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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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colbgcolor=#3f51ba><colcolor=#fff> 王球 왕구 | |
성 | 왕(王) |
이름 | 구(球) |
자 | 천옥(倩玉) |
생몰 | 393년 ~ 441년 |
부친 | 왕밀(王謐) |
조부 | 왕소(王劭) |
본관 |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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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당시 유송의 관료로 자는 천옥(倩玉).2. 생애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을 본관으로 하는 낭야 왕씨 출신으로 동진의 명재상 왕도의 증손이었다. 부친인 왕밀은 사도를 지냈다.왕구는 왕혜와 더불어 명성이 있었으며, 용모가 준수했고 행동거지가 단정했다.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대사마(大司馬) 사마덕문의 참군이 되었고 주부(主簿)로 전임되었으며, 예장공세자(豫章公世子) 중군장군 유의부의 공조(功曹), 세자사인(世子中舍人)을 역임하였다.
420년, 유유가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였다. 왕구는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 의도왕우(宜都王友)를 역임하고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전임되었다가 병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427년, 의흥태수(義興太守)로 기용되었다. 사촌형인 왕홍이 양주(揚州)로 부임할 때 유복친이 지방관으로 부임할 수 없는 관례에 따라 왕구는 선위장군(宣威將軍)이 더해졌다. 왕구는 의흥에서 관대한 시정을 펼치다가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로 전임되었다. 이후 왕구는 입조하여 시중(侍中)이 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을 겸임하다가 다시 양주 대중정(大中正)을 겸임하고 중서령(中書令)으로 전임되었다.
왕구는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는데, 이부상서를 맡을 때는 손님을 잘 받지 않았고 벼슬을 구하는 서신도 보지 않았지만 관리를 선발할 때는 순서가 있어서 조정 내외의 사람들이 왕구를 칭송하였다. 왕구는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엄격하고 고귀한 성품이었으며, 다른 사람과 교유하지 않았고 연회를 베풀지 않았으며, 문중에는 다른 손님들을 들이지 않았다.
상서복야(尙書僕射) 은경인과 영군장군(領軍將軍) 유담이 모두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왕구는 비록 이들과 혼인관계에 있었지만 왕래는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왕구는 문학을 애호해서 안연지와 서로 친하게 지냈다. 왕구는 뒤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옮기고 금장자수(金章紫綬)를 수여받았으며, 여릉왕사(廬陵王師)를 겸임하였다.
왕구의 조카인 왕리(王履)는 품행이 불량했고 재물을 탐내며 유담과 결탁했고 또한 대장군 팽성왕(彭城王) 유의강에게 아첨하여 유빈(劉斌), 공윤수(孔胤秀) 등과 함께 다른 뜻을 품기 시작했다. 왕구는 매번 왕리를 훈계했지만 왕리는 왕구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리는 대장군부 종사중랑(從事中郞)를 지냈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전임되었는데, 유의강에게 떠나기 싫다고 눈물로 호소해서 다시 종사중랑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제 유의륭은 왕리를 원망했다.
유담이 주벌된 뒤 왕리가 맨발로 왕구에게 찾아오니 왕구는 왕리에게 신발을 가져오라고 명했으며, 데운 술을 왕리에게 대접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소에 네게 했던 말이 어땠는가?
왕리가 두려워서 대답을 못하니 왕구는 천천히 다시 말했다.
아버지가 계신데 네가 무엇을 근심하느냐?
왕구는 잠시 후 주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를 방까지 부축하라.
문제 유의륭은 왕구의 행동을 참작하여 왕리의 사형을 면해주는 대신 가택연금시켰다.
440년, 왕구는 다시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은경인이 죽은 뒤 상서복야에 제수되었다. 은경인은 본래 다리에 병을 앓고 있었는데, 녹상서사 강하왕(江夏王) 유의공과 상서복야 하상지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유의공: 지금은 재능 있는 선비들이 부족하니 신하들이 더욱 힘을 써야하는 법이오. 하지만 왕구는 이렇게나 오만방자하니 법에 따라 왕구를 탄핵해야 할 것이오.
하상지: 왕구는 소박한 지조를 지닌데다가 병이 많습니다. 왕구에게는 담담하게 물러나도록 요구해야지 문서에 대한 일로 왕구를 꾸짖을 수 없습니다.
하상지: 왕구는 소박한 지조를 지닌데다가 병이 많습니다. 왕구에게는 담담하게 물러나도록 요구해야지 문서에 대한 일로 왕구를 꾸짖을 수 없습니다.
결국 유의공의 뜻에 따라 왕구는 면직된 상태로 복야를 겸임했다. 신하들 중에는 문제의 회견에 불려가지 못한 이들이 많았는데, 지위가 낮거나 소원한 이들은 수십 일이 걸렸고, 십여 일이 지나도 회견에 불려가지 못한 대신들이 많았다. 다만 왕구는 종종 자리를 떴고 기다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왕구는 441년에 죽어서 특진(特進),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왕구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왕환(王奐)을 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