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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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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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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4. 근세5. 근대6. 현대7. 참고 자료



1. 개요

스리랑카역사에 대해 다룬다.

2.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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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만 년 전부터 베다(Vedda, 웨다)라고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 인종 계열 종족이 인도 남부에서 건너와 살고 있었다. 이후로 인도 남부지역이 발전하면서 스리랑카도 그 영향을 받았고, 농경민 계통의 드라비다인들과 수렵채집민인 베다족이 한 동안 공존해있었다가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해 벵골 지방에 정착했던 인도아리아인들 중 위자야(Vijaya)[1]가 700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스리랑카섬을 침공하며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이 스리랑카의 연대기 《마하왕사》(Mahāvaṃsa, 기원후 5세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래도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아리아인들과 기존의 수렵채집민인 베다인들이 혼혈되면서 이들이 싱할라인의 기원이 되었고, 실제 유전적인 검사에서도 이둘의 혼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인도의 귓밥'이나 섬 모양 때문에 '인도의 눈물'이라는 별칭이 있다. 별칭에 어울리게 남인도의 계속된 침략을 받았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베다인-싱할라인들은 중남부 지역에 거주했고, 북부지역은 타밀나두 지역과 육로로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타밀족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

혼혈되지 않은 베다인들이 현재까지도 스리랑카 동부 내륙 시골이나 정글 지대에서 거주하지만 인구가 1만 명에도 못 미치는 데다가, 관광업으로 먹고 사는 경우가 많아 싱할라어나 타밀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고유의 언어인 베다어도 말이 고유의 언어지 사실상 싱할라어 피진이 된 지 오래고, 그나마도 2000년대부터는 모어로 쓰는 사람이 없다.

기원전 4세기 이전까지 탐바판니(Tambapaṇṇī), 우파티사가마(Upatissagāma, Upatissa Nuwara) 등 고대 왕국이 세워졌다. 이들은 수천 곳의 집수 시설과 저수지로 빗물을 저장해 이용하는 관개 농업을 통해 섬 북부의 건조 지역의 농업 생산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기원전 377년 설립된 아누라다푸라 왕국(Anurādhapura Rājadhāniya, 기원전 377년 ~ 기원후 1017년)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아소카 대왕을 모방하여 세금의 상당 부분을 공공 병원, 조산소, 약국 등 건강과 의료를 위해 투자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1017년 남인도 타밀족 국가 촐라 제국의 침공으로 무너질 때까지 1300여 년간 유지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 초창기에 지배 계층의 종교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영향을 받은 브라만교였지만, 기원전 3세기에 데와남피야 티사(Devanampiya Tissa, 재위: 기원전 307년 ~기원전267년) 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 사회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상좌부 불교는 빠르게 왕권과 결합하여 국왕은 불교 문화의 보호자가 되었으며, 인도 본토에서 불교 세력이 점차 약해짐에 따라 중세부터는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진 상좌부 불교 역시 대체로 스리랑카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역시 소수 종파로 존재하였으나, 상좌부 불교를 중시한 국가 엘리트는 때로 이들 소수 종파를 탄압하기도 했다. 아누라다푸라 시대 소수 자이나교도의 존재도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2]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브라흐미 문자로 된 비문이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다수 기록되었으며, 이후 아누라다푸라의 기록 문자는 점차 변화하여 싱할라 문자가 8세기경에 성립되었다. 싱할라 문자의 변화는 아누라다푸라 시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현대 스리랑카의 공용어인 싱할라어는 인도 서남부 계열의 마하라슈트리 프라크리트(Maharashtri Prakrit)가 약 기원후 3세기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아누라다푸라 후기인 약 7세기경에 독자적인 언어로서 성립하였다. 아누라다푸라 시대 중기와 후기에는 상좌부 불교의 성전어 팔리어와 민중어 싱할라어로 많은 문헌이 쓰였으나, 손상되기 쉬운 패엽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다수의 문헌이 실전되었다. 팔리어 문헌은 왕국의 연대기 《디파왕사》(Dīpavaṃsa, 기원후 3~4세기), 《마하왕사》(Mahāvaṃsa, 기원후 5세기) 등과 다양한 불교 경전 및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기원후 5세기)을 비롯한 경전 주해서 등 상당량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에 전하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싱할라어 서적은 《시야바슬라카라》(Siyabaslakara, 9~10세기) 등의 3종뿐이다.

