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박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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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을 설명하는 문서.
2. 포지션
선수 생활 동안 포지션 변화가 잦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지성의 기량이 어중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포지션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였던 다재다능한 선수였기에 구단의 필요와 감독의 권유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거친 경우다. 교토 시절은 윙백, 히딩크호 국대 초기에는 수비적 역할의 중앙 미드필더[1], 2002 월드컵 직전 윙 포워드로 정착해 교토에서도 윙 포워드로 뛰었고 히딩크와 함께 넘어간 PSV 시절도 쭉 윙 포워드로 뛰었다. 이후 국대에서 코엘류호와 본프레레호, 아드보카트호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빈도 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2006 월드컵 본선에서는 다시 4-3-3의 윙 포워드로 뛰었다. 이후 허정무호가 출범하고는 4-4-2의 왼쪽 윙어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했다. 맨유에서는 4-4-2의 윙어를 가장 많이 소화했고 이따금씩 4-3-3의 윙 포워드로도 출전했다. 09/10 시즌에는 때때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중앙으로 스위칭하는 움직임이 잦더니 맨유 말기와 QPR, PSV 에서는 중앙 미드필더와 윙어 번갈아가며 출전했다. 박지성의 포지션이 공격수라는 의견과 미드필더라는 의견이 자주 충돌하는데, 박지성은 공격 진영과 수비 진영 가릴 것 없이 뛰어다니는 스타일이며 본인이 가장 오랫동안 뛰었던 구단에서의 역할 또한 미드필더에 가깝고[2], 본인의 성향도 미드필더 성향이다.[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클럽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수행했는데, 기본적으로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공격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200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크랙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다만, 박지성의 자서전에 따르면 맨유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공격적 능력이 본인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조연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했으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자신이 주연의 역할을 맡아야 하니 상반된 플레이 스타일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4]
3. 장점
커리어를 통틀어 박지성의 장점은 세 개의 폐라고 불릴 정도의 왕성한 활동량에 기반한 전방 압박과 뛰어난 수비력[5][6], 높은 공간 이해도와 박스 근처 짧은 패스를 통한 유연한 연계 및 오프더볼, 저돌적인 돌파에 이은 지능적인 파울 유도, 몸을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경합,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틸리티 능력[7]이라고 할 수 있다.PL 스탯을 기준으로[8] 박지성의 평균 90분당 태클 성공 횟수는 3회, 태클 성공률은 73%, 인터셉트 2회, 리커버리 4회, 지상 경합 성공률은 54%에 달하며[9], 이러한 수비적 능력을 통해 상대 중요 키플레이어를 맨마킹 해서 무력화 하거나[10], 상대 풀백의 공격력을 약화시키고 중원 싸움에 가담하며 팀에 보탬이 되어준다. 특히 태클 능력이 우수했는데, 후술할 장점인 활동량과 압박 능력이 더해져 시너지를 낸다. 풀타임 기준 평균 10~12km를 자랑하는 왕성한 활동량[11]을 바탕으로 전방에서부터 조여오는 숨막히는 공격적인 압박 축구(전방 압박)를 구사하며, 압박 타이밍이 좋아 높은 지점에서 인터셉트 하거나 드리블 하는 선수 시야 밖에서 나타나 인터셉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지성이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상황은 대체로 대치하고 있는 상대 선수의 몸이 뒤쪽으로 향해있거나, 볼 줄기가 느려지거나, 볼이 어느 팀의 것도 아닌 상태(루즈 볼)가 됐거나, 상대 선수가 공을 오래 소유하는 상황이거나, 본인이 공의 소유권을 잃은 상태일 때면 쏜살같이 달려와 바로 압박한다.[12]
