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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23:30:06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말5.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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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대포는 아무런 추가 장비가 없는 그냥 맨 대포이다. 당시 콩코드 광장에 장식되어 있던 대포를 화약이나 탄약 따위는 없이, 그냥 끌고 갔다가 다시 끌고 오게 된다. 이 대포들은 혁명시기 수차례 이동되는데, 민중들은 화약과 탄을 같이 가져간 적이 없다.)

1. 개요

프랑스 혁명 때 일어난 사건.

1789년 10월, 혁명 당시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대공포의 영향으로 파리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졌다. 이런 가운데 파리에는 "왕비(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어죽는 백성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했다!!"와 같은 갖가지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결국 10월 5일, 파리의 하층계급 부녀자들 7,000여명이 앞장을 서고 남편들이 뒤를 따른 가운데, 이들은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여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하며 궁 근처에서 야영했다. 처음에는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루이 16세의 약속을 받고 물러나는 듯했으나, "왕비가 왕을 설득해서 다시 베르사유에 주저앉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부녀자들은 밤새 궁을 포위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경비가 뜸한 문을 발견해 그 길로 침투, 왕비를 찾기 위해 궁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근위병 몇 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치안 유지를 위해 출동해있던 라파예트 후작은,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발코니에 루이 16세를 내보내서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도록 했다. 이런 쇼맨쉽에 감동한 군중은 "국왕 만세"를 외쳤으나, 완전히 평정을 찾지는 않았는지 "국왕 부처와 왕실 가족을 파리까지 호위하겠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10월 6일 오후, 군중에 에워싸인 채로 루이 16세 가족은 파리 튈르리 궁에 도착하게 된다.

2. 배경

이렇게 부녀자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극도로 증오하게 된 배경에는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는 왕의 외도에 관대했는데, 국왕이 여자를 밝히는 건 남자다움의 덕목을 갖춘 행위이며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국왕의 혼외정사에는 긍정적이었던 반면, 왕의 정부는 '요망한 창부'로 취급당했고 전 국민욕받이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왕의 정부를 욕하는 것은 일종의 '국민 스포츠'였을 정도였으며, 왕의 정부뿐만 아니라 왕비도 신성불가침의 대상은 아니었기에 이런 비난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왕의 잘못은 (너무 크고 책임이 명료한 것 외에는) 모두 주변인의 탓으로 돌리고, 왕은 신성불가침으로서 찬양하는 경향이 있었다.[1]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문의 발달로 인해 한층 욕 수위가 업그레이드 되고 추잡스러운 삽화까지 더해지며 이런 음담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위기간의 평생을 프랑스 백성으로부터 이전의 왕비와는 비교도 안되는 모진 경멸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의 무능과 선왕의 사치로 빚어낸 국가 경제 파탄과 부정부패의 방종 등으로 인해 프랑스가 막장이 되어버린 걸 두고 백성이 "이게 다 미개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가 우리 현명하신 임금님을 망쳐놔서 그렇다"라고 비난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다.[2] 게다기 당대 신문의 발흥기까지 겹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갖 성적인 루머에 시달렸으며, "호화로운 궁전에서 백성의 혈세로 수십 명과 줄지어 난교파티나 열고 있는 문란하고 멍청한 오스트리아 창녀"라고 만화 삽화까지 그려져 음해를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역대 프랑스 국왕들과 달리 루이 16세는 외도를 하지 않아 정부도 들이지 않았는데, 백성은 이것마저 "왕비가 왕에게 바가지를 긁는 탓"이라며 "왜 우리 임금님 기를 죽이고 그러냐!?"라고 비난했다. 또한 보통 사교계의 파티는 왕의 총희(로얄 미스트리스)가 주최했는데, 루이 16세에게는 왕비 외의 다른 여자가 없었으므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러한 파티를 주최해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프랑스 왕비들 중에서 가장 검소했지만 그녀가 항상 파티 주최를 맡다 보니, 백성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왕비에게는 주최적으로 혈세를 낭비하는 재주가 있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당시 사교계가 호화로웠던 것은 맞지만, 사교계는 놀고 먹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나라의 정사가 논의되는 곳이었다. 더구나 왕가에서 주최하는 파티는 품위를 고려해 귀족들이 심심할 때 여는 파티보다 화려하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하루 먹고사는 것도 힘들었던 당시 백성의 눈에는 그저 "왕가에서는 굶어죽는 백성들을 무시하고 잔치나 열고 있다!!"고 보였다. 또한 잡다한 프랑스의전을 귀찮아하고 간신을 멀리하려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귀족들과도 불화가 많은 편이었다.

