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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0:28

방통/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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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유표 휘하4. 손권 휘하5. 유비에게 임관6. 유비의 입촉7. 너무 이른 죽음

1. 개요

방통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

2. 초기 생애

아버지의 이름은 알려진 바가 없고 맏이일 가능성이 크다. 자에 원(元)이 들어가는 점, 형이 언급되지 않고 형제는 동생뿐이라는 점 등이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양양기》에 따르면 제갈공명(제갈량)은 와룡, 방사원(방통)은 봉추, 사마덕조(사마휘)는 수경이라 했는데 이는 모두 방덕공이 말한 것이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데, 어려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18세 때, 사마덕조에게 가 뵙게 했다.

<방통전>에 따르면 어릴 때 박둔(樸鈍)[1]하여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영천 사람인 사마휘는 청아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방통이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는데,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며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있게 한 채 낮부터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세설신어》(上권 언어편)에 따르면 남군 방사원이 사마덕조가 영천에 있다는 말을 듣고, 2천 리나 찾아가 기다리다 뽕을 따고 있는 사마덕조를 만나게 되었다. 방사원은 수레 속에서 말했다.
나는 대장부가 세상에 살며 마땅히 고관이 돼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혼란한 세상을 되돌릴 역량이 있으면서 길쌈하는 지어미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마덕조가 말했다.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께서는 참 샛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서 헤매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화려한 집에서 살고 살찐 말만 타고 다니며, 시녀가 수십 명인 다음에만 기이하다 하겠습니까.

방사원이 말했다.
내가 변방에서 나서 자라 대의를 본 일이 적은데, 만약 한번 큰 종을 두들겨 보지 않고 우레 같은 북을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울리는 소리를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양양기》에 따르면 덕조가 같이 얘기를 나눠 보고는 잠시 후 감탄하며 말했다.
덕공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 아이는 참으로 크고 훌륭한 덕을 가졌다.

사마휘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방통이 응당 남주(南州) 선비의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상랑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상랑은 젊어서 사마덕조(사마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서원직(서서), 한덕고(한숭), 방사원(방통) 등과 친하게 지냈다.

3. 유표 휘하

그 뒤 (郡)에서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았다. 당시 조조형주를 평정한 뒤 남군의 북쪽을 갈라 양양군을 새로 설치했으므로 방통을 양양 사람이라 했는데 앞에서 방통이 공조로 복무했다는 ‘군’은 시기로 볼 때 실제로는 ‘남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조란 하급 관원들의 임용을 관장하고 근무실적을 평가하는 인사 담당자다. 그 성정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人倫)을 좋아하고 길러서 양성하는데 부지런했다. 방통은 매번 사람들의 장점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했고, 반면 단점을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칭찬을 남발해 댔던지 당시 사람들이 대체 왜 그러느냐고 괴이쩍게 여겨 물을 정도였다.
방통이 대답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바른 도가 쇠퇴하니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풍속을 일으키고 도업(道業)을 기르려 하는데, 그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 열을 뽑아 다섯을 잃는다 해도 오히려 그 절반을 얻는 것이고,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즉, 지금은 천하가 난세이기 때문에 일단 장점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다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 설령 절반이 쭉정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은 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표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부손은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방통을 보고 절반쯤 영웅이라고 생각했으며, 배잠이 끝내 청렴한 행실로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증명했다.

<제갈량전>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유비가 사마덕조(사마휘)에게 세상일에 관해 물었다. 덕조가 말했다.
저 같은 유생 속사가 어찌 시무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 중에 있으며 이런 준걸에는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덕조가 말했다.
제갈공명과 방사원입니다.

4. 손권 휘하

의 장수 주유유비를 도와 형주를 차지하고 이로 인해 남군태수를 겸했다. 본래 남군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방통은 그대로 남군태수 주유의 휘하에서 일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은 상여를 운구해 오에 이르르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시대상에서 장례가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를 감안하면 방통의 지위나 명망이 상당했다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오인(吳人)들이 그의 명성을 많이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창문(昌門)에서 모였는데, 육적, 고소, 전종이 모두 참석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자(육적)는 굼뜬 말이라 이를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을 지녔고, 고자(고소)는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오록》에 따르면 어떤 이가 방통에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육자(육적)가 가장 낫다는 것입니까?

