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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8대 샤한샤 𐭕𐭉𐭓𐭉𐭃𐭕 | 티리다테스 1세 | ||
제호 | 한국어 | 티리다테스 1세 |
파르티아어 | 𐭕𐭉𐭓𐭉𐭃𐭕 | |
영어 | Tiridates 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 | |
재위 기간 | 기원전 32년/31년, 기원전 26~2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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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18대 샤한샤.프라아테스 4세에 대항하여 샤한샤를 자칭했다.
2. 생애
기원전 35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침공을 막아낸 파르티아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원전 32년 또는 31년에 프라아테스 4세의 잔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의 호응을 얻어 샤한샤를 칭했다. 프라아테스 4세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에게 달아난 뒤, 그들의 후원을 받아 반격을 개시했다. 티리다테스 1세와 프라아테스 4세는 내전을 치르는 동안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뒤 동방 속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분주하던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어느 한쪽을 돕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결국 티리다테스 1세는 기원전 30년 또는 29년에 패배한 뒤 프라아테스 4세의 막내아들을 납치하여 시리아로 도주했다. 나중에 이걸 알게 된 프라아테스 4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들과 티리다테스를 인도하라고 요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르헤 전투 당시 노획된 전투 깃발을 되돌려받는 조건을 내걸었고, 프라아테스 4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프라아테스 4세의 막내아들이 보내졌지만, 티리다테스 1세는 파르티아로 보내지지 않았다.
기원전 26년 봄, 티리다테스 1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 하부 지역에 들어와서 왕을 칭했다. 프라아테스 4세가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곧 패퇴했지만 기원전 25년 3월 셀레우키아의 조폐국에서 주화를 발행하며 맞섰다. 그러나 그해 5월 프라아테스 4세가 셀레우키아를 공략하고 셀레우키아 조폐국에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찍게 했다. 티리다테스 1세는 로마로 재차 망명했고,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솔린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로마 시민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티리다테스라는 인물이 시리아 현지 보조부대 사령관을 맡았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티리다테스 1세가 이 인물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