높은 공간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오프 더 볼 움직임으로 공격 상황 시 동료의 공간을 창출하거나 빈 공간에 직접 침투하며, 미드필드 싸움에선 아군의 패스 옵션을 제공해주고, 터치라인 부근에서 상대의 공격 시엔 예측을 통해 패스 길목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다. 박지성의 공간 창출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교란시켜 동료가 공을 받거나 침투할 공간을 만들거나 공을 소유할 시엔 상대가 자신에게 붙을 때까지 기다린 후 동료에게 패스를 건내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공간 창출, 오프 더 볼 능력과 볼의 흐름을 살리는 짧은 패스를 통한 연계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본인이 중앙으로 움직임을 가져가며 박스 근처에 있는 동료 공격수나 터치라인 부근에서의 아군 풀백 혹은 중앙을 통한 원 투 패스를 통해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포지션이 좌, 우를 구분하지 않은데다 양발을 모두 사용하며 유틸성이 높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수 있어 때때로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기도 하며 경기 중에 포지션 스위칭 또한 자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인이 압박을 당하는 중이거나 볼을 뺏길 것 같을 시엔 지능적인 파울 유도 능력으로 어떻게든 공격권을 유지시킨다.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상대의 공격 기회가 늘어나는 만큼 공수 밸런스와 전술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지는데 이렇듯 윙어치고 중앙 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뛰어난 수비력과 준수한 연계력, 많은 활동량과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점으로 인해 박지성은 퍼거슨의 4-4-2 시스템에서 공수 밸런스를 맞추는데에 가장 적합하며 퍼거슨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자주 기용했던 이유이다.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을 두고 영국의 대형 정론지 중 하나인 더 가디언에서는 박지성을 두고 당시 새로운 유형의 윙어인 수비형 윙어[13]의 창시자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관련 기사[14]
4. 단점
단점으로는 공격 전개 시 본인이 해결해야 할 상황에서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나름 공격적 재능이 살아있었던 J리그나 에레디비시에서 조차 2004-05 시즌을 제외하면 리그 공격포인트 10개를 넘기지 못했다. 박지성은 박스 안팎에서의 과감한 슈팅보다는 동료와의 짧은 패스 연계 플레이를 선호했고[15] 애초에 슈팅을 적극적으로 때리려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고 슈팅을 때리더라도 결정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또한 좌우로 벌리거나 동료와의 연계를 통한 짧은 패스는 많이 나왔으나 전방을 향한 창조적인 스루패스나[16] 크로스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17] 맨유에서는 월드클래스 수준의 공격진과 함께해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지만, 팀적인 움직임보다 개인적 해결 능력이 중요했던 QPR에선 이런 단점들이 부각되었다.[18]프로 선수 생활 내내 박지성을 괴롭혔던 잦았던 부상들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데,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에 이러한 부상이 자주 발생하여 스쿼드에 포함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19] 기본적인 주력은 무릎 부상 이전엔 상위권이었으나 무릎 부상 이후로는 평균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5. 총평
축구 지능, 수비 가담 및 활동량에서 강점을 보이고 돌파력과 크로스, 득점력에서 약점이 드러나는 박지성의 특징이 본인의 주 포지션인 윙어의 통상적인 역할과는 다른 느낌이고 이러한 유니크한 특성 때문인지 현역 시절 저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해 은퇴 후 포지션 플레이가 현대축구의 핵심이 돼버린 지금, 오히려 현재까지도 여러 매체나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선수다.6. 전술적 가치 및 입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교토 퍼플 상가 시절에서는 거의 붙박이 주전으로 출전했다. PSV 에인트호번 시절에는 초반에는 부상보다 힘들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기가 있었지만, 적응한 후에는 거의 풀타임 주전으로 출장했다.[20] 당시의 플레이 스타일은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움직임이 왕성하고 역동적이었다. 공격 시에는 빠른 스피드와 침투 능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볼이 오지 않아도 언제나 공간을 찾아 움직였고 수비 시에는 전방부터 압박을 전개하고 윙백과의 뛰어난 협력 플레이를 보여줬다.