3. 진행

백성은 이런 음해에 선동되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실드쳐줄 귀족의 숫자가 적어지자[3] 1789년 10월 5일에는 성난 여성들이 대포까지 끌고 베르사유 궁궐로 쳐들어가서 왕비의 이름을 부르며 죽이자고 외쳐댔다.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진을 치고 공성전을 방불케하는 기세로 왕가에 요구했다. 라파예트 후작이 궁궐 경비병과 별개로 왕족을 보호하려고 치안 유지 병력을 투입했는데, 날이 저물며 이 병력은 부녀자들과 결국 부대끼며 술도 마시고 동화되어 갔다. 만에 하나 유혈 사태가 터지더라도 이들을 향해 발포할 마음이 사라졌다.

그들은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꾸려서, 루이 16세와 만나서 왕의 개인 아파트에서 담판을 했다. 그들은 왕비를 증오할수록 왕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에 사로잡혔고, 막상 루이 16세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되자 프랑스 국왕의 위엄에 압도되어 1명은 기절해서 쓰러졌다. 루이 16세가 "왕가의 부엌 창고에서 음식을 배고픈 민중에게 나눠주라"고 명령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대표단이 돌아오고, 루이 16세가 "파리로 돌아가겠다고 한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고, 음식도 배급되자, 군중은 만세를 외치고 사태는 잠잠해지는 듯했다. 경비병들도 날이 저물어 가고 이 새로운 소식에 안도하고 경비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난 군중은 해산하고 파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자 그들 사이에서 "멍청한 대표단 년들은 말뿐인 약속을 쉽사리 믿고, 한 건 했다고 자축하고 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에 곧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요망한 오스트리아 년이 우리 착한 임금님을 꼬셔서 약속을 어기도록 설득할 거다"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나돌아 부녀자들은 오히려 "왕비를 잡아 죽여야 끝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10월 6일 새벽, 정원 옆문에 경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시위대를 필두로 사람들은 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궁전에 도달한 시위대는 문을 보이는대로 때려부수어 왕비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경비병들은 새벽의 급습에 당황하며 방들의 문을 보이는대로 가구로 틀어막는 난리가 났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오는 여인들에게 겁을 잔뜩 먹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시녀들과 함께 (매우 수치스럽게도)[4] 맨발로 도망쳐 뛰어나가 루이 16세의 침실로 갔다. 왕비는 왕의 침실 문 앞에서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시위대가 내는 큰소리 때문에 주변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루이 16세는 한참 동안 왕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시위대가 왕비를 잡아가기 직전에야 겨우 루이 16세가 문을 열어주어서 왕비는 목숨을 건졌다.

부녀자들의 행진의 시작은 파리 수산시장에서 수십년 동안 생선 손질하던 아낙들을 필두로 시위가 처음 조직되어서, 가녀린 귀족 여자들과 다르게 강인한 여성이 많이 참여했다. 수십 년 동안 클리버를 다루던 그녀들에게, 경비병을 둘러싸서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5]

