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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2 12:07:59

보노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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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제22대 샤한샤
아르샤쿠니 왕조 초대 샤

ΟΝΩΝΗΣ | 보노네스 1세
파일:보노네스 1세.jpg
제호 한국어 보노네스 1세
그리스어 ΟΝΩΝΗΣ
영어 Vonones I
출생 미상
사망 19년 (향년 불명)
존호 샤한샤
재위 기간 파르티아의 샤한샤
8년 ~ 12년
아르메니아의 샤
12년 ~ 18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파르티아의 제22대 샤한샤이자 아르샤쿠니 왕조 초대 .

어린 시절에 당시 황후였던 무사의 모략으로 형제들과 함께 로마에 인질로 보내져 고급 교육을 받다가 조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친로마 정책을 펼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이후엔 로마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의 왕(12~16 재위)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노스 2세의 항의가 신경쓰인 로마에 의해 킬리키아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몰리자 도주하려 했고, 결국 피살당했다.

2. 생애

프라아테스 4세의 장남이다. 기원전 10년 또는 9년, 무사의 설득을 받아들인 아버지에 의해 형제인 로다스페스, 프라아테스, 세라스판데스와 함께 로마에 인질로 보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4명의 아이들을 대중에 보이면서, 파르티아가 로마에 굴복했다고 선전했다. 이후 로마에서 고급 교육을 받던 그는 서기 6년 오로데스 3세를 살해한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파르티아에 귀국하여 샤한샤가 되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귀족들은 곧 그를 추대한 걸 후회했다. 타키투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만인(파르티아인)들은 새로운 통치자의 즉위에 흔히 그렇듯이 기뻐하며 맞이했다. 그러나 수치심이 그들을 곧 사로잡았다. 그들이 세계 반대편에 구걸하여 세운 왕은 적의 교육에 중독되어 있었다. 아르사케스의 왕좌는 이미 로마 속주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오랜 세월 포로 생활을 해온 카이사르의 신하가 파르티아인들에게 명령한다면, 크라수스를 죽이고 안토니우스를 쫓아낸 자들의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보노네스는 이 적대감에 불을 붙혔다. 조상의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사냥을 거의 하지 않았고, 말 오락에 무관심했다. 그는 조국에서 일어나는 축제를 무시했다. 그의 기구에서 나온 사소한 것은 모두 자물쇠와 열쇠로 숨겨졌다. 그의 유용성, 애정, 선의(파르티아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미덕)는 그들이 보기에 악덕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예절과 비슷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안에 있는 악인과 선인에 대해 동등한 증오심을 품었다.
서기 9/10년, 아르타바노스 2세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보노네스 1세는 아직 자신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 반란군을 쳐부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산악 요새로 도피했다. 보노네스 1세는 자신의 성공을 기리기 위해 특별 주화를 주조했다. 그러나 아르타바노스 2세가 다른 군대를 모아 공세를 개시했고, 보노네스 1세는 곧 패배한 뒤 티그리스 강을 따라 셀레우키아로 도주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서기 12년 크테시폰에 입성한 뒤 샤한샤에 올랐다. 보노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6년간 버텼다.

18년, 아르타바노스 2세는 자신의 아들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삼기 위해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보노네스 1세는 로마에 지원을 호소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의붓아들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황제의 뜻에 따라 아르타바노스 2세를 파르티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 대신 로마가 지정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3세(18~34 재위)를 파르티아가 인정하기로 했다. 게르마니쿠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보노네스 1세는 시리아로 이송된 뒤 시리아 총독 실라누스 크레티쿠스의 감시하에 망명 정부를 구성했다. 서기 19년 아르타바노스 2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보노네스 1세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에 따라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의 폼페이오폴리스로 옮기기로 했다. 보노네스 1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