방통이 말했다.
굼뜬 말이 비록 빼어나지만 한 사람을 감당할 뿐입니다. 굼뜬 소는 하루에 3백리를 가니 어찌 한 사람을 중함에 비하겠습니까!

고소가 방통의 숙소로 찾아와 대화하다가 물었다.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

방통이 말했다.
세속을 도야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에는 제가 경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는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전종에게 말했다.
경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니 여남번자소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력이 많지는 않으나 또한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입니다.

육적, 고소가 방통에게 말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응당 경과 더불어 천하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동오로 간 방통은 전종, 육적, 고소 등 동오의 유력 호족들과 안면을 트고 친교를 맺은 후 돌아온다.

<육적전>에 따르면 우번은 옛날부터 명성이 있었고, 방통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로, 나이는 차이가 많았지만 모두 육적과 우의를 나누었다.

5. 유비에게 임관

유비형주를 다스리게 되고 남군이 유비의 소유가 되자 방통은 졸지에 다시 유비의 부하가 되었다. 주군이 유표에서 손권을 거쳐 유비가 된 것인데, 방통의 벼슬살이도 꽤나 파란만장했던 셈.

유비는 방통을 종사[2]로 삼고 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을 맡게 했는데,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이게 연의 상의 묘사처럼 유비가 방통을 무시해서 촌구석에 처박았고 그에 반발한 방통이 그냥 놀고 먹었던 건 아니다. 공조가 현령이 되었으면 승진한 셈이니까. 물론 뇌양현이 워낙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기에 방통이 연의에서처럼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 유비는 방통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었다. 방통은 형주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손오까지도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사람이었지만 유비는 허정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헛된 명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통이 현령 자리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방통의 명성이 헛된 명성이었다고 여기고 그냥 잘라버린 듯하다.

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서신을 보냈다.
방사원은 사방 백 리를 다스릴 재주가 아닙니다(非百里之才).[3] 치중·별가 등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치중(治中)은 간단히 설명해서 주목(州牧)의 보좌관 중 2위다. 그리고 별가(別駕)는 1위. 즉 형주목 유비의 부하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 가는 자리를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제갈량도 나서서 또한 방통을 이를 말하며 추천했다. 유비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 보고 크게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삼았다.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방통과 함께 풍족히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에게 물었다.
경이 주공근(주유)의 공조였을 때 내가 오에 갔었소. 듣기로 이 사람이 은밀히 중모(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소?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 경은 숨김없이 말해 보시오.

방통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이 있어 이 때문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나는 중모(仲謀)가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때문에 오로 갈 것을 결심하고 의심하지 않았소. 실로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만전의 계책은 아니었소.

친밀히 대우함이 제갈량에 버금갔고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삼았다. 즉 모든 면에서 제갈량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는 뜻이다.

6. 유비의 입촉

《구주춘추》에 따르면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가 있어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하면 나는 너그럽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하고 조조가 속이면 나는 충직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키어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4]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를 진수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종해 촉으로 들어갔다.

<요립전>에 따르면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고 제갈량이 형주 지역을 지키고 있을 때, 손권이 사자를 보내 제갈량에게 우호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선비들 중에서 누가 국가를 다스리는 일을 도울 수 있는지 질문했다. 제갈량이 대답하여 말했다.
방통과 요립은 초나라의 우수한 인재로, 후세에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익주 유장이 유비와 광한군 부현에서 만났다. 방통이 계책을 올렸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방통은 평생 행정 업무만 맡아보았지만 유비를 수행하면서부터 이른바 모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방통은 본격적으로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같이 몹시 급진적이었다. 방통의 화끈하고도 직선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뒤 유비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하려 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팽양과는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으며, 또 마침 빈객이 있었는데, 팽양은 줄곧 방통의 침대 위에 누워 방통에게 말했다.
손님이 오면 응당 그대와 충분히 담소로 나눠야 합니다.

