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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21:07:16

박칼린

<colbgcolor=#76a8bc><colcolor=#fff> 박칼린
Kolleen Park
파일:박칼린.jpg
본명 Kolleen Sue Park (칼린 수 팍)[1]
한국명 박영미[2]
출생 1967년 5월 1일 ([age(1967-05-01)]세)

[[미국|]][[틀:국기|]][[틀:국기|]]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가족 부모님, 언니
학력 초량초등학교 (편입)[3]
경남여자고등학교 (편입)[4]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첼로 전공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악작곡 / 석사)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성장 배경3. 활동
3.1. 뮤지컬3.2. 연극3.3. 방송3.4. 드라마3.5. 영화3.6. 앨범3.7. 도서
4. 경력5. 수상 6. 인터뷰7. 인적 네트워크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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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혼혈 미국인 뮤지컬 음악감독, 공연 연출가, 뮤지컬 배우.

2. 성장 배경

칼린의 친할아버지전라도 출신이고[5], 아버지 박근실은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6.25 전쟁 때문에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된 1950년대미국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유복한 집안의 엘리트 학생이었다.[6] 대학 재학 중, 5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리투아니아계 이민자 가정의 칼린의 어머니 아이린을 만났다. 무릎팍도사 출연 당시 칼린의 말로는 아버지가 동양인인데도 키가 190cm가 가까울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어서[7]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으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노래한 아리랑을 계기로 인연이 생겼다고 하였다. 조국이 전쟁을 겪었고 둘 다 해외로 이주한 이방인이라는 공통점 역시 통했다고 한다.

그렇게 둘이 만나 낳은 세 자매 중 막내 칼린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8] 3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온 가족이 이사왔고 10살까지 부산에서 살았으며, 다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으로 이주하여 LA 헐리웃 지역에서 성장했다. 중간에 고등학교 때 1년 동안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를 다녔으며[9] 다시 미국으로 가서 고등학교와 캘리포니아 예술대학(클래식 첼로 전공)을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와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음악과에서 국악 작곡[10]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영어한국어 모두 능통하게 구사하지만 가끔은 한국어 발음이 약간 불명확하며 한국 말투에 서양식 말투가 약간 섞여 있는 듯한 느낌도 난다. 대표적인 것이 'Umm...'이나 'OK'의 잦은 사용이다.

일찌감치 부산 지역에서 자라서 부산식 동남 방언과 그 지역의 문화[11]를 잘 알고 있다. 원래는 부산 사투리를 사용했으나 한국에서 연기를 하다 보니까 표준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판소리의 명창인 박동진의 제자였는데 실제로 박동진이 그녀를 자신의 판소리 직계 전수자로 삼고자 했으나 칼린이 외국 국적자였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으며 이 일로 박칼린은 매우 서운해 하였다. 하지만 박칼린은 "네가 외국인인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박동진의 말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 무릎팍도사에서 만약 그 일이 성사되었다면 자신은 판소리의 길로 아주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박동진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따 저 양년 참 한국말 잘하네잉"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국악을 전공 중이던 그녀는 하와이에서 열린 국악 공연에 국악계 인사들의 통역 자격으로 따라갔었는데, 그녀가 국악을 전공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던 박동진 이 불현듯 "자네는 소리를 해야 쓰것네."라며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즉 박칼린은 클래식국악을 모두 전공했으며 미국한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방송, 저서, 인터뷰에서 미국 LA, 리투아니아, 부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세 곳을 다 한번씩 돌아가면서 고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모두 경험하며 자란 TCK이다.

3. 활동

1989년 13회 MBC 대학가요제에 미주 대표로 참가한 경력이 있다. 자작곡인 '사막의 비'로 본선까지 진출했으나, 입상에는 실패했다.[12]

연극배우로 잠시 활동한 경력이 있어 연기가 되는 편이며 실제로 오래 전, 한국 드라마에서 약간의 개그 캐릭터로 나온 적이 있다. 현재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활동 분야는 역시 뮤지컬 음악감독(musical supervisor)[13]. '대한민국 1호 창작뮤지컬'로도 유명한 명성황후의 음악감독을 맡은 것이 시작이었다. 즉, 한국 뮤지컬 음악감독들 중에서도 1세대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작사/작곡가였던 양인자/김희갑[14]과의 인연이 화제가 되기도. 특히 김희갑은 그녀에게 노발대발하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박칼린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절대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5]

주로 신시컴퍼니에서 렌트, 시카고[16]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작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특히 렌트의 경우 한국 초연부터 2011년 공연까지 모든 공연의 음악감독직을 맡았으며, 2011년 공연에서는 연출을 맡았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맡게 되면서였다. 2010년 최고의 화제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방송 이후 곳곳에서 '훌륭한 리더십'의 사례로 꼽혔고 여타 방송이나 광고 출연도 늘어난 듯. 이후 남자의 자격 합창단 시즌 2를 이끄는 자리는 고사했다.[17]

2011년 11월부터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배우로 출연했다. 뚜껑 열리기 전에는 캐스팅 소식을 듣고 경악한 뮤덕들이 꽤 되었으나 뚜껑 열린 후 취향 맞는 사람들은 달렸다. 작품도 수작인 편이었으며 참고로 극중 아들 역 더블캐스팅 중 하나가 바로 아래 항목에도 나오는 최재림.

