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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9:58:49

박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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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박승찬
Park Seung-Chan
파일:박승찬 교수님.jpg
출생 1961년 ([age(1961-01-01)]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가족 배우자 노성숙[1]
학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 / 학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 / 학사)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대학원 (신학 / 석사)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대학원 (철학 / 박사)[2]
현직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종교 천주교 (세례명: 엘리야)[3]]
경력 가톨릭대학교 시간강사
서울대학교 시간강사
수원가톨릭대학교 시간강사
한양대학교 시간강사
가톨릭중앙의료원 가톨릭임상사목연구소 전임연구원[4]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철학전공 부교수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철학전공 교수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인문학부 학부장
쾰른 대학교 토마스 연구소 객원교수
한국가톨릭철학회 부회장
가톨릭대학교 강엘리사벳 연구기금 총무이사
한국중세철학회 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성심대학원장
가톨릭대학교 김수환추기경연구소 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자문위원
가톨릭대학교 김수환추기경연구소 운영집행위원회 위원
한국중세철학회 고문
1. 개요2. 생애3. 강연 영상4. 저서

[clearfix]

1. 개요

아리스토텔레스성경에서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정의'는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되돌려주는 것'(Suum cuique)입니다. 풍부한 자연과 이성을 주신 하느님께서 풍부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셨는데 굶주린 사람이 있다면 야단치실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루카 복음서 16장 19~31절)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소중한 몫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와 사회 전체가 지향해야 할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정의는 생떼이고요. 진정한 정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평화방송과의 인터뷰 中 (2017.08.27) #
대한민국의 철학자.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중세철학회와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내 학계의 대표적인 중세 철학 권위자로 유명하며,[5] 서양사와 문화에도 해박해 종종 '서양 중세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미디어에 출연해 강연을 펼치고 있다.

2. 생애

파일:박승찬 교수 사진.jpg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사진(위)
독일 유학 시절 사진(아래)
국내 철학 교수 가운데서도 유난히 변곡점이 많은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태신앙으로서 어렸을 적부터 사제가 되기를 꿈꿨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난 후 결정하라는 아버지의 만류로 일단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6] 대학에서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학과 교수로부터 대학원 제의를 받았지만, 고민 끝에 사제를 향한 꿈이 식지 않아 다시 가톨릭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석박사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7]

그렇게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똑같이 철학을 공부하러 온 한국인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가게 되었다.[8] 신학생 신분으로 사제를 꿈꾸던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할지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몇 달 동안 고민한 끝에 사제가 되려던 꿈을 포기하고 여학생과 연을 맺은 뒤,[9] 중세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10]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는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 고심 중이었는데, 그가 아내를 데리고 귀국한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이 때의 여학생이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노성숙 교수이다.[11] 부부가 전공이 같다보니 함께 저술, 연구 활동을 하기도 한다.

강사로서 생활하던 가운데, 1995년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해 새롭게 출범한 가톨릭대학교에선 기존 신학대학 철학과를 인문대학으로 옮기며 교수진을 정비 중인 상황이었는데,[12] 이 과정에서 '중세 철학 전공자를 구한다'는 모집 공고를 접하고는 2000년에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이후 교수 생활을 이어가며 한국중세철학회 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2009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선종 후에는 그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는 "김수환추기경연구소"가 가톨릭대학교에 설치되며 관련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철학실천철학상담에 대한 관심도 커서, 철학을 통한 청소년 인문상담 프로그램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3. 강연 영상

중세 유럽 역사 속 혐오 (2020.10)

4. 저서

주 저서
번역
감수

[1]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현대철학을 전공하였다. 박승찬 교수와는 독일 유학 시절 만나 결혼하였다. 박승찬 교수는 중세철학을, 노성숙 교수는 현대철학 및 철학상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2] 전공은 중세철학, 박사학위 논문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중세 언어철학의 신학적 수용: 유비 문제를 중심으로'(1999)#[3] 태어난 지 6일만에 유아세례를 받은 모태 신앙인이다. 작은할아버지는 몬시뇰까지 오른 성직자이며, 집안 전체가 가톨릭이다. 노성숙 교수 역시 가톨릭이다[4] 당시 3개 대학을 열심히 돌면서 시간 강사를 했는데 한 달 받은 돈이 56만 원이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가톨릭중앙의료원 임상사목연구소에 취직했는데, 그곳에서는 중세 철학을 공부할 수 없어서 고민이 많다가 아내가 용기를 줘서 다시 시간 강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톨릭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교수 모집 공고가 나서 응모했고 하느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5] 앞선 세대에는 성염 前 교황청 대사, 정의채 신부, 박영도 부산대 교수가 유명했으며, 현재 활동 중인 다른 중세 전공 학자로는 이재룡 신부, 이상섭 서강대 교수, 이재경 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6] 김용옥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식품공학과의대를 뛰어넘는 입결을 자랑했다고 하니, 청소년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인 것으로 사료된다.[7] 사실 천주교에는 이런 케이스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차동엽 신부, 정순택 주교도 서울대 졸업 후 신학교에 입학했다.[8] 일화로, 박승찬 교수가 크게 아팠을 당시 여학생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주었고, 박 교수는 그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9]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독일 친구들에게 전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은 평균 결혼 연령이 낮았고, 연애 결혼도 드물었지만 독일은 그때에도 동거가 자연스러웠다. 노성숙 교수에게 사람들이 "엘리야(박승찬 교수)랑 살아보지도 않고 결혼해도 되겠어?"라며 물어봤다고 한다.[10] 본인은 전공을 식품공학에서 신학으로, 신학에서 철학으로 두 번 바꾸었다면서 이중전과자라는 농담을 한다.[11] 노성숙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학사와 석사[13]를 마치고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현대철학과 철학상담.[12] 통합 이전 철학과 출신인물로는 박홍 루카 신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