방통은 빈객이 떠난 후에 팽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팽양은 먼저 방통에게 식사를 요구한 연후에 함께 얘기를 했다. 이렇게 남의 집에서 묵으며 며칠이 지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 또한 팽양을 기재가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팽양으로 하여금 군사 명령을 전달하여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여러 번 명령했다.

방통이 다시 설득했다.

유비는 중계(中計)를 옳게 여겨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고 지나는 곳마다 번번이 이겼다. 방통이 상계(上計)로 꼽은 건 정예병을 뽑아 즉시 성도로 진격하여 유장을 습격하자는 것이었다. 최단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적의 우두머리를 치자는 것이니, 예전에 그 자신이 제안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과격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이번에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채택한 건 방통의 중계(中計)였다. 즉 먼저 양회와 고패를 제거하고 이후 주위를 평정하면서 성도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유비는 본래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우선시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고, 영토 내의 호족과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민족들에게조차 널리 은혜를 베풀면서 호의를 얻었다. 그렇게 유비라는 이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천하에 각인되었다. 서주에서는 미축을 비롯한 호족들이 앞장서서 그를 주목으로 추대하였으며, 형주에서는 무려 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조를 피해 그를 따라갔고, 익주의 유력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끌어들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유비는 처음부터 급박하게 유장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그보다는 시간을 들여가며 천천히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을것이다. 그래서 장로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북진했으면서도, 막상 장로를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은덕을 베풀면서 익주 사람들을 천천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다소 과장되게 말하자면 익주가 스스로 자신에게 바쳐지기를 원것. 그건 비록 느리지만 그만큼 뒤탈이 없고 안정적인 방식이었다.

반면 방통의 방향성은 주군인 유비와 정반대였다. 그는 일단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확실한 성과를 내면 그 후에 뒤따라오는 부작용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과거에 인재들을 지나칠 정도로 칭찬한 것도 찬밥 더운밥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인재를 발탁하여 일단 머릿수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그렇게 인재를 모은 후에야 비로소 옥석을 가려도 늦지 않는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유비가 보기에 방통처럼 과격한 방식은, 당장은 효율적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방통의 계책을 물리친 것이다.

부현에서 큰 모임을 열어 술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케 했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이 말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가 술에 취해 있었는데 노하여 말했다.
무왕이 주(紂)를 치며 그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췄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경의 말이 맞지 않소. 속히 일어나 나가시오!

이에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는 곧 후회하고는 되돌아오도록 청했다. 방통이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왔으나 돌아보고 사죄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유비가 말했다.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유비가 크게 웃으며 당초처럼 술자리를 즐겼다.

이에 습착치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 [5]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방통은 이 말이 누설될까 두렵고 그 주인이 필히 깨우칠 것임을 알아 이 때문에 뭇 사람들 속에서 그 실수를 바로잡으니, 늘 겸손함의 도를 갖추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기탄없이 간언함의 기풍을 다하였다. 무릇 위에서 잘못했을 때 능히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이는 신하가 있는 것이고, 나은 것을 받아들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신하가 있으면 섬돌이 융성하고 당이 높아지고 이치에 따르면 여러 모책들이 모두 거행된다. 한마디 말로 세 가지 선(善)이 겸하여 밝혀지고 잠시 간언하여 백대에 걸쳐 의를 밝히니 가히 큰 줄거리에 통달했다 이를 만하다. 작은 손실을 아까워하여 큰 이로움을 폐하고 지나친 말을 조심하여 스스로 직언을 끊고 멀리하면서 능히 대업을 이루고 일을 성공시킨 자는 일찍이 없었다.
습착치의 주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군신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말한 것은 아마도 (유비에게 향할) 비방의 말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습착치의 견해는 미루어 넓힌 말로 문장이 막힘없이 유창한 말을 한 것에 가깝다.
배송지가 덧붙인 주

7. 너무 이른 죽음

진격하여 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으니[6] 그때 나이 35세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하게 여겨 하니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 방통의 부친을 의랑으로 삼고 간의대부로 승진시켰으며 제갈량이 친히 임명했다. 낙성 전투는 213년에서 214년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방통이 죽은 해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자치통감》에 따르면 214년에 죽었다고 한다.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장존은 평소 방통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방통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유비가 방통을 찬미하는 말을 하자, 장존은 이렇게 말했다.
방통은 비록 충성을 다하여 아까운 인물이지만, 위대하고 아정한 도의를 어겼습니다.