아누라다푸라 시대에는 미술 작품과 불상, 불탑 등의 제작도 활발하였다. 카샤파 1세(Kashyapa I, 기원후 473년 ~ 495년) 시대의 시기리야(Sigiriya) 프레스코화는 스리랑카 고대 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기원후 4세기부터는 해상 무역을 통해 거래하던 동로마 제국의 주화를 모방해서 스리랑카 내 자체 주화를 주조하게 되었다.

3.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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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라다푸라 왕국 멸망 이후 촐라 제국의 스리랑카 지배는 1070년까지 이어졌으며, 촐라는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시바파 힌두교 신앙을 퍼뜨리려 노력하였고 수많은 불교 사원들을 파괴하여 스리랑카 북부의 승단이 붕괴되었다.

1055년 ~ 1056년 무렵 스리랑카 남부의 마하나가쿨라(Mahanagakula)를 거점으로 위자야바후 1세(Vijayabahu I, 재위: 1055/1056년 ~ 1110년)가 싱할라계 지방 세력을 끌어모아 촐라 제국의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위자야바후는 스리랑카에서 타밀 세력의 수도였던 폴론나루와를 2차례의 원정을 거쳐 점령하여, 폴론나루와 왕국(Polonnaruwa, 1055/1056년 ~ 1215년)이 스리랑카의 새로운 독립 세력으로서 성립하였다. 폴론나루와 왕국은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폴론나루와 왕국의 수도 폴론나루와는 명군으로 평가받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I, 1153년 ~ 1186년) 치세에 세계적으로도 인구가 많고 융성한 도시로 손꼽혔다고 한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폴론나루와 왕국이 계승권 분쟁으로 혼란에 빠진 사이, 판디아 왕국의 잔당들이 1212년 스리랑카를 침공하여 폴론나루와 여왕 릴라바티(Lilavati, 재위: 1197년 ~ 1200년, 1209년 ~ 1210년, 1211년 ~ 1212년)의 군대를 물리치고 판디아에서 온 타밀인 파라크라마 2세(Parakrama II, 재위: 1212년 ~ 1215년)가 폴론나루와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와중에 1215년, 인도 동부 칼링가(Kalinga) 지방[3]에서 칼링가 마가(Kalinga Magha)가 이끄는 새로운 힌두계 침략자들이 건너와 파라크라마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스리랑카 북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북부는 칼링가 마가가 세운 자프나 왕국(Jaffna, 1215년 ~ 1619년)의 세력권이 되었지만, 싱할라인들은 칼링가 마가를 피해 남부로 대거 이주하였다. 남부에서는 아누라다푸라 람바칸나 제1왕조의 후예 위자야바후 3세(Vijayabahu III, 재위: 1220년 ~ 1224년)가 이주한 싱할라인 세력을 규합하여 담바데니야(Dambadeniya)를 중심으로 담바데니야 왕국(1220년 ~ 1345년)을 세우고 자프나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14세기 중반 담바데니야 왕국에서 왕국의 중심지가 감폴라(Gampola)로 옮겨짐에 따라 감폴라 왕국(1341년 ~ 1412년)이 성립하였으나 왕조는 교체되지 않고 담바데니야의 위자야바후 3세가 개창한 시리 상가 보(Siri Sanga Bo) 왕조가 계속해서 세습하였다. 감폴라 말기인 1411년에 정화의 원정대가 감폴라와 알력을 빚어 정화 함대와 감폴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정화 함대가 승리하여 감폴라 국왕 위자야바후 6세(Vijayabahu VI, 재위: 1397년 ~ 1411년)를 끌어내리고 그를 명으로 압송하였다. 명의 영락제는 정화 함대가 데려온 위자야바후를 풀어주고 그를 다시 스리랑카로 돌려보냈으며 위자야바후는 이듬해 스리랑카로 돌아왔지만 권력을 다시 쥐지는 못했다. 정화 함대와 감폴라 간의 전쟁에서 정화 함대 편에 선 감폴라의 왕족 파라크라마바후 6세(Parakramabahu VI, 재위: 1412년 ~ 1467년)가 1412년에 코테(Kotte)에서 새 왕국을 개창하여 코테 왕국(1412년 ~ 1597년)이 성립하였다.

