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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2:13:15

귀무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echong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mizuka-M1773.jpg
전체 모습 귀무덤의 오륜탑[1]

1. 개요2. 유래3. 문화재4. 이장(移葬)5. 창작물6. 교토 외 귀무덤

1. 개요

귀무덤([ruby(耳塚, ruby=みみづか)])은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무덤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의 를 묻은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에서 앞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교토국립박물관 북쪽에 있고, 호코지 건너편으로 가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교토의 귀무덤이 대표적이지만, 사실은 일본 전국에 많이 분포해 있다.

2. 유래

이름 그대로는 를 묻은 무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로, 임진왜란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군이 죽인 조선인들의 수급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야사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리품으로 날아온 귀를 보고는 "사람에게 는 하나 뿐이지만, 는 둘이니 하나를 죽이고도 둘의 수급으로 늘릴 수 있다"며 코를 베라고 했다고 한다. 귀는 남녀노소 구분이 모호하지만, 코를 인중과 윗입술까지 도려내게 함으로써 수염의 유무와 색으로 검은수염이 달렸으면 청장년 남자, 흰수염은 노인, 수염이 없으면 소년이나 여자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야사인 만큼 실제로 이랬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때의 그 부하들만 알 것이다.

당연히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다. 묻힌 대상과는 다른 '귀무덤'이라는 표현으로 돌려 말해 불길함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라고 한다. 코무덤이라고 하면 무덤에 있는 코의 개수가 죽인 사람의 갯수와 일치하기 때문에 귀무덤이라고 하면 죽인 사람의 수를 1/2로 줄일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코인지 귀인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설도 신뢰성이 없다.

그 유래는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피가 큰 수급 대신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내도록 하여 각자 벤 수에 따라 포상을 내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막상 모아 놓고 나니 처치가 곤란한 데다가 일을 지시한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다고 조선에 돌려줄 수도 없게 되자 그냥 한 곳에 파묻은 것이다. 이러한 기행은 당시 히데요시가 심각하게 미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2] 실제로 정유재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잔혹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바로 코베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미친 짓에 적극 찬동했던 사이쇼 조타이는 훗날 무덤을 만들어 주고 비석을 세워 준 게 히데요시의 자비심을 보여준다는 말을 했다. 몇몇 일본군들은 잔혹성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고, 조선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민간인의 경우 코만 베고 살려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3]
정유년에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할때에 평수길이 모든 왜군에게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서 수급 대신 바치게 하였으므로 왜졸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문득 죽이고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서 수길에게 보내었다. 수길은 이를 점고하여 본 뒤에 그 나라 북망인 대불사 옆에 모두 매장하여 한 구릉을 만들고 제 나라 사람에게 위엄을 보였다고 하니, 사람을 참혹하게 죽인 것은 이것으로도 가히 알 수 있다. 이때문에 그때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코 없이 사는 자들이 많았다.
이수광, <<지봉유설>>
당시 시대상을 볼때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살한 적 군인의 귀나 코를 베는 일은 더러 있었지만,[4] 이것을 살아 있는 민간인에게 행한 것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에비'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비’, ‘에비야’, ‘이비야’, ‘어비야’ 등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에비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존재를 뜻하는데 “계속 울면 에비 온단다”, “에비, 이런 거 만지면 안 된다.”등의 용례가 있으며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귀(耳), 코(鼻), 사람(爺)이 합쳐진 말로 귀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유재란 때 종군한 승려 쿄넨(慶念)[5]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순사를 에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8년 7월 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3. 문화재

바로 옆 호코지(方広寺)[6]의 대불전터(大仏殿跡) 및 석축과 함께 쇼와 44년(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설명판은 헤이세이 15년(2003년)에 세워졌다.

4. 이장(移葬)

일부는 1990년, 1992년 경상남도 사천시전라북도 부안군으로 이장됐으나 오늘날에도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나 정부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별도의 예산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서 3대째 개인이 관리했다가 나중에서야 교토시에서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5. 창작물

사극 징비록 48화에서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6. 교토 외 귀무덤

교토에 있는 귀무덤이 유명하지만 사실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다. 1992년 오카야마현 비젠시 가카토 구마카와산 기슭에서 귀무덤, 1995년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귀무덤이 발견되었다.

2014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 히코텐성 남쪽에서 적석묘로 된 귀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쓰시마 지역의 역사 문헌인 '카미쓰시마지'에서 일본군이 잘라온 조선인의 귀를 공양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현장 조사를 벌여 찾아냈다. 교토나 다른 곳에 있는 귀무덤과 형태가 다르고 다른 무덤과는 달리 표지석 등은 없었지만 현지인들의 진술과 사료가 일치한다고 한다.

2016년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가스이엔 옆 언덕 숲 속에서도 귀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돌로 만든 높이 1.2m 정도의 사당 양쪽 기둥에 '괵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괵총의 괵(馘)은 '귀를 베다'는 뜻으로 곧 귀무덤을 뜻한다. 이들 귀무덤들이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과 연관되어 있는 걸 보면 정유재란 때 베어온 코나 귀가 일본 여러 곳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2023년,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 에이코쿠지에서 1,800명의 귀와 코를 묻은 귀무덤이 발견되었다.귀무덤 위치KBS 기사

일본 전국에 있는 귀무덤을 모두 환수하자는 여론이 강하지만 당장 교토 귀무덤도 완전히 환수되지 않는 데다 한국에 일부나마 환수된 귀무덤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1] 측면에 세겨진 것은 실담 문자로, 각 글자마다 아래에서부터 지(地, अ(a)), 수(水, व(va)), 화(火, र(ra)), 풍(風, ह(ha)), 공(空, ख(kha))을 상징한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의 오자진언(五字眞言)인 '옹 아 비 라 훙 캉 스와하'(ॐ अ वि र हूं खं स्वाहा(oṃ a vi ra hūṃ khaṃ svāhā))에서 '아 비 라 훙 캉'의 모음을 뺀 기본 글자에 해당한다.[2] 사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전에도 패역하고 잔혹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아들 츠루마츠의 출신에 토를 다는 (츠루마츠가 외간 남자의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라는) 벽서가 성문 앞에 붙자 감시가 소홀했다는 이유로 벽서가 붙은 날 성을 지키던 문지기 15명의 코를 베는 잔인한 형벌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범인을 찾겠다고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몰살하는 숙청을 벌였다. 어쩐지 귀나 코 베는 것을 밥 먹듯 하던 이유가 있더라니[3] 항생제는 커녕 소독의 개념조차 희박하여 지혈 외에는 딱히 치료법이 없었던 당시 의술이 감염에 취약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코를 베이고도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 조선과 명은 적군의 수급으로 전과를 확인했다.[5] 일본 불교에서는 한자음을 오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도 慶을 오음으로 '쿄'로 읽는다.[6]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치기 위해 생트집을 잡았던 문구가 새겨진 범종으로 유명한 절이며 이 범종은 중요문화재 공예품 제223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