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 천수각에 전시되어 있는 초상화 |
1. 개요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 서소승태). 1548년 ~ 1608년.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초기의 승려 겸 외교관. 호는 게츠호(月甫).2. 생애
난요 야마시로국 후시미 출생[1]의 임제종 승려로 어려서 출가해 일산파의 닌조 슈코에게 배웠다가 1584년에는 쇼코쿠지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 절을 부흥시켜 중흥의 시조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때 지은 법당이 현재 남아 있다. 1585년에 로쿠안소로쿠가 되었으며 이후 난젠지에 들어갔다가 다시 로쿠안소로쿠가 되어 히데요시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일본신국론,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론에 심취해 전국 시대 통일 후 야욕에 불탔던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적극 찬성했다.히데요시가 귀무덤을 세우자 이 무덤에 비석을 세우면서 히데요시가 장병들이 적의 목을 베어 보내야 하지만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오게 했으며, 히데요시는 이를 원수라 생각하지 않고 가엾다는 생각에 친한 사람 대하듯 공양했다고 적어 잔혹한 행위를 미화했다.
임진왜란 도중에 명나라와 평화 협상을 하면서 양측 수뇌부 의견차로 협상이 난항을 겪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명이 히데요시에게 보낸 강화 조서를 위조하기로 마음먹고, 이에 히데요시 앞에서 문서를 읽는 역할을 맡은 사이쇼 죠타이가 적당히 문서 내용을 조작해 보고하기로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이쇼 죠타이가 명에서 온 문서를 곧이곧대로 읽어버렸다. 덕분에 위조한 걸 읽기로 해놓고서 진짜 봉공안을 읽어서인지 조타이한텐 큰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고, 반대로 고니시는 목이 날아갈 뻔 했지만[2][3] 히데요시가 분을 가라앉히고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는 분부를 내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게 이야기의 요지. 다만 이 내용 중 실제와 부합하는 부분도 있지만 사이쇼 죠타이 부분은 이후 일본에서 창작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600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우에스기 가문의 항복을 받으러 갔으며, 1608년에 사망했다.
3. 여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데 일조한 사람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다.[4] 사적으로는 문맹인 도요토미 히데요시[5]를 대신해서 글을 읽어주는 역할도 겸했다. 이쪽 분야를 담당한 사람답게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6]를 모두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랑 포르투갈 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고 하니, 일본어를 제외하고도 4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셈이다. 폐쇄적인 중근대 시절에 이러한 언어능력을 지닌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뜻밖에도 조선의 승려 사명당과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를 논한 것도 있지만 사적으로 안부를 묻거나, 만남을 추억한다거나 시를 주고받는 편지도 남아있다. 또한 이 편지들을 보면 사명당이 조타이를 형(兄)이라고 상당히 친근하게 부른 것을 볼 수 있는데, '형은 어떻게 지내는가', '조선인 포로들이 아직 다 오지 않았는데 형은 그때 약속을 식언(食言, 약속을 어김)하지 않길 바란다' 등이다. 실제 나이는 사명당이 많았으나 사이쇼에게 형이라고 한 걸로 봐서는 사이쇼가 사명당보다 먼저 승려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려들은 승려가 된 시점을 기준으로 세는 나이인 법랍을 쓰므로 사명당이 말을 높인 것이다.