파라크라마바후 6세의 시대도 반세기에 걸친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의 시대였으며, 코테는 군사적으로도 강성하였다. 파라크라마바후 6세는 아들 부와네카바후 6세(Bhuvanekabahu VI, 자프나 국왕 재위: 1450년 ~ 1467년, 코테 국왕 재위: 1472년 ~ 1480년)에게 1450년에 북부의 자프나를 공격하게 하여 점령에 성공하고, 부와네카바후 6세는 1450년부터 1467년까지 자프나의 국왕으로 통치하였다. 이때가 전근대 스리랑카에서 마지막으로 섬이 통일된 시기였다. 그러나 파라크라마바후 6세가 1467년 사망하자 부와네카바후 6세가 코테의 왕위 계승권 분쟁에 참가하기 위해 코테로 귀환하면서, 이때를 노리고 남인도로 피신해 있던 자프나 전 국왕 카나하수리야 친가이아리얀이 남인도 용병을 데리고 자프나 반도로 돌아와, 코테 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자프나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자프나 왕국에서는 왕조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고, 아르야 차크라와르티 왕조가 포르투갈령 실론에 흡수되기 직전까지 자프나의 왕위를 세습하였다.

남부의 코테 왕국은 16세기 말까지 존속하기는 했지만, 15세기 말부터 코테는 반복적인 왕위 계승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갔다. 남동부에는 감폴라 시대에 세워진 도시 캔디(Kandy)를 중심으로 캔디 왕국(1469년 ~ 1815년)이 성립하였다. 16세기 초, 코테 왕국에서 위자야바후 6세(Vijayabahu VI, 코테 국왕 재위: 1513 ~ 1521)에게 대항해 세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위자야바후 6세를 살해하고, 맏아들이 코테의 왕 부와네카바후 7세(Bhuvanekabahu VII, 재위: 1521 ~ 1551)로 즉위하였다. 반란에 참가한 나머지 두 아들도 저마다의 세력을 가지고 코테에서 독립하였는데, 셋 중 둘째는 남부 라이가마(Raigama) 공국의 독립 공작 라이가마 반다라(Raigama Bandara)가 되었고, 막내 왕자는 중남부 시타와카 왕국(Sitawaka, 1521 ~ 1594)의 왕 마야둔네(Mayadunne, 재위: 1521 ~ 1581)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코테는 급속도로 약화되어 남서부 해안 지대만을 통제하게 되었고, 독립한 시타와카와의 대립과 지역에 새로이 등장한 포르투갈 세력의 간섭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라이가마 공국은 라이가마 반다라의 치세에 마야둔네의 시타와카 왕국에 흡수되었다.

15세기까지는 아담의 다리 혹은 라마의 다리란 이름의 사주[4]가 있어 육로로 인도에서 스리랑카까지 갈 수 있었으나, 1480년대 불어닥친 사이클론 때문에 사주가 끊겼다고 한다.

