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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41대 샤한샤 𐭅𐭋𐭂𐭔 | 볼로가세스 6세 | ||
제호 | 한국어 | 볼로가세스 6세 |
파르티아어 | 𐭅𐭋𐭂𐭔 | |
영어 | Vologases V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228년 | |
재위 기간 | 208~2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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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41대 샤한샤.형제인 아르타바노스 4세와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으나 끝내 패망했다.
2. 생애
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이다. 20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위를 물려받아 단독 군주로서 몇년간 파르티아를 통치했다. 그러나 213년 형제인 아르타바노스 4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파르티아 동부 일대와 수사를 통제했고, 볼로가세스 6세는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수도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에서 버텼다. 이 무렵 전공을 세워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던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두 형제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려고 했다. 214년, 그는 볼로가세스 6세에게 철학자 안티오코스와 티리다테스[1]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볼로가세스 6세가 이 요청을 거부한다면,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삼아 파르티아를 침공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볼로가세스 6세는 215년 두 사람을 곧바로 카라칼라에게 보내 침략의 구실을 없애버렸다.카라칼라는 그 대신에 아르메니아 침공에 몰두하기로 하고, 테오크리투스라는 이름의 자유인이 용병대를 고용하여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테오크리투스는 아르메니아군의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216년, 카라칼라는 본격적으로 파르티아를 침공하기로 하고, 에데사와 아르메니아에게 로마에 귀순하라고 명령했다. 아르메니아는 거부했지만 에데사는 항복하고 황제에게 환영 만찬을 제공했다. 217년 원정을 떠나려던 카라칼라는 암살당했고, 아르타바노스 4세는 대군을 일으켜 카라칼라의 뒤를 이은 마크리누스를 상대로 니시비스 전투에서 맞붙었다. 양자 모두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봤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곧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당시 볼로가세스 6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신이 소유한 작은 영토에서 버티며, 상황을 지켜봤을 것으로 보인다.
224년 파르스의 왕 아르다시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진압하러 온 아르타바노스 4세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고, 아르타바노스 4세는 전사했다. 그 후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 제국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사산 왕조를 건국했다. 화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볼로가세스 6세는 셀레우키아 등 얼마 남지 않은 영토에서 228년까지 독자적인 주화를 주조하며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228년 이후 발행된 주화가 없는 것을 볼 때, 그는 그 즈음에 사산 왕조에게 제압당하여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아르메니아 왕자이거나 볼로가세스 6세의 친척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