 작품을 완전히 끝냈기에, 이후의 역사 변동이나 초대형 사건에 대해선 일부 하드 애독자가 남기고 있는 2차 창작 설정에 의존되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쓰는 설정 내용은 실제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수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12]

프랑스가 일으킨 2차 아비뇽 유수 사건은 유럽 기독교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안 그래도 대립교황을 세워 로마 교황과 대치하는 정세를 자초한 터라, 프랑스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졌었는데, 거기다 프랑스가 터트린 이 사건은 수많은 (구) 가톨릭 국가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반 프랑스 연맹을 세우게 된다. 이에 저항하여 프랑스 역시 친 프랑스 성향의 밀라노 공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들을 모아 대립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 굴복한 교황에 항의한다는 뜻에서 여러 신학자들이 로마 교회에 독립하자는 신개념 종교 개혁 운동을 선언했지만, 실제 역사와 다르게,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에 일조하지는 않고 반대로 프랑스에 분노를 쏟아내기만 할 뿐, 제후들의 분열이 나타나진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프랑스의 친 프랑스 연맹과 합스부르크 주도의 반 프랑스 연맹의 대립은 결국 이탈리아 분쟁을 시작으로 동서 종교 전쟁으로 확전된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확실한 승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북이탈리아 공국 쟁탈전이 수십 년에 걸쳐 벌어지다, 프랑스 측의 밀라노 공국이 끝내 북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롬바르드 왕국을 선포하게 되는 프랑스의 판정승으로 흐지부지 종결된다.

이후 프랑스는 자신의 교황의 권위를 앞세워 절대 왕정의 시대를 열었던 것으로 보이며, 종전 이후 세력이 약해진 신성로마제국 측은 이전 제국과의 교회통합에 대한 이득을 기반으로 실제 역사대로 합스부르크 제국 건설에 몰두하는 게 아닌 신성로마제국의 존속에 온 힘을 쏟아왔고, 반 프랑스 연맹의 일원이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스티야 왕국를 누르고 서지중해 전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아라곤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게 18세기 근대기까지 유지되다, 절대왕정, 앙시앙 레짐 체제로 신민들을 억누르던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끝내 터진다. 혁명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과 부르봉 왕가 측 인사들[13]이 처형되었는데, 혁명 정부 내 기나긴 혼란 끝에 혁명 속에서 살아남은 부르봉 왕족 중 하나가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유럽에 대한 혁명 전쟁을 개시한다. 이 혁명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원래의 역사대로 프랑스에게 멸망당할 뻔할 정도로 독일의 대부분이 프랑스 제국군에게 장악당했지만, 아라곤의 뒤늦은 참전과 로마 제국을 비롯한 반 프랑스 성향의 국가들이 반격하면서 끝내 프랑스는 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신성로마제국은 제후국들 간의 건설적 논의 끝에 제국을 해산하고 호엔촐레른 왕조프로이센 왕국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대공국이 함께 주도하는 대 독일 연방으로 재수립된다.