4. 근세

고대 싱할라인들의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무역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타밀인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싱할라인들의 수도는 점점 내륙 벽지로 옮겨졌다. 내륙에 위치한 폴론나루와, 감폴라, 캔디 등지는 타밀인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는 좋은 장소였을지 몰라도 해상 무역을 관리하기에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계속된 전란 와중에 고대부터 관리되어 온 관개시설 상당수가 파괴되면서 싱할라인들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궁핍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태국 등과 달리 스리랑카의 전통 세력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유럽의 포르투갈 세력에 처음에는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포르투갈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해상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요새를 건설했다. 처음 스리랑카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주로 스리랑카에 정착한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후손인 무슬림 스리랑카인들 이른바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포르투갈인들에 의한 대량학살 및 강제 개종으로 스리랑카의 무슬림 인구는 급감한다. 포르투갈인들은 스리랑카 해안 지대의 카라와족Karavas[5], 카라이야르족Karaiyars[6], 나이르족Nairs[7]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후 식민지 운영 인력을 충당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 동부의 캔디 왕국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이루어져 한동안 독립성을 지켜내었다. 캔디 왕국이 지배하는 동부 지역은 19세기 초에야 유럽 세력이 완전히 종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스리랑카에 도착한 시점은 1505년이었다. 16세기 초 남서부의 코테 왕국은 중남부 시타와카 왕국이 팽창하며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포르투갈은 이에 개입하여 1520년대에 코테의 부와네카바후 7세(Bhuvanekabahu VII, 재위: 1521년 ~ 1551년)를 도우며 시타와카에 맞서는 간헐적인 전쟁을 수행하였다. 부와네카바후 7세는 포르투갈 세력의 전면적인 도움을 바라지 않았고 단지 시타와카를 물리치는 데 이용할 심산이었으나, 1551년 부와네카바후 7세가 포르투갈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후 코테의 왕으로 옹립된 다르마팔라(Dharmapala, 재위: 1551 ~ 1597)는 시타와카와의 대립 국면에서 점차 포르투갈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1557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포르투갈 세력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코테가 명실상부한 포르투갈의 보호국이 되자 코테와 시타와카 지역에서 반포르투갈 정서가 만연하였고, 시타와카의 왕 마야둔네(Mayadunne, 재위: 1521 ~ 1581)는 포르투갈 세력을 물리치고 코테의 왕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코테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였으나 코테 포위전(1557년 11월 ~ 1558년 11월)에서 포르투갈–코테 연합군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마야둔네가 이끄는 시타와카 세력은 여전히 강성하였으며, 이어진 1559년의 물레리야와(Mulleriyawa) 전투에서 포르투갈–코테 연합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560년대까지 코테의 내륙 영토를 잠식하며 포르투갈과 코테 세력을 수세에 몰았다. 시타와카의 거듭된 침공으로 1565년 다르마팔라는 수도 코테를 버리고 포르투갈의 거점 콜롬보로 가서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시타와카의 다음 군주인 마야둔네의 아들 라자싱하 1세(Rajasinha I, 재위: 1581 ~ 1593)도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남서부의 포르투갈 세력과 남동부의 캔디 왕국 모두와 전쟁을 벌이는 데 시타와카의 국력을 소진하였고, 남인도계 힌두교도 관료를 중용하여 불교도들의 반발을 샀다. 라자싱하 1세는 집권 초기 캔디 왕국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캔디를 정복하고 보호국화한 후, 1587년에는 남서부 포르투갈 세력의 거점 콜롬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지만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물러났다. 1592년 포르투갈 세력은 캔디를 잠시 점령하였으나 곧 축출되었다.