가장 명성을 떨치고 오래 몸담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는 로테이션 멤버로서[21] 공격과 수비에서 공헌하였으며, 중요 경기에서는 맨마킹 등의 전술적인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박지성이 현역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프리미어 리그를 넘어 유럽과 전세계를 호령하던 가장 수준 높은 구단[22]이었으며 매 시즌 타 구단보다 컵대회를 훨씬 많이 치르는 트레블 목표의 우승권 빅클럽이었기 때문에[23] 체력소모가 극심한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은 필수였기도 하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핵심 주전급 선수[24] 몇몇을 제외하고 특히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 시스템을 고집하곤 했다.[25][26] 박지성이 활약한 2005/06~2011/12 시즌 이 기간동안 매 시즌 맨유의 미드필더진 부동의 주전자리를 꿰찼던 선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마이클 캐릭정도였고 출전시간이나 출전경기 숫자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루이스 나니, 대런 플레처, 안데르송은 물론이고 안토니오 발렌시아[27]나 노쇠화된 라이언 긱스와 폴 스콜스도 이 시기엔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 멤버로서 활약했다.[28] 박지성의 경우엔 전술상 필요한 경기, 특히 수비를 두텁게 가져가야 하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29] 특이한 점은 통상적으로 리그 출장률이 낮거나 로테이션 멤버로 사용되면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나 컵 결승전 같은 큰 대회에서는 배제되기 마련인데, 박지성 같은 경우는 오히려 부상 여파와 더불어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지 리그 출장률이 낮지만 중요 경기에는 해가 지날수록 웬만하면 선발출장을 기록했다. 또한 출장률 자체는 높지 않지만, 출장하는 경우 대부분은 선발출전을 기록한 점이 특이한 부분이다.
여담으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2012-13 시즌 박지성이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로의 이적이 확정되고 팀을 떠날 때 그에게 편지 한통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에 2007년 심각한 무릎 수술[30]을 한 박지성의 무릎 부상을 늘 염두에 뒀기 때문에 박지성이 원하는 출전시간을 못 채워줘 미안하며 충성심있고 열심히 뛰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
맨유의 레전드인 폴 스콜스는 박지성의 맨마킹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스콜스는 "훈련장에서 최악의 선수가 누군지 아는가. 박지성이다. 정말 악몽이었다. 나를 마크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붙어 다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지성이 피를로를 상대한 일을 기억하는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하루 종일 체력을 유지했다"라고 언급했다.
당시 똑같은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안토니오 발렌시아는 박지성만큼의 태클과 마킹 능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박지성만큼의 수비가담과 활동량을 가졌고, 더욱 빠른 스피드/뛰어난 크로스 능력으로 공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두 명의 측면 미드필더 조합은 10-11 시즌 맨유가 강팀과의 대결에서 계속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며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한 바 있다. 퍼거슨은 보통 오른쪽에 발렌시아를 배치하고 그 뒤를 수비적인 풀백을 기용해서 발렌시아의 적당한 수비가담과 뛰어난 공격능력을 부각시켰고 왼쪽에는 공격능력이 뛰어난 풀백인 에브라를 배치시켜서 박지성의 공격력 부족을 메꾸고 에브라가 올라간 빈공간 커버를 박지성에게 시켰다. 강팀 상대로는 이게 황금 밸런스지만 약팀을 상대로는 체급 차이로 찍어누르기가 가능하기에 수비력에 덜 신경써도 되고 공격력을 끌어올려야되기 때문에 박지성보다 훨씬 공격적인 나니가 기용되었던 이유기도 하다. 현대축구에서 윙어는 단순히 측면공격 뿐 아닌 적의 측면 공격을 차단하는 역할도 겸하는데다 한 쪽 측면이 공격을 나가면 다른 한 쪽 측면은 포지션을 지키며 2선 라인을 조율하는 편이 안정적이다.[31] PSV 시절 04/05 챔피언스 리그에서 이러한 능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전 시즌 챔스 준우승팀이었던 모나코와의 16강 경기에서 에브라를 발랐고 리옹전에서도 이영표와 협력으로 좌측을 밀어버렸다.[32] 특히 4강인 AC 밀란전에서 혼자서 한쪽 측면을 휘젓다시피 하면서 1인 압박축구를 펼친 장면은 유명하다.
