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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20대 샤한샤 ΜΟΥΣΗ | 무사 | ||
제호 | 한국어 | 무사 |
그리스어 | ΜΟΥΣΗ | |
영어 | Musa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 | |
재위 기간 | 기원전 2년 ~ 기원후 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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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20대 샤한샤.이탈리아 여자 노예 출신으로 프라아테스 4세의 황후가 되었고, 나중에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함께 공동 샤한샤까지 올랐으나, 파르티아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로마로 망명했다.
2. 생애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로마군을 사열시킨 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하여 카르헤 전투와 안토니우스의 원정 때 노획당한 로마군 깃발과 안토니우스의 옛 부하들을 돌려받았으며,[1] 양국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무사'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노예 소녀를 프라아테스 4세에게 선물로 줬다. 아우구스투스가 그녀를 정탐꾼으로 삼거나, 샤한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로마에 유리한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보냈다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아브로마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따르면, 프라아테스 4세에게는 이미 올레니에르, 클레오파트라, 바시르타, 비스테이바냅스 등 4명의 황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라아테스 4세는 무사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프라아테스 5세를 낳았고, 무사는 프라아테스 4세의 황후 중 한 명이 되었다. 기원전 10년 또는 9년, 무사는 친아들의 제위를 확보하기 위해 남편 프라아테스 4세로 하여금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 보노네스 1세, 프라아테스 등 그의 다른 자식 4명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4명의 어린 파르티아 왕자들을 대중에게 보이면서, 파르티아가 로마에 굴복했다고 선전했다. 기원전 2년, 무사는 프라아테스 4세를 독살하고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무사는 샤한샤에 오른 뒤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근친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교차검증할 증거는 없으며, 현대 학계는 요세푸스가 과장된 민담을 저서에 그대로 적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서기 4년, 아르메니아의 종주권을 로마에게 넘기기로 협상한 일로 인해 파르티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사와 프라아테스 5세를 몰아내고 오로데스 3세를 새로운 샤한샤로 옹립했다. 두 모자는 로마로 망명하여 아우구스투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