포르투갈은 이처럼 남부 지역에서는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북부 지역에서 1560년 자프나 왕국과 벌인 전쟁에서는 대승을 거두어 수도 자프나를 점령하였다. 코테의 왕 다르마팔라는 1580년에 자신이 죽은 후 코테의 영토를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에 따라 1597년 다르마팔라 왕이 서거하자 포르투갈 세력이 코테 지역을 획득하여 포르투갈령 실론(1597 ~ 1658)이 성립하였다.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오늘날 스리랑카의 수도에 해당하는 콜롬보가 개발되었다. 17세기 초 자프나 지역에서 포르투갈 지배에 반항하여 반란이 일어났으나 포르투갈군에 진압되었고, 자프나 왕국은 이 과정에서 소멸하고 포르투갈령 실론에 병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 스리랑카의 정치에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 것이 캔디의 새로운 군주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Vimaladharmasuriya I, 재위 1590–1604)였다. 캔디의 귀족 위라순다라 반다라(Virasundara Bandara)는 라자싱하 1세의 캔디 침공을 도왔고 라자싱하 1세에 의해 시타와카 산하 캔디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나, 곧 라자싱하 1세의 의심을 사서 시타와카로 불려가 살해되었다. 위라순다라 반다라의 아들 코나푸 반다라(Konappu Bandara)는 이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항구 콜롬보로 도망가 포르투갈의 보호를 요청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8] 유럽식 군사 교육을 받고 포르투갈군과 함께 전투에 종군하였다. 코나푸 반다라는 포르투갈의 지지 하 캔디로 귀환하여 캔디의 새로운 군주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가 되었는데, 캔디에서 권력을 쥐자 바로 포르투갈 세력을 캔디에서 내치고, 가톨릭을 포기하고 불교로 다시 개종하였다.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는 포르투갈식 군사 지식을 활용하여 1593년에 벌어진 시타와카–캔디 전쟁에서 라자싱하 1세의 군대를 여러 전투에서 물리쳤고, 라자싱하 1세가 같은 해 죽은 후 역으로 1594년까지 시타와카를 점령해 캔디 왕국으로 병합하였다.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는 포르투갈과도 적대하였고, 1594년부터 간헐적으로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였다. 특히 1594년 7월에서 10월까지 스리랑카 중부 단투레(Danture)에서 캔디와 포르투갈이 벌인 대규모 전투에서, 포르투갈령 실론 총독 페드루 로페스 드소자(Pedro Lopes de Sousa)가 이끄는 2만여 병력[9]을 고작 1만여 명의 병력으로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10]을 거두었고, 이 과정에서 페드루 로페스 드소자 총독마저 전사하였다.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는 1602년의 발라나(Balana) 전투에서도 포르투갈군을 격퇴하였고, 캔디의 독립은 공고해지게 되었다. 위말라다르마수리야 1세는 캔디의 시리 상가 보 왕조(1469 ~ 1592)를 끝내고 새로운 디나자라 왕조(Dinajara Dynasty, 1590 ~ 1739)를 열었으며, 현대 스리랑카에서는 사실상 캔디 왕국 제2의 창업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발라나 전투 이후에도 17세기 초의 여러 전투에서 캔디 왕국은 명민한 전술로 포르투갈군에 연거푸 승리를 거두었는데, 특히 1630년 란데니웰라 전투에서는 홍수 와중에 포르투갈군의 화승총이 못쓰게 된 시점을 틈타 2만 명의 포르투갈군[11]을 다시 한 번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캔디 왕국은 새로이 인도양에 등장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과도 우호 관계를 구축하고 반포르투갈 공동 전선을 형성하였다.

1622년 영국과 페르시아 연합군이 포르투갈이 장악하던 호르무즈 해협을 점령하면서 포르투갈은 인도양에서의 패권을 상실하는 등 해양 세력으로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 캔디 왕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연합 세력은 1638년부터 1658년까지 장장 20년의 전쟁 끝에 포르투갈 세력을 일소하였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중반부터 기존 스리랑카 서부에 유지되던 포르투갈령 실론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실론(1640년 ~ 1796년)으로 승계되었으며, 네덜란드의 동맹 캔디 왕국은 동인도 회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스리랑카 동부의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 신부들을 추방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일부 현지인들을 개신교로 개종시켰으나, 포르투갈과는 다르게 현지 무슬림, 힌두교도, 불교도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포르투갈 지배 시절 가톨릭으로 개종한 해안 지대 주민들은 “라스카린(Lascarins)”이라는 현지인 부대를 구성했으며 스리랑카 내 포르투갈군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네덜란드는 이들을 개신교로 개종시켜 네덜란드군에 편입시키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무슬림 말레이인[12]들을 스리랑카 해안 요새에 둔전병으로 정착시키며 스리랑카 식민지 내 군사력을 공고히 했다.