맨유 시절 박지성이 강팀과의 경기에 많이 나온 이유가 이것이다. 강팀들끼리 붙을 때는 약팀이랑 할 때와는 다르게 개인 능력으로 찍어누르는 플레이를 할 수 없고 더 강한 팀과 할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결국 전술적이고 팀플레이로서 평가되는 요인들이 경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돼있으므로, 맨유 공격루트에 많은 옵션을 제공하고 전술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박지성을 출전시키는 것이다. 박지성은 이런 팀의 의도에 잘 부응하며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성이 이런 역할을 통해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경기들은 대표적으로 2008년 UCL 4강 바르셀로나전, 2009년 UCL 4강 2차전 아스날전, 2010년 UCL 16강 AC밀란전[33], 2011년 UCL 8강 첼시전, 10-11 EPL 리그 후반기 첼시전 등이 있다. 역설적으로 부족한 공격력 때문에 상대적 약팀과의 대결에는 기용 1순위가 아니었다.[34]
하지만 이런 역할로 나왔음에도 부진한 경기도 있었다. PL 2011-12 시즌 후반기 맨시티전이 대표적인 사례. 퍼거슨 감독의 자서전을 보면 맨시티전에서 야야 투레를 봉쇄시키기 위해 박지성을 출장시켰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의 '사냥감을 쫓아다니는(marauding run)' 능력이 필요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박지성은 맨시티의 공격을 어떻게든 틀어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공격적인 기여를 전혀 하지 못했고 결국 코너킥 상황에서 콤파니에게 단 한 골을 허용하여 우승을 놓쳤다. 이 경기가 끝나고 해외 언론의 혹평이 쏟아지기도 했다.[35][36]
2010년 이후 축구 전술에서 각광받는 게겐프레싱, 두 줄 수비 등 윙어라도 수비가담을 안하면 욕먹는 전술들이 트렌드화 되고 또한 2010년대 중반 이후 3백 전술이 큰 유행을 하게 되면서 왕성한 활동량과 수비 공격에 다재다능한 윙백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가자 많은 축구 팬들은 박지성을 다시금 한번 떠올렸다. 현지에서도 박지성과 퍼거슨의 은퇴 후 여러 호사가, 전문가가 박지성 같은 좋은 수비 가담과 높은 전술적 이해도를 가진 선수가 지금의 맨유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근래 등장했다면 더욱 각광받았을 선수라 할수 있다.[37][38]
[1] 직후에 서술하듯 2002 월드컵 당시 주로 우측 윙 포워드 포지션을 소화했지만, 스페인을 상대로 한 8강전에서 중앙 미드필더 김남일이 부상으로 아웃된 후부터 3/4위 결정전까지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복귀했다.[2] 실제로 프리미어리그의 공식 웹 사이트를 살펴 봐도 박지성은 미드필더로 소개되고 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식 SNS를 통해 소개할 때도 늘 미드필더로 소개한다. 프리미어 리그 공식 홈페이지[3] 본인의 자서전에서 공격수는 골을 넣는 것이 목표라면 미드필더는 골을 넣기까지의 과정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본인은 후자의 목표를 가지고 게임에 임한다고 언급한다.[4] 물론 당연히 한국 대표팀의 중심이었고 최고의 선수였지만 어디까지나 맨유에서에 비해 조금 더 공격적인 역할을 가져갔던 것이지 혼자서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국의 공격수인 박주영, 안정환, 이천수, 설기현 등의 득점력도 살아있었고, 미드필더진엔 공수겸장의 김정우, 강력한 수비력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상식(축구), 김남일, 조원희가 있었다. 또 당시 한국 축구 최고의 라이징 스타였던 기성용, 구자철, 이청용도 있었기에, 어느정도 역할 분담이 되었다. 박지성 국가대표 말기엔 손흥민도 있었지만, 둘이 같이 나선 대회는 2011 아시안컵에서의 몇 경기가 전부다.[5] 대인방어(맨마킹), 태클, 리커버리, 인터셉트, 볼 경합 등. 다만 어디까지나 윙어, 미드필더로서 수비력이 좋다는 거지 전문 수비수에 비할 바는 아니다.[6] 관련기사 1, 관련기사 2, 관련기사 3, 관련기사 4[7] 감독들 입장에서는 포지션당 주전 1명과 백업 1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 이러한 유틸리티 자원이 있으면 굉장히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이 정점에 달했던 선수가 바로 선배 유상철이다.[8] PL 공식 사이트에서는 05/06 시즌의 세부스탯이 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05/06 시즌은 제외하고 계산했다.[9] 포지션 경쟁자였던 나니는 리커버리는 박지성보다 높지만 볼 경합과 태클, 인터셉트에서 완전히 밀린다. 물론 나니는 박지성과는 플레이스타일과 역할이 완전히 반대라고 볼 수 있는 선수다. 