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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9-03 18:51:12

바르다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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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25대 샤한샤
Wardān | 바르다네스 1세
파일:바르다네스 1세.jpg
제호 한국어 바르다네스 1세
중세 이란어 Wardān
영어 Vardanes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46년
재위 기간 38년 ~46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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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25대 샤한샤.

형제인 고타르제스 2세와 지속적으로 투쟁하다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바르다네스'(Vardanes)는 중세 이란어 단어 'Wardān'(장미)을 라틴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아르타바노스 2세의 아들로, 3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이때 형제 고타르제스 2세와 함께 나라를 분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부 파르티아를 다스렸고, 고타르제스 2세는 동부 파르티아를 다스렸을 것이다. 1년 후 귀족들이 고타르제스 2세의 잔인한 통치와 가족 살해에 불만을 품고 바르다네스 1세를 초청했다. 그는 곧바로 공세를 개시했고, 고타르제스 2세는 다하에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후 부왕 아르타바노스 2세 치세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그때까지도 반란을 이어가고 있었던 셀레우키아를 포위 공격했으나, 고타르제스 2세가 다하에와 히르카니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동방 영토를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39년 셀레우키아 포위를 중단하고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귀족들이 다른 자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화해했고, 이후 파르티아의 왕좌를 차지하고, 고타르제스 2세는 히르카니아에서 통치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후 셀레우키아로 재차 쳐들어가고 40년에서 43년 사이에 셀레우키아를 공략하고, 셀레우키아 조폐국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했다. 또한 셀레우키아의 자치권을 상당히 축소시켰는데, 특히 도시 자체의 동전을 주조하는 특권을 박탈했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베리아 출신의 미트리다테스 왕(1차 35~37, 2차 42~51 재위)은 로마와 마찰을 벌이다가 칼리굴라에 의해 추방당했다. 그러다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집권한 클라우디우스 1세는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로 다시 보냈다. 그는 로마군의 협력에 힘입어 아르메니아 전역을 공략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입지가 불안하다고 여기며, 위험인물로 간주된 인사들을 학살하고 백성을 폭압적으로 다스렸다. 이에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바르다네스 1세에게 구원을 호소하자, 아디아베네의 왕 이자테스에게 자신과 함께 아르메니아를 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자테스는 다섯 명의 아들이 로마에 인질로 가 있었기에,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가 로마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하여 거부했다. 가신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자, 곧바로 분노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아디아베네를 침공했다. 그런데 몇몇 귀족들이 고타르제스 2세에게 왕위를 쟁취하라고 선동했다. 서기 43년, 고타르제스 2세는 귀족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후 즉시 군대를 회군시켜 에린드 강을 사이에 두고 형제와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바르다네스 1세가 강을 건너려는 적군을 격퇴하면서 승리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신드 강 인근까지 공략했지만, 군대가 더 이상 이동하길 거부해서 그 자리에 승리 기념비를 세운 뒤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고타르제스 2세는 박트리아로 피신한 뒤 저항을 계속 이어갔고, 파르티아는 형제간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서기 46년, 사냥을 하던 중 귀족들에게 살해되었다. 사후 오랫동안 바르다네스 1세와 투쟁했던 고타르제스 2세가 파르티아 전체의 군주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