캔디 왕국과 네덜란드 세력의 관계는 공동의 적 포르투갈을 물리치자마자 삐걱거리기 시작하였고,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캔디와 회사령 실론 간에는 전쟁과 일시적 평화 상태가 계속 반복되었으나, 스리랑카 전역에서 시나몬 교역을 독점하는 데 성공하는 등 동인도 회사는 캔디 지역에서도 경제적 이권은 획득하려 노력하였다. 18세기 전반, 캔디 왕국에서는 타밀어를 사용하는 텔루구계의 나야크조(Nayak Dynasty, 1739년 ~ 1815년)가 집권하는 왕조 교체가 일어났다. 캔디 왕국과 회사령 실론 간에 벌어진 최후의 군사적 대립은 1761년 ~ 1765년의 전쟁이었는데, 캔디가 일으키고 동인도 회사가 승전하였으나 양측 모두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이후 약 30년간 양 세력 간에는 평화적인 관계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1782년에는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과정에서 영국군이 네덜란드군을 물리치고 회사령 실론의 트링코말리(Trincomalee) 항구[13] 및 주변 지역을 한때 점령하기도 했다.

1796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고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지면서 네덜란드 왕실이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때 큐 서한(Kew letters)으로 스리랑카 서부의 회사령 실론을 포함한 인도의 네덜란드 식민지는 영국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부 네덜란드령 인도 식민지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네덜란드로 반환되었으나, 서부 스리랑카 식민지는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영국이 관리하였다.

영국령 실론과 동부의 캔디 왕국 간에도 1803년에서 1805년까지 3년간 제1차 캔디 전쟁(First Kandyan War)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에서 영국군은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는 캔디군을 소탕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며 몇 차례 캔디군에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고전하였고, 실론 총독 프레더릭 노스(Frederick North, 실론 총독 재직: 1798년 ~ 1805년)가 퇴임하면서 어정쩡한 상태로 공식적인 휴전 협정 없이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영국은 제1차 캔디 전쟁의 실패를 거울삼아 서부 식민지에서 내실을 다진 후 1815년에 제2차 캔디 전쟁을 벌여 캔디 왕국을 병합하고 스리랑카 전역을 식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캔디 왕국의 잔당들은 1817년에 우와–웰라사 대반란(Uwa–Wellassa Great Rebellion)을 일으켰고, 반란은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영국은 이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소모하였다. 영국 식민 정부는 반란의 중심지인 우와(Uwa) 지역에서 모든 성인 남성을 학살하고, 우와와 웰라사 지역에서 농경 시설과 주민 재산을 파괴 혹은 압류하는 등 가혹한 후처리로 토착민의 불만을 억눌렀다.

영국인들은 스리랑카섬을 '실론'(Ceylon)으로 불렀는데, 포르투갈어 '세일랑'(Ceilão)에서 비롯한 이름이다.[14]

5. 근대

1817년부로 스리랑카 전역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영국은 이웃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 커피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모방하여 스리랑카에 커피 재배를 시도하는데 이미 남인도에는 근세 예멘에서 건너온 커피가 자라고 있었던 것. 십년이 넘는 노력 끝에 스리랑카에서 커피 재배가 성공하고 1830년 즈음엔 대규모 커피 산지가 되었으나, 1870년경 퍼진 커피녹병으로 말미암아 커피 농장이 초토화되자 그 자리에 대용 작물로 차를 심었다. 그 후 홍차 산지로 유명해졌다.