박지성이 수비와 전술적 밸런스 유지에 치중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니는 박지성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뛰어난 볼컨트롤 스킬을 활용해서 상대 수비진을 흔들고 직접 득점에도 가담하는 스타일이다.[10] 대표적인 예로 20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박지성이 안드레아 피를로를 대인방어 하면서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79회의 패스 시도가 25회로 줄었을 정도로 경기장에서 아예 지워져 버렸다.[11] #[12] 박지성의 활동량이 높긴 하지만 최정상급은 아님에도, 이러한 압박 능력과 후술할 오프 더 볼 능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스프린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경기장 안에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13] 동 시대에 수비형 윙어로서의 특징을 갖고있는 선수는 박지성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디르크 카윗을 들 수 있다. 다만 박지성과는 다르게 디르크 카윗은 본래 스트라이커였다가 윙어로 포지션을 옮긴 경우고 정통 오른쪽 윙 포워드라는 점에서 약간의 위치 차이는 있다. 이전과는 달리 윙포워드나 측면 미드필더, 심지어는 스트라이커에게도 수비 가담이 강제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은 현재도 영국 언론 매체들 사이에서는 자주 회자되곤 한다. 관련 기사[14] 디르크 카윗은 원래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이자, 네덜란드 리그 최고의 공격수라는 점에서 PL에 영입된 동기가 박지성과는 다소 다르다. 리버풀은 스코어러로서의 카윗을 기대했지만 카윗은 PL에서 네덜란드 리그에서 만큼의 득점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카윗은 강력한 체력과 헌신적이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리버풀의 주축이 된 선수다.[15] 물론 이런 플레이에는 당시 퍼거슨 감독의 패스 앤 무브라는 전술방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고, 박지성 자체가 한 경기에서 슈팅을 아예 때리지 않거나 평균적으로 1회 정도만 한다.[16] 실제로 박지성의 빅 찬스 생성이나 스루 볼 스탯은 좋은 편이 아니다.[17] 이는 박지성이 맡았던 포지션 자체가 이러한 창조적인 패스를 공급하는 위치에서 공을 잡을 일이 없었던 점에 더해 팀에 리그 정상급의 패스능력을 보유한 스콜스와 긱스가 있었기에 구태여 그러한 역할을 맡기지 않은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또한 퍼거슨은 플레이메이커를 활용하기보다 측면플레이 위주의 선수를 선호했으며 공격에서는 루니나 베르바토프, 사하, 반 니스텔루이, 반 페르시같은 결정력 높은 공격수들을 선호했다. 그렇기에 중미는 퍼거슨 체재에서 늘 약점으로 자리잡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티아고 알칸타라같은 선수를 영입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사실상 스콜스나 긱스 등을 중미로 포변하여 활용했다.[18] PSV 시절에는 주력도 나쁘지 않았고, 개인 기술도 어느정도 갖춘 박지성이었으나 박지성은 아무래도 팀원을 보조하고 받쳐주는데 특화된 유형인 선수라 혼자서 상대 수비진을 돌파해내거나, 전략적인 볼 호깅으로 상대의 압박을 유도해서 상대 중원을 비워놓을 만큼의 볼 키핑, 탈압박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높은 성공률의 중장거리 킥도,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가지지 못한 박지성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폼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위권 팀인 QPR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19] 박지성은 말년을 제외하고 4시즌을 부상+A매치 기간을 합산해서 연속적으로 10경기 이상 제외된 경기가 4시즌이나 된다. 06-07 시즌에는 개막전부터 잘 출전하다가 토트넘전에서 부상 당하여 3개월 연속 무릎 부상으로 이탈했고(5R~17R 연속 결장) 그 후 31라운드 블랙번전 이후 시즌 아웃을 당해서 부상으로 리그 경기 명단 제외만 20경기 정도된다. 그 후 07-08 19라운드 선더랜드전에 복귀하였고, 09-10시즌에도 독감->세네갈전 이후 부상으로 5경기 연속결장->회복 후 세르비아 A매치를 치렀고(리그 8경기 연속, 챔스 2경기 명단제외) 10-11 시즌에는 아시안컵 이후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후 96일만에 복귀하였다. (리그 10경기 연속, 챔스 2경기 명단제외)[20] 02-03 시즌 8경기 319분
03-04시즌 40경기 2,717분