1608년까지 살았던 인물인 만큼 1607년에 파견되었던 조선 후기의 첫 번째 통신사의 사행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일본 측의 고위 인사 중 하나로서 통신사가 가져온 외교 문서의 답서를 쓰는 데 깊이 관여했던 만큼 언급이 안 될 수 없었는데, 통신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고 전해들은 것들이기는 하나 기록들[7]을 보면 도요토미 가에서 도쿠가와 가로 주군을 바꾸기는 했지만 조선 침공에 찬성했을 때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4. 대중 매체에서
RTS 게임 임진록 2와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나오는 세이쇼오가 바로 이 사람. 풀네임은 세이쇼오 쇼우타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일본어에서 한자 '西'는 '사이'와 '세이'의 독음이 모두 존재하다보니 착오가 있었던 듯 하며, 한자 承는 또 '쇼'에 가깝게 발음되는 게 보통이다 보니 '조타이'가 아니라 '쇼타이'라고 읽는 경우도 많다. 임진록에서는 조선의 사명대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일본의 장수로 등장하고, 마법으로 지진을 일으키고 아이템으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을 가졌다. 거상에서는 퇴마사의 상위 장수로 등장하였고 임진록과 마찬가지로 지진술을 쓴다.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게임 임진록에서 잘못 읽은 이름과 같지만 일본어 표기법에 맞게 장음을 뺀 세이쇼 쇼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김종결이 배역을 맡았으며, 징비록에서는 고증에 맞게 사이쇼 죠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명칭은 징비록이 더 알맞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끝까지 충언을 아끼지 않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분노에 휩싸여 광분하는 히데요시에게 그만 노여움을 거두고 체통을 지키라 일갈하며, 히데요시의 시대가 끝났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은 캐스팅이 재미있는데, 여인천하에서 김종결은 김안로로 나왔었고 이효정이 윤임으로 나왔었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김종결이 사이쇼 죠타이로 나왔었고, 이효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나왔다.
그리폰이 묘사한 임진왜란 만화 중 하나인 고니시 유키나가편에서는 거짓말이 너무 커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명에서 온 문서를 그대로 읽었다는 다소 현실적인 설을 제시했다. #[8]
[1] 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2] 엄밀히 말해선 할복을 명했겠지만 고니시는 기리시단, 즉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할복을 거부할 테니 남는 건 참수형.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사로잡힌 뒤 할복을 거부하고 참형에 처해졌다.[3] 다른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지리에 밝기 때문에 다시 침공하려면 필요하다"라고 말한 덕분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살아날 수 있었다.[4] 다만 도쿠가와는 예전부터 참모 역할을 하던 난코보 텐카이가 있어 별다른 활약은 못했다. 애초에 도요토미 측 사람이었다. 일본이나 일본풍 대중매체에서도 도쿠가와 옆에 승려로는 백이면 백 텐카이가 등장한다. 다만 죠타이는 외국어를 잘해서 통역에만 특화된 인물이다.[5] 활쏘기와 한문 독해 능력은 일단 갖추어 놓은 상태에서 문관이 될지 무관이 될지를 정하는 조선(무과 시험이라고 해도 병법서를 읽어낼 줄 알아야 했고,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암기해야 했다. 이러니 문맹이서는 곤란했다)과 달리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는 무사는 글을 못 읽어도 검만 잘 다루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있어서 대부분이 문맹이었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은 신분이 매우 높거나 학자나 승려이거나 문관 정도가 되어야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 중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최고 권력층까지 올라갔지만 문맹이었는데, 히데요시는 원래 다이묘 출신이 아니라 평민 아시가루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으며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인생과 집권을 이해하는 데는 이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일본에서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글은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건 에도 시대 중기 이후였다.[6] 조선, 명 사신과 말로 대화를 나눌 때의 능력이다. 명나라 황제의 봉공안 같이 한문으로 쓰인 문서는 중국인들도 일상에서는 안 쓰는 고대 문법으로 쓰였기에 이걸 중국 발음으로 읽을 이유는 전혀 없었고 한문 문서를 읽을 때는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읽거나 바로 일본어로 번역해서 읽었다.[7] 통신사를 박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것부터 시작해서 일본 측에서 답서에 명나라의 연호를 쓸 것인가 일본의 연호를 쓸 것인가 하는 논쟁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의 연호를 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답서의 내용 중에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싶은데 조선이 중재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가는 데 "일본에 천황이 있고 명에 황제가 있으니 서로 동등한 나라인데 어떻게 조공을 바치느냐" 라는 논리로 반대하여 삭제되기도 했다.[8] 다만 상술했다시피 이 만화는 정유재란 이전 강화 회담에 대해 새로운 학설이 알려지기 이전에 연재된 만화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