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8-23 18:34:26

사첨


송서(宋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d1d5ef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장영, · 유등지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謝瞻
사첨
사(謝)
이름 첨(瞻 / 檐)
선원(宣遠) / 통원(通遠)
생몰 387년 ~ 421년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부친 사중(謝重)
조부 사랑
증조부 사거(謝璩)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동진, 유송의 관료로 자는 선원(宣遠) 혹은 통원(通遠)이다.

2. 상세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으로 387년 사중(謝重)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첨은 6살의 나이에 글을 잘 지어서 자석영찬(紫石英讚)과 과연시(果然詩)를 지어 당대의 선비들이 모두 사첨의 글을 찬탄하고 사첨을 기이하게 여겼다. 처음 안서장군(安西將軍) 환위(桓偉)의 참군(參軍), 초대(楚臺) 비서랑(秘書郞)을 지냈다.

사첨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숙모인 유씨(劉氏)가 사첨을 길렀으며, 형제들이 모두 자신의 어머니처럼 숙모를 따랐다. 유씨의 아우인 유유(劉柳)가 오군(吳郡) 태수로 부임할 때 누나를 같이 데리고 갔는데, 사첨은 그들을 거스르지 못하고 직무에서 물러난 뒤 동행하였으며, 건위장군(建威將軍) 유유의 장사가 되었다.

뒤에 진군장군(鎭軍將軍) 유유, 대사마(大司馬) 낭야왕(琅邪王) 사마덕문의 참군을 역임하고 주부(主簿)로 전임되었으며, 안성상(安成相), 중서시랑(中書侍郞), 송국(宋國) 중서시랑, 황문시랑(黃門侍郞), 상국부(相國府) 종사중랑(從事中郞)을 지냈다. 사첨의 아우인 사회가 당시 송대(宋臺)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있었는데, 사회는 총애와 대우가 이미 두터웠고 팽성(彭城)에서 수도로 돌아와 가족들을 맞이할 때 빈객들이 골목에 넘쳐났다. 집에 있던 사첨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사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명성과 지위가 아직 높지 않은데 사람들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우리 집안은 청렴결백과 겸양을 가풍으로 삼고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교유하는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뿐인데, 너는 결국 권세가 조정을 기울였으니 이것이 어찌 가문의 복이겠는가?

사첨은 다시 대나무 울타리로 문을 가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

그리고 팽성으로 돌아갈 때 사첨은 유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은 본디 한미한 선비로 부친과 조부의 지위는 이천석을 넘지 않았습니다. 아우의 나이가 이제 막 서른이 되었지만 품은 뜻과 행실은 평범하고 천박하지만 대부(臺府)에서는 영현하고 현달한 지위에 있는데,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생기므로 머지 않아 들어맞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를 폄관하여 쇠락한 집안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사첨은 유유에게 여러 차례 요청하여 사첨을 오흥군태수로 삼았다가 다시 사첨이 주청하여 이에 예장군태수로 삼았다. 사회가 혹여 조정의 기밀을 사첨에게 이야기한다면 사첨은 친구에게 이를 말하며 웃음거리로 삼아 사회가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했다. 사회가 결국 유유를 보좌하여 공을 세우며 지위와 권세가 더욱 커지자, 사첨은 점점 더 두려워했다.

421년, 사첨은 예장군에서 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첨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사회가 사첨을 찾아오자, 사첨은 사회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나라의 대신이 되었고 또한 군사적인 중책을 맡고 있는데, 먼 곳에서 오면 반드시 의심과 비방을 낳을 것이다.

과연 사첨의 말대로 사회가 배반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뒤에 사첨이 병이 위중하여 수도로 돌아갈 때 고조는 사회가 금군을 관장하고 있었기에 출궁하여 숙박하지 못하게 했으며, 사첨에게는 영군부(領軍府) 동문에 있는 남군공주(南郡公主)[1]의 남편 양분(羊賁)의 옛 저택에 살게 했다. 그러자 사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조상이 남긴 낡은 오두막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살 수 있겠는가!

또한 사첨은 임종할 때 사회에게 다음의 서신을을 전했다.
나는 다행히 몸을 보전하여 산기슭에 묻힐 수 있으니 이 또한 원망하겠는가? 아우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자 집안을 위하는 것이다.

[1] 동진 명제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