04-05시즌 44경기 3,877분을 소화했다.[21] 맨유에서의 7시즌간 평균적으로 14~15위권의 출전 시간을 보장 받았으며 출전 시간이 2,000분을 넘긴 시즌은 2005/06, 2008/09, 2010/11 시즌으로 3개 시즌이다. 2008/09 시즌과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 및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활약 또한 두드러진데다 팀도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005/06 시즌은 본인이 가장 많이 출전했지만 팀은 칼링컵 우승과 프리미어 리그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2006/07, 2007/08 시즌은 발목 인대 파열(2006년 9월 10일 토트넘전 왼쪽 발목 부상으로 동월 14일 수술을 진행했고 동년 12월 18일에 복귀전을 치르면서 약 3개월 결장관련기사)및 심각한 무릎 부상(2006-07 시즌 3월 31일 시즌아웃 이후 동년 4월 28일 수술 사이 약 한 달 결장)과 그로 인한 수술(4월 28일 수술 이후 동년 12월 27일 선덜랜드 원정경기 복귀까지 약 8개월 결장관련기사)로 인해 도합 약 12개월 이상을 날려 많은 출전을 하지 못했으나 각각 출전시간 대비 높은 공격 포인트, 챔피언스 리그 맹활약 등의 성과가 있었다. 2009/10 시즌은 2009년 10월 14일 대한민국 대표팀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 풀타임 출전 이후 수술받은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부상(관련기사)으로 인해 초중반 10여 경기 연속 출전 기회를 놓치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AC 밀란을 맞아 안드레아 피를로를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다만, 2011/12 시즌은 애슐리 영과 나니, 안토니오 발렌시아에게 밀려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맨유에서 부상없이 3경기 이상 연속 결장한 것은 처음이었으며 이때 부상없이 5경기 연속 결장하게 된 것이 선수로서 힘든 일이었고 맨유에서의 생활이 끝났다는 신호였다고 밝히며 이적을 결심하게 된 결정타였다고 회고했다.관련기사, 박지성 주요 부상 기록 관련 기사[22] 출처[23] 박지성이 현역으로 활약한 2005-06 시즌~2011-12 시즌 총 7시즌 동안 3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갔고 1회 우승하였으며,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4회를 했고 2위를 3회 달성했다. 7시즌동안 단 한번도 2위 밑으로는 내려가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구단이었으며, 애초에 매 시즌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욕 먹는 팀이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24]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마이클 캐릭, 파트리스 에브라,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 에드윈 반 데 사르 등[25]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26] 박지성 또한 겉으로 이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아버지 박성종 씨에게는 '그 양반은 늘 그래요' 정도로 푸념을 하곤 했다고 한다[27] 2010/11 시즌 발목 골절 부상[28] 유럽을 호령하던 맨유 마지막 전성기라고 불렸던 2006-07~2010-11 시즌 맨유 주요 스쿼드 멤버로는 에드윈 반 데 사르, 파트리스 에브라, 네마냐 비디치, 리오 퍼디난드, 게리 네빌( 은퇴 후 하파엘 다 실바), 웨스 브라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적 후 안토니오 발렌시아), 라이언 긱스, 나니, 마이클 캐릭, 폴 스콜스, 대런 플레처, 안데르송, 존 오셔, 웨인 루니, 카를로스 테베즈( 이적 후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 치차리토), 여기에 박지성이며 평균 14~15위권의 출전시간이라는 것은 이 당시 맨유라는 팀에서 스쿼드 플레이어로 인정받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29]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가진 최대의 장점인 활동량, 태클, 인터셉트 등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 쯤이면 종종 해당 경기가 있을 그 전주(前週)의 경기에 결장시키곤 했다. 일례로 2010-11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 앞서 그 전주에 열린 리그 경기는 모두 출전 시키지 않았다.[30] 이 수술을 받은 선수는 장거리 비행시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인하여 곧바로 경기에 투입하는게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마이클 오언 역시 이 수술로 인하여 국대를 조기 은퇴하였다.