2011년과 2012년에 방송되었던 코리아 갓 탤런트 심사위원을 역임했는데, 심사평이 굉장히 냉정하고 까다로웠던 탓에 웬만한 실력의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불합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고지전 마지막 부분에서 병사들의 합창 부분을 지도하기도 했다. 크레딧을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사실.

2014 인천 장애인 아시안 게임 개/폐막식 연출 감독과, 미스터 쇼의 연출을 맡았다.

2016년 1월 29일에는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인터뷰하였다. 인터뷰 영상

2018년 5월 22일 개막한 뮤지컬 <시카고>에서 벨마 켈리 역을 맡아 연기했다. 항상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오디션 제의를 받았을 때 본인도 의아했다고 한다.

3.1. 뮤지컬

3.2. 연극

3.3. 방송

3.4. 드라마

3.5. 영화

3.6. 앨범

3.7. 도서

4. 경력

5. 수상

6. 인터뷰

7. 인적 네트워크

8. 기타



[1] Kolleen은 아일랜드의 소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어로 소녀를 뜻하는 'Cailín'에서 따온 모양. 영어식으로 읽으면 '콜린'과 '칼린'의 중간쯤 되는 발음에 가깝다. 실제론 Colleen이 보편적인 스펠링이지만 칼린의 언니들의 이름이 모두 K로 시작하기 때문에 C를 K로 고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2] 1989년 MBC 대학가요제 출전 당시에 이 이름으로 출전했다. 다만 법적인 이름은 아니다.[3] 11살 때 미국으로 이사했다.[4] 1년간 재학한 후 미국으로 귀국했다.[5] TV조선 백반기행에 출연해서 언급함[6] 당시 해외 유학생이 총 20명 정도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해외 유학생들에게 직접 써서 보냈다고 한다.[7] 지금도 무지하게 큰 축에 드는 키인데, 당시에는 미국인들도 평균 키가 173cm 정도였으며 한국인 평균은 165cm 이하였다.[8] 이유는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교사로서 언어 교육에 경력이 있는 어머니가 자식들이 한국어영어를 모두 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부산에 김해공항도 없을 시절 해운대구 수영 비행장에 한국어도 전혀 모르는 어머니가 먼저 시어머니를 뵈러 남편도 없이 혼자 세 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9] 방학 때 한국을 방문한 후 언니들은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칼린은 혼자 남아서 한국 고등학교를 다녀보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11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사갔을 때도 문화충격에 시달렸지만, 당시 부산 경남여고를 다닐 때 역시 미국학교와 너무 달라서 다시금 문화충격 때문에 놀랐다고 한다. 당시 영어 선생님은 칼린 때문에 영어 수업을 들어오는 것을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10] 10살 이후로는 학창시절 대부분 미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언어문화는 미국 쪽이 더 편하지만, 자신이 음악을 할 때만큼은 한국정서가 자꾸 흘러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도 한국인인데 이런 식으로 대충 알아서는 안되고 전문적으로 한국 음악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11] 요새 젊은 부산 사람들은 모르는 옛날식 부산 사투리와 옛날 부산에서 먹던 음식들이었다.[12] 여담으로 이 때 당시 대상 수상자가 훗날 '너를 사랑하고도'라는 곡으로 인기를 끈 전유나. 훗날 전유나가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 박칼린이 자신과 같은 해에 대학가요제에 나온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로 두 사람 다 부산 출신이다.[13] 뮤지컬에서 모든 음악 분야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연출자, 제작사와 함께 배우 캐스팅 권한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직책. 연주자와 앙상블 캐스팅 권한은 전적으로 음악감독에게 있다. 공연 전에는 배우와 연주자들에게 곡을 가르치며, 실제 공연 때에는 대개 지휘를 맡는다.[14] 작사가 & 작곡가 부부로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분들이다. 수많은 명곡들을 작업했으며, 그 명곡들 중 하나가 바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15] 이 당시 김희갑은 이미 최고의 작곡가였으며 박칼린은 겨우 20대 후반이었다.[16] 2014년에 했던 시즌까지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이후에는 오민영 음악감독이 시카고의 음악감독과 지휘를 맡았다. 2018 시카고 프레스콜에서는 2013년까지 시카고의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했지만 2014년 시카고의 소개글에 '박칼린이 이끄는 14인조 빅밴드' 라고 써있는 것을 보아 사회자가 잘못 말한 듯 하다.[17] 훗날 라디오스타에서 본인은 시즌1까지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18] 1990년대 리투아니아가 공식적으로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후에야 비로소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