영국 식민 지배 시절 스리랑카 싱할라인과 기원전 2세기부터 원수지간이던 타밀족들이 이 기간동안 백만 명 이상 스리랑카로 이민오면서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과의 갈등과 상호 불신이 심화되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유럽 혼혈 및 타밀족들을 우대하며 싱할라인들을 견제하였다. 특히 타밀족 상층 카스트들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 우대받았는데, 이는 이후 벌어지는 스리랑카 내전의 불씨가 되었다. 싱할라인들이 타밀족보다 인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치 의회에서의 의석은 반반씩 할당되었다. 영국에 의한 타밀족 대량 이주는 이 외에도 타밀족 사회 내 내부분열도 일으켰는데, 고대와 중세 시대 스리랑카에 정착한 타밀족들은 대부분 브라흐민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상위 카스트로 족보 조작이 완료[15]되었던 반면, 영국 식민지배 시절 스리랑카에 이민 온 타밀족들은 대부분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이었기 때문이다.[16] 카스트 차이 외에도 중세부터 스리랑카에 살던 타밀족들과 근현대에 이주해 온 타밀족은 천 년이 넘는 기간동안 방언 간의 차이가 다른 언어 수준으로 상당히 벌어지는 바람에 서로 의사 소통도 힘들었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다르게 영국에서는 스리랑카 내에서 기독교 포교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스리랑카 내 불교 신자들은 많은 사적 제재를 받아야 했고 스리랑카 내 상좌부 불교계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 열린 1873년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불교 승려 구나난다 테라가 혼자서 기독교 선교사 두 명과 벌인 공개토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체념에 가까웠던 여론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당시 토론 현장이 개방되어 있어서 토론 당사자들 외에도 수 많은 청중들과 언론들이 와서 관람 중이었다. 토론에서 패배한 선교사 두 명은 토론 내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 데다가 토론 패배 이후에도 치졸한 태도를 보여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이후 스리랑카 불교계는 급속도로 부흥하기 시작했으며 이 사건은 상좌부 불교가 싱할리인들의 민족 종교화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 현대

1948년에는 영국으로부터 자치령으로 지정받아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독립 초기 영국의 군주를 모시는 상태에서 1953년 독립국인 자국의 군주로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치른 바 있다. 그러나 1972년 정부 형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국호도 스리랑카로 바꾸었다.

2021년에 화학물질을 실은 화물선에서 화재가 일어나 미세 플라스틱이 유출되면서 환경재앙을 맞았다.# 그리고 화물선이 침몰하기 시작했다.#1#2

환경단체는 이에 스리랑카 당국이 막았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소송했다.#

2022년 극심한 경제난이 지속된 끝에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나면서 스리랑카 정부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22년 4월 12일, 결국 스리랑카가 일시적인 디폴트를 선언했다. # 스리랑카의 디폴트 선언에 대한 내용은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 문서를 참고.

6.1. 스리랑카 내전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의 오랜 분쟁 때문에 피를 흘렸다. 주요 민족인 싱할라족남방불교가 주류종교인 반면, 소수민족인 타밀족은 힌두교가 주류이다. 문화적으로도 싱할라족은 인도 아리안, 타밀족드라비다 계통이다. 이로 인해 종교, 민족 분쟁이 일어나 얼마 전까지 내전에 시달렸다. 2009년 5월 타밀 반군이 정부에 항복을 선언했다. 이 일 때문에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리적인 여건과 국민성 등을 염두에 두고 떠오르는 신흥국으로 보긴 하지만 언제 다시 내전이 재발할지는 모를 일이다.

오랜 전쟁 여파로 경제 및 여러 가지가 엉망이 되었고, 전쟁 와중에 전 대통령 쿠마라퉁가가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전쟁세를 따로 받아 여론의 반발도 컸고, 언론의 비난을 강제로 막느라 언론 탄압 국가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인도양이 비치는 경치 좋은 천혜의 관광지가 가득하여 관광업으로도 명성이 자자했으나 전쟁 탓에 큰 타격을 받았다. 자세한 건 스리랑카 내전 참조. 게다가 지금은 내전이 끝났지만 내전 당시 싱할라 정부군과 타밀 반군이 전투기와 공격헬기로 폭격, 지상공격을 하면서 떨군 폭탄들과 땅 속에 매설한 지뢰 등이 터지지 않은 채 아직도 남아있어 인명피해가 발생하며, 내전 당시 두 세력 사이에 교전/폭격이 있었거나 과거 타밀 반군들이 점거하던 지역들로 들어가가보면 지뢰/불발탄 주의 표지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7. 참고 자료