[31] 특히 호날두가 엄청난 공격력을 보인 06~08 시즌까지 박지성이 중용되었는데, 호날두가 나간 밸런스를 맞춰줄 선수가 박지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내 신문에서는 경쟁자라고 불리던 호날두가 이적한 뒤 오히려 박지성의 출장이 줄어들게 된다.[32] 경기를 중계하던 크루이프가 엄청난 칭찬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33]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위치상 루니 바로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나 경기 내내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마크하며 글자 그대로 지워버렸다. 이 당시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패스 갯수는 78개 정도였으나 이 경기에서 피를로의 패스 수는 27개. 이것이 인상깊었는지 퍼거슨이 박지성을 언급하면 이 경기를 자주 언급할 정도이다.[34] 골이 필요한 상황에 박지성을 투입하는 경기는 거의 없었다.[35] 물론 이때 박지성은 연속으로 경기 명단에서 제외되다가 무려 8경기만에 출장해 경기 감각이 상당히 떨어진 상황에서 막아야 했다는 악조건을 감안해야 된다.[36] 더군다나 이 시기 야야 투레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던, 말그대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야야 투레는 피지컬까지 당대 최고인 선수라서 어떻게 막아야 되는지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오르던 그야말로 탱크같은 선수였는데, 사실상 커리어가 거의 끝나가는 박지성이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대였다.[37] 박지성의 은퇴 후 그의 후계자로써 비슷한 유형으로 지목됐던 선수로는 대니얼 제임스와 프레드(1993), 제시 린가드, 안데르 에레라 등이 있다.[38] 지목된 선수는 전반적으로 높은 활동량과 좋은 축구 지능과 뛰어난 수비 가담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단점을 보면 알겠지만 빌드업에서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03-04시즌 40경기 2,717분
04-05시즌 44경기 3,877분을 소화했다.[21] 맨유에서의 7시즌간 평균적으로 14~15위권의 출전 시간을 보장 받았으며 출전 시간이 2,000분을 넘긴 시즌은 2005/06, 2008/09, 2010/11 시즌으로 3개 시즌이다. 2008/09 시즌과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 및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활약 또한 두드러진데다 팀도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005/06 시즌은 본인이 가장 많이 출전했지만 팀은 칼링컵 우승과 프리미어 리그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2006/07, 2007/08 시즌은 발목 인대 파열(2006년 9월 10일 토트넘전 왼쪽 발목 부상으로 동월 14일 수술을 진행했고 동년 12월 18일에 복귀전을 치르면서 약 3개월 결장관련기사)및 심각한 무릎 부상(2006-07 시즌 3월 31일 시즌아웃 이후 동년 4월 28일 수술 사이 약 한 달 결장)과 그로 인한 수술(4월 28일 수술 이후 동년 12월 27일 선덜랜드 원정경기 복귀까지 약 8개월 결장관련기사)로 인해 도합 약 12개월 이상을 날려 많은 출전을 하지 못했으나 각각 출전시간 대비 높은 공격 포인트, 챔피언스 리그 맹활약 등의 성과가 있었다. 2009/10 시즌은 2009년 10월 14일 대한민국 대표팀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 풀타임 출전 이후 수술받은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부상(관련기사)으로 인해 초중반 10여 경기 연속 출전 기회를 놓치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AC 밀란을 맞아 안드레아 피를로를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다만, 2011/12 시즌은 애슐리 영과 나니, 안토니오 발렌시아에게 밀려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맨유에서 부상없이 3경기 이상 연속 결장한 것은 처음이었으며 이때 부상없이 5경기 연속 결장하게 된 것이 선수로서 힘든 일이었고 맨유에서의 생활이 끝났다는 신호였다고 밝히며 이적을 결심하게 된 결정타였다고 회고했다.