유비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방통은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사람이오. 다시는 그를 비난하지 마시오.

그리고 장존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오래지 않아, 장존은 질병으로 죽었다.[7]

방통은 항상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대범하게 들이밀었다. 그게 주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기에 유비에게 있어 방통은 더욱 더 소중한 존재였다. 게다가 신중한 제갈량과 급진적인 방통은 서로를 보조해줄 수 있는 좋은 조합이기도 했다. 제갈량 역시도 자신과 함께 유비를 모시며 대업을 이룰 만한 인물을 잃고 말았다. 이는 비단 방통 한 사람만의 죽음이 아니라 유비 세력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8]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군사(방통)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아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발했다. 이 인의를 종주로 하여 몸을 죽이고 은혜에 보답했다.

<방통전>에 따르면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 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방통의 시호는 정후(靖侯)라고 했다.

동생 방림은 방통 사후에도 유비 밑에서 일했다. 이릉대전황권과 같이 위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다가, 유비가 패하고 퇴로가 끊기자 위에 항복했다.



[1] 국내에 퍼진 번역본에서는 '투박하고 둔하여'로 번역되었다. 박둔이란 칼이나 검의 무딤을 표현하는 말로, 방통이 천성부터 날카롭고 번뜩이는 영민함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2] 주자사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주로 문서담당.[3] 이 일화에서 백리지재(百里之才)라는 사자성어가 유래되었다.[4] 즉 서천을 취하는게 전체를 봤을 때 더 인의를 위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셈이기도 하다.[5] 여기서 말하는 패왕은 문장으로 보아 순자가 말하는 패도(覇道)의 군주를 말하는것 같다. 이는 '덕이 온전치 못하고 의가 완전치 못하나 대체로 천하의 도리가 모여있음. 형벌과 포상이 매우 분명하여 천하와 뭇 신하들의 신임을 삼. 한번 선포한 정령을 바꾸지 않으니 백성을 속이는 일이 없음. 한번 협약을 맺는다면 동맹국을 속임이 없음. 옛날의 패자들은 이같이 하였으므로 변방의 나라이면서도 천하를 호령했고, 강대하여 중원을 위태로이 하였음. 이른바 '신信이 우뚝 서면 패자가 됨'은 이를 가리킨다.[6] 방통의 생사여부와 상관없이 낙성 전투는 무난하게 유비의 승리로 끝났다. 다 이긴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7] 장존은 기록이 짧지만 능력은 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런 사람을 인재를 아끼는 유비가 파면시킬 만큼 방통의 죽음을 애석하게 본 모양이다. 그것 이외에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전사한 핵심 인재를 잃은 것을 애도하는 상황에서 고인을 폄하하는 발언을 그냥 용인하면 군의 전체 사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기강을 잡는 의도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8] 당장 윗 문단의 말을 보듯, 방통은 언행을 행함에 있어 거침이 없었고 주군일지라도 당당히 간언하였다. 유비는 그것을 노여워하지 않고 당장의 화가 일었을지라도 금방 깨우치고 본뜻을 헤아림으로써 되려 유비와 방통의 사이는 더더욱 긴밀해졌다. 이처럼 이 둘의 사이는 물과 물고기가 만난 것과 같았으니 방통의 죽음은 유비 입장에서는 더욱 애석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매사에 신중하고 꼼꼼했으며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으나 그것이 되려 느리고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방통은 전략을 짬에 있어 급진적이고 기만적이었으며 빠르고 서둘렀다. 둘의 성향이 이처럼 정반대였지만 둘 모두 사람됨이 올바르므로 그렇기에 이 두 전략가가 서로 의논하여 일을 처리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방통이 익주 정벌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익주에 방통, 형주에 제갈량이 남아(혹은 그 반대로) 손오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조를 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이는 유비 세력은 한중 정벌 때 최고점을 찍었으며 형주의 관우는 부족한 인재풀에도 번성을 공략하고 허도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조조가 겁먹고 천도를 고민하게 만들고 조위의 모든 장수들이 번성에 집중되도록 만든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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