이 문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국내에 아직 스리랑카 역사를 개괄한 도서가 부족한 관계로 상당 부분 영문 위키피디아 'History of Sri Lanka', 'Anuradhapura period' 등의 문서 및 파생 문서의 발췌 번역으로 작성되었으며, 해당 문서들의 주요 참고 문헌은 이하와 같다. 본 문서 내용 중 중세사에 해당하는 부분 일부에서만 관련 역사 서적과 비교 검증하였으므로, 본 문서 서술의 확실성에 대한 입증을 위해서는 이하의 서적을 직접 참고해야 한다.한국어로 일반적인 스리랑카사를 개괄하려면 다음 서적 등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고대 스리랑카 불교사에 관해 더 알고 싶으면
[1] 《마하왕사》에 따르면 사자(동물)와 왕가(Vanga, 방가) 왕국의 공주 수파데위(Supadevi) 사이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납치해 동굴에 가두고 임신시킨 아버지 사자를 죽이고, 자신의 왕국을 세워 새로운 도시 싱하푸라를 건설하고 수도로 삼은 왕 싱하바후(Sinhabahu)의 아들이다. 위자야는 젊은 시절 무례하고 거침없는 행동으로 평판이 나빴고, 이 때문에 부왕 싱하바후가 위자야를 추방하여 스리랑카로 내려가게 되었다.[2] 주로 카르나타카 지방에서 이주해왔다. 상좌부 불교 설화집인 자타카에서 자이나교 교리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계에서 이들을 굉장히 경계했음을 알 수 있다. 자타카에서는 이들을 교주 이름을 따서 "니간타 나라뿟다"라고 불렀다.[3] 오늘날의 오디샤[4]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모래톱인데, 파랑 때문에 발달한다.[5] 싱할라화된 타밀족[6] 타밀족의 일파[7] 케랄라인의 일파[8] 이때 포르투갈식 이름 동주앙 다아우스트리아(Dom João da Austria)를 받아들이기도 했다.[9] 고아에서 소환된 병사를 포함해 1천 명 전후의 포르투갈인 병력 및 아프리카 흑인 노예 병사, 가톨릭으로 개종한 현지인 병력(라스카린) 15,400명, 코끼리 47마리, 기타 인도계 용병 등[10] 포르투갈령으로 극소수의 포르투갈인 병사 및 라스카린만 귀환하였으며, 93명의 포르투갈인이 캔디 포로로 잡혔고, 라스카린 패잔병은 와해되었다.[11] 포르투갈 본토에서 온 병력 1,500여 명 전후, 나머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도계 및 스리랑카계 병력 라스카린[12] 케랄라(말라얄람) 말고 인도네시아의 말레이인[13] 북동부의 항구다. 원래 자프나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영주가 반독립적인 상태로 존속하다가 16세기 후반 자프나의 원정으로 자프나에 병합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자프나 점령에 따라 포르투갈령 실론에 속하게 되었다. 163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점령했다가 1643년 캔디 왕국으로 양도되었다. 그러나 캔디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적대하자 다시 네덜란드가 탈취하는 등, 18세기 후반까지 캔디령, 네덜란드(회사)령, 프랑스령, 영국령 등으로 주인이 종종 바뀌던 곳이었다.[14] 이 이름은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에 잠깐 언급되기도 했다. 또한 신밧드에 등장하는 세렌디브 섬(Serendib)이 바로 오늘날의 스리랑카이다.[15] 북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 문다인의 계급을 구분하기 위한 인종차별적 성격이 강했다면, 드라비다인 일색인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신분제도처럼 다소 느슨하게 되어 있었고, 재산을 축적한 하위 카스트들이 족보를 구입하고 위조하는 행각도 사실상 용인되었다. 불가촉천민, 유색인종 문서 참조.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족보 조작이란 말로 설명했는데 사실 조작된 지 천 년 정도 더 된 족보는 더 이상 조작 족보로 볼 수 없기는 하다.[16]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족들이 인도 타밀나두 지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타밀족 동포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타밀족 내 상위 카스트 하위 카스트간의 상호 불신이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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