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0:54:01

부여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8080> 온조왕 <colbgcolor=#fff,#000><colcolor=#002395,#fff>다루왕 · 덕좌왕
다루왕 기루왕
기루왕 개루왕 · 부여질
개루왕 초고왕 · 고이왕? · 부여우수?
초고왕 구수왕
구수왕 사반왕 · 비류왕? · 부여우복?
고이왕 책계왕
책계왕 분서왕
분서왕 계왕
비류왕 왕자 · 근초고왕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구수왕 침류왕 · 진사왕
침류왕 아신왕 · 부여훈해 · 부여설례 · 부여홍 · 왕자
진사왕 부여진손
아신왕 전지왕 · 부여신
전지왕 구이신왕 · 비유왕
구이신왕 비유왕?
비유왕 개로왕 · 문주왕? · 부여곤지?
개로왕 왕자 · 문주왕? · 부여곤지? · 무령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왕자 · -무령왕*-
무령왕 성왕 · 순타태자 · 부여사아
성왕 위덕왕 · 혜왕 · 임성태자?
위덕왕 아좌태자 · 임성태자
혜왕 법왕
법왕 무왕?
무왕 의자왕 · 부여새상 · 풍왕? · 아들 · 부여충승?
의자왕 풍왕 · 부여융 · 부여효 · 부여태 · 부여연 · 부여궁? · 부여선광? · 부여충승 · 부여충지 · 부여용
*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백제 국왕 }}}}}}}}}

백제의 왕자
부여연 | 扶餘演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615년 이후[1]
백제 사비성 추정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사망
(음력)
연대 미상 (향년 불명)
장안 추정
(現 중국 산시성 시안시)
성씨 부여(扶餘)
연(演)
부모 부왕 의자왕
모후 미상
형제자매 이복형 부여융, 부여태, 부여효
이복동생 부여풍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백제 제31대 건길지 의자왕의 아들.[2]

2. 생애

백제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660년 이전 그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고 뒤이어 계백황산벌 전투에서 패하고 나당연합군이 수도 사비성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아버지 의자왕태자 효는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한다.

660년 7월 13일 이복형 부여태가 칭왕하며 항전했으나 소정방의 군대가 사비성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자 부여태는 결국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만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버티던 의자왕도 예식진에 의해 잡혀가 강제 항복당하면서 백제멸망하게된다(...) 전쟁이 끝난 뒤 9월 3일 사비를 떠나 당나라 군대를 따라 낙양으로 갈 때 부여연도 의자왕, 태자 부여효와 왕자 부여태·부여융 등 백제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에 붙잡혀갔다.

11월 1일 장안에 도착한 의자왕과 부여융을 비롯한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3]등 37명 등과 함께 조정에 바쳐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천자 당 고종측천무후를 만났다. 고종은 이들의 잘못을 크게 꾸짖은 후에 이들 모두를 사면시켜주였다.[4] 풀려난 뒤 그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아마 부여연은 장안에서 생을 마감한 듯하다.

3. 여담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발췌

[1] 큰형인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615년 이후 출생이다.[2] 기록에서 태자 부여효, 부여태, 부여융 다음으로 서술된 점으로 보면 의자왕의 사남일 것으로 추정된다.[3] 백제의 신하로 팔성팔족 가문인 국씨(國氏)다.[4] 부여연의 아버지 의자왕은 나라를 잃고 나서 심한 충격을 받아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며 며칠만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5] 의자왕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으며, 융과 태, 효와 연 형제가 서로 모계가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6] 山尾幸久, 1992, 「7世紀 中葉 東亞細亞」, 『백제연구』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