관련기사, 박지성 주요 부상 기록 관련 기사[22] 출처[23] 박지성이 현역으로 활약한 2005-06 시즌~2011-12 시즌 총 7시즌 동안 3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갔고 1회 우승하였으며,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4회를 했고 2위를 3회 달성했다. 7시즌동안 단 한번도 2위 밑으로는 내려가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구단이었으며, 애초에 매 시즌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욕 먹는 팀이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24]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마이클 캐릭, 파트리스 에브라,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 에드윈 반 데 사르 등[25]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26] 박지성 또한 겉으로 이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아버지 박성종 씨에게는 '그 양반은 늘 그래요' 정도로 푸념을 하곤 했다고 한다[27] 2010/11 시즌 발목 골절 부상[28] 유럽을 호령하던 맨유 마지막 전성기라고 불렸던 2006-07~2010-11 시즌 맨유 주요 스쿼드 멤버로는 에드윈 반 데 사르, 파트리스 에브라, 네마냐 비디치, 리오 퍼디난드, 게리 네빌( 은퇴 후 하파엘 다 실바), 웨스 브라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적 후 안토니오 발렌시아), 라이언 긱스, 나니, 마이클 캐릭, 폴 스콜스, 대런 플레처, 안데르송, 존 오셔, 웨인 루니, 카를로스 테베즈( 이적 후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 치차리토), 여기에 박지성이며 평균 14~15위권의 출전시간이라는 것은 이 당시 맨유라는 팀에서 스쿼드 플레이어로 인정받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29]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가진 최대의 장점인 활동량, 태클, 인터셉트 등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 쯤이면 종종 해당 경기가 있을 그 전주(前週)의 경기에 결장시키곤 했다. 일례로 2010-11 첼시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 앞서 그 전주에 열린 리그 경기는 모두 출전 시키지 않았다.[30] 이 수술을 받은 선수는 장거리 비행시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인하여 곧바로 경기에 투입하는게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마이클 오언 역시 이 수술로 인하여 국대를 조기 은퇴하였다.[31] 특히 호날두가 엄청난 공격력을 보인 06~08 시즌까지 박지성이 중용되었는데, 호날두가 나간 밸런스를 맞춰줄 선수가 박지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내 신문에서는 경쟁자라고 불리던 호날두가 이적한 뒤 오히려 박지성의 출장이 줄어들게 된다.[32] 경기를 중계하던 크루이프가 엄청난 칭찬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33]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위치상 루니 바로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나 경기 내내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마크하며 글자 그대로 지워버렸다. 이 당시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패스 갯수는 78개 정도였으나 이 경기에서 피를로의 패스 수는 27개. 이것이 인상깊었는지 퍼거슨이 박지성을 언급하면 이 경기를 자주 언급할 정도이다.[34] 골이 필요한 상황에 박지성을 투입하는 경기는 거의 없었다.[35] 물론 이때 박지성은 연속으로 경기 명단에서 제외되다가 무려 8경기만에 출장해 경기 감각이 상당히 떨어진 상황에서 막아야 했다는 악조건을 감안해야 된다.[36] 더군다나 이 시기 야야 투레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던, 말그대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야야 투레는 피지컬까지 당대 최고인 선수라서 어떻게 막아야 되는지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오르던 그야말로 탱크같은 선수였는데, 사실상 커리어가 거의 끝나가는 박지성이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대였다.[37] 박지성의 은퇴 후 그의 후계자로써 비슷한 유형으로 지목됐던 선수로는 대니얼 제임스와 프레드(1993), 제시 린가드, 안데르 에레라 등이 있다.[38] 지목된 선수는 전반적으로 높은 활동량과 좋은 축구 지능과 뛰어난 수비 가담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단점을 보면 알겠지만 빌드업에서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