혁명 전쟁에서도 밀리고 유럽에서 고립된 프랑스는 1차 대전 직전 독일 제국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버린다. 프랑스 정부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국토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는 걸 넘어 국력을 크게 키우는 데 성공했고, 거의 모든 프랑스인들은 언젠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아라곤을 밀어내고 동방의 로마 제국과 동등하게 대립하는 패권 국가로 서는 날을 간절히 바랬다. 이런 바람은 훗날 20세기 초 프랑스의 선공으로 세계 1차 대전에 대비되는 대전쟁이 터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 전쟁의 발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전 종교전쟁 때처럼 북이탈리아를 놓고 다툰 것으로 추정되며, 이번 전쟁에서도 프랑스는 여러 국가들[14]과 동맹을 맺고 유럽을 공격했지만, 끝내 전방위로 밀려 패전하게 된다. 이 때 전쟁의 댓가로 이탈리아의 패자 롬바르드 공화국은 완전히 멸망해 통일 이전 여러 개의 공국들로 분할되었다.[15] 그리고 프랑스는 아메리카[16]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일부 지역에 겨우 세운 식민지들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전체주의 비슷한 사상이 프랑스에 불어닥쳐 2차 대전이 터졌다는 미완성 설정도 있으나, 이 부분은 설정 충돌과 여러 변수에 대한 논란[17]이 있기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1] 회생제가 작중에 했던 어마어마한 노력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2] 사신이 보여준 절망의 미래를 보고 온 회생제가 생전 마지막 3년에 걸쳐 직접 남긴 수기가 황실 대대로 전해졌다고 전해진다. 현대인인 주인공답게 시대를 초월한 수많은 조언과 교훈(예를 들어 민족주의자유주의혁명, 그리고 이념 싸움)들이 실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후세의 거의 모든 황제도 국정을 위해 반드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3] 추가 설명에 따르면 제국 원정군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메카가 있는 헤자즈 왕국까지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나 제국 내 새로운 종교적 소란과 사파비 왕조와의 전면전을 우려한 나머지, 그냥 헤자즈 왕국을 속국으로 둔 것으로 보인다.[4] 본편엔 나오지 않았으나 미르체아와 블라드가 제국에 있는 동안 그 혼자 신성 로마 제국의 볼모로 오스트리아 쪽에 머물고 있었다.[5] 폴란드의 지속적인 침공과 러시아 정교회 독립이란 자충수로 인해 러시아 제국 성립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나마 폴란드가 약화된 틈을 타 주변 공국들과 느슨한 연맹 형성까진 성공했으며 거기다 덴마크스웨덴 왕국과의 연방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작가를 통해 전해졌다.[6] 당장 해당 장면부터 맘루크 왕국 측에서 향신료 관세를 멋대로 올렸다는 하소연이 나왔다.[7] 심지어 맘루크 칼리프에 반대하여 전면에 나선 사파비 왕조의 흥기 배후에 이민국이 일정 부분 개입했다며 언급되고 있다.[8] 또한 동방 무역로의 안정화로 이베리아 국가들이 위험한 아프리카 탐험과 신대륙 발견 등에 대한 필요성이 증발해버려 유럽 역사의 전환점인 대항해시대가 거의 2세기나 늦어졌고, 아메리카 대륙 진출 시기도 그만큼 늦어지면서 이후 제1, 2차 세계 대전을 앞둔 19세기 후반인 근대기에 들어섰음에도 미국이 건국되지 않는 역대급 나비효과로 이어지게 된다.[9] 미래를 둘러보다 잠시 가룸 식당에 휴식을 취하던 사신도 다 좋은데 이런 문화만 별로라며 회생제에게 짜증을 부렸다.[10] 이를 두고 진히로인이라는 공식 설정까지 있었음에도 이렇게 끝내 버리냐는 안타까운 반응도 있었지만, 만약에 요안니나의 아이가 있었더라면 아이 성별은 상관없이, 드라가시스 + 칸타쿠제노스 라는 정신나간 혈통이 탄생해 회생제가 구축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정통성에 큰 위협이 되기도 하면서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계승 내전으로 직결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역덕 반응도 있다.[11] 18세기 맘루크 대정벌 당시, 홍해를 따라 메카 일대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에티오피아와 접촉했고,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홍해 일대에 제국 조차지 또는 거점 식민지가 개척되었다. 이 때 커피를 비롯한 여러 아프리카, 중동 작물들이 제국으로 유입된다.[12] 참고자료: 팬픽 연표[13] 거기다 프랑스 동맹인 롬바르드 왕국에도 혁명의 여파가 불어닥쳐 밀라노 왕실을 비롯한 북이탈리아 유력 가문들이 거의 전멸당했다고 전해진다.[14] 롬바르드 왕국 이외의 동맹국이 어디였는지는 언급이 없어 정확히 특정 불가능. 연표를 작성한 독자는 현실 스페인 제국 위치로 세계적인 패권을 건설할 타이밍을 놓친 대영제국이 프랑스 편에 섰다고 추측하고 있음[15] 이 공국들의 군주로 대부분 아라곤 또는 합스부르크 출신 귀족들이 착임했다고 전해지며, 라벤나안코나 같은 아드리아해에 있는 몇몇 도시국가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제국의 자유도시로 들어갔다고 한다.[16] 이 손실이 있었기에 끝내 미국이 탄생하지 않았다고 정한 정식 설정과 달리 프랑스령 퀘벡캐나다로, 루이지애나 식민지가 미국으로 독립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음.[17] 소련의 탄생, 일본의 갑작스런 서구화+제국주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