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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0:49:16

강지연(유송)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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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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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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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장영, · 유등지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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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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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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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권 「양리전(良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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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권 「은일전(隱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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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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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江智淵
(418 ~ 463)

남북조시대 유송의 관료로 제양군(濟陽郡) 고성현(考城縣) 출신.

강이의 조카로 아버지 강승안(江僧安)은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지냈다.

2. 생애

강지연은 처음 저작랑(著作郞)을 지냈고 강하왕(江夏王) 유의공의 태위부 행참군(行參軍), 태자태부(太子太傅) 주부(主簿), 수왕(隨王) 유탄의 후군부(後軍府) 참군을 역임했다. 당시 강이, 강담 부자는 뛰어난 명성이 있었고 모두 높은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강지연의 아버지 강승안은 젊은 시절에 명망을 얻지 못했고 강담이 강승안을 매우 냉대해서 강지연은 항상 이를 원망했고 절기나 명절이 아니면 강담의 집안에 출입하지 않았다.

뒤에 강지연은 양양(襄陽)에서 수왕 유탄을 보좌할 때 유탄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으며 자의참군(諮議參軍) 사장, 주부 심회문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심회문은 매양 강지연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응당 갖춰야할 것을 모두 갖췄고 사람들이 갖추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가지지 않은 사람은 강지연이로다!

원가(元嘉) 연간 말, 강지연은 상서고부랑(尙書庫部郞)으로 제수되었다. 이때 명문가의 자제들은 대랑(臺郞)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강지연의 집안은 이미 쇠락한 가운데 홀로 상서고부랑으로 제수되어 속으로 매우 기쁘지 않아서 관직을 고사했다.

효무제가 즉위한 뒤 경릉왕(竟陵王)으로 전봉된 유탄에 의해 다시 표기부(驃騎府) 참군으로 임명되고 주부로 전임되었다. 455년 유탄이 사공(司空)으로 전임된 뒤 주부,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역임하고 남복양(南濮陽) 태수를 겸임했으며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옮겼다.

유탄이 장차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지연은 유탄의 밀모를 알고 휴가를 청하며 유탄의 밑을 떠나 건강으로 돌아갔다. 459년 유탄의 반란이 실패한 뒤 강지연은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었다.

뒤에 강지연은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전임되고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郞)을 역임하였다. 효무제는 연회를 열 때마다 신하들을 능욕하고 더불어 신하들이 서로를 능욕하도록 하며 이를 재밋거리로 삼았다. 강지연은 정직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점점 효무제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효무제가 왕승랑에게 아들인 왕경문을 조롱하도록 명하자 강지연은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 이런 희롱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자 효무제는 분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승안은 어리석고 못난 사람인데 그런 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서로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강지연은 이 말을 듣고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고 이로 인해 효무제는 강지연을 매우 냉대했다. 강지연은 뒤에 신안왕(新安王) 유자란의 장사, 남동해(南東海) 태수로 전출되고 영삭장군(寧朔將軍)이 더해졌고 남서주(南徐州)의 사무를 대행하였다.

462년, 효무제가 총애하는 숙의 은씨가 죽자 효무제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숙의 은씨의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했다. 이때 강지연은 '회(懷)'라는 시호를 건의했는데, 효무제는 이 시호가 은씨를 기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호라고 생각해서 강지연을 매우 원망하였다.[1] 이후 효무제가 남산(南山)으로 거둥하고 은씨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당시 신하들이 말을 타고 효무제의 뒤를 따랐는데, 효무제는 말채찍으로 무덤의 기둥을 가리키며 강지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위에 회(懷)라는 글자를 넣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강지연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결국 463년 근심 속에 죽었다.
[1] 시법에서 회(懷)는 '자비롭고 어질지만 짧게 살다 죽다', '지위를 잃고 죽다' 등 동정의 의미로 올리는 시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