한편 궁궐 경비대는 라파예트 후작의 병력들과 같이 일한 경력이 있어서 그걸 계기로 연락을 취해 대면해서 시위대를 진정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몇 시간 눈을 붙이던 라파예트 후작이 일어나 이 중재를 성사시켰다. 전날 친분을 다진 라파예트의 병사들의 설득으로 여자들은 궁전에서 나갔지만, 아직도 궁전 건물 밖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는 경비병들을 잡아 참수해서 끝에 효수해서 돌아다니며 잔뜩 살기가 올랐지만, 스트레스 해소가 되어 흥분이 많이 가신 상태였다. 직후 라파예트의 설득으로 궁의 발코니에서 루이 16세 본인이 출두하자 군중은 "임금님 만세! (Vive le Roi!)라고 외칠 정도로 기분이 전환되었다. 그러나 직후 군중은 "왕비도 보자"고 요구하고, 방금까지 잡혀 죽을 뻔해서 삐진 왕비가 당당하게 팔짱끼고 베란다에 서자 백성들은 왕비에게 머스켓을 조준할 정도였다. 이에 라파예트 후작이 왕비의 옆에 서서 군중이 총을 못 쏘게 자리잡고 있다가 시간을 끌어 흥분을 가라앉히고, 곧이어 귀족들도 왕비를 신임한다는 제스쳐로 왕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남자 귀족이 후견인이 되자 서서히 민중에서도 "왕비 만세! (Vive la Reine!)"라는 외침이 간헐적으로 일어났고, 사태는 종식되었다.

4. 결말

은 시위대와의 약속대로 파리로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시위대가 왕을 에워싸고 직접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 호송했다.

언뜻 보면 "임금님 만세"와 "Le bon Papa (우리의 좋은 아버지)"라고 외치며 훈훈한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왕실을 물리력으로 납치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의 단초를 놓은 사건으로 이어지는 바렌느 배신사건자코뱅주의자들의 출현 등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파리로 귀환하는데 장장 9시간 동안 걸었는데, 여기서 분위기는 들떠 있었지만 효수된 사람들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두고 만세를 외치고, 때때로 머스켓이 허공에 발포되며 과격함은 아직 살아있는 분위기였다. 콩코드 광장에서 끌고 온 장식용 대포도 도로 파리로 끌고 갔는데, 여기 위에 몇몇 여성이 올라타거나 하며 놀았다고 전해진다.

루이 16세도 눈치는 있어서, 튈르리 궁에 도착하자 "모든 이는 자기가 원하는 곳에 스스로 배치하라"라고 투덜대며[6] 장서에서 폐위된 찰스 1세의 전기를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5. 음모론

오를레앙파가 선동한 사건이라는 소문이 있다. 왕의 친척형은 오히려 입헌군주제를 신봉하는 자였고, 루이 16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입헌군주제의 왕이 되기를 꾀했으며, 이건 설계된 시위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 이 부분은 동시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중국 명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조차 자살한 황제인 숭정제의 장례식을 후하게 치러주었던 반면 숭정제를 보좌했던 신하들은 부패하고 사악한 탐관오리로 몰아 대부분 고문하여 죽여 버렸다. 심지어 이자성한테 "죽은 황제는 어리석고 못난 혼군이었고, 이제 그대가 더 훌륭한 제왕입니다."라고 아첨을 했던 신하들도 이자성한테 더러운 배신자라고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2]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와는 철천치 원수 지간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비인 점이 제대로 한몫했다.[3]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호하겠다는 라파예트 후작 같은 이는 소수였다.[4] 19세기까지 유럽 여성은 (가슴골을 보여주는 것은 미덕이었지만) 절대로 발목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매우 상스러운 짓이었다. 다리까지 보이면 그야말로 창녀 확정. 그래서 19세기까지 똥오줌이 굴러다니는 거리를 긴 드레스 자락으로 쓸고 다니면서 치마 밑단에 온갖 오물들을 묻히면서도, 발목은 신성불가침일 정도로 가리고 다녔다.[5] 기록상으로는 최소 2명이 참수되어 효수되었고, 이중 이름이 확실한 사람은 타티베(Tardivet)였다. 나머지는 심한 구타를 당하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일단 살아남았다. 이중에서도 이름이 확실한 사람은 묘망드르(Miomandre)가 있다.[6] 이 뜻은 "왕이 무시당하는 시류에 두손 두발 다들었으니 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