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三 | 跪 | 九 | 叩 | 頭 | 禮 | |||||
석 삼 | 꿇어앉을 궤 | 아홉 구 | 두드릴 고 | 머리 두 | 예절 례 |
'삼배구고두례'[1]도 같은 말이다.
인터넷 등에서 '삼배구 고두례', '삼궤구 고두례' 등으로 띄어쓰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애초에 원문인 한문이 통째로 한 단어이므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것이 맞으며 굳이 띄어쓰기를 하겠다면 '삼궤'(세 번 무릎을 꿇어앉고)[2] '구고두'(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례'(예법)로 쓸 순 있을 것이다.
2. 역사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몸을 굽힘으로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히는 것을 드러내며 예를 표하는 인사법으로, 이런 기본적인 요소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존재했다. 다만 삼궤구고두례는 인사 한번 하는데 상하관계를 극심하게 강조하여, 전근대 동양의 예법 기준으로도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 특징이다.중국 역사에는 집안 어른이나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고두례'라는 인사법이 있었는데, 명나라 건국 뒤로는 황제에 게 올리는 예법으로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가 새로 생겼다. 이 예법은 무릎 꿇고 절한 뒤 일어서기를 다섯 번 하되, 마지막 절에서 이마를 땅에 세 번 가져다 대는 형식이었다.[3][4]
만주족이 후금을 세우고 후에 청나라로 변모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자칭하자, 명나라의 오배삼고례를 청나라가 받아들이면서 상하관계를 더더욱 강조하는 삼궤구고두례를 만들어 청 황제에게 올리는 예법으로 삼았다. 절하는 횟수는 줄이되 고두하는 횟수는 많이 늘렸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서 9는 극양(極陽)의 숫자라 하여 황제의 상징으로 삼았다. 삼배구고두례를 제정한 이들은 오배삼고례보다 황제의 존엄함을 잘 드러내는 예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이 예법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으나, 현대에도 부처나 도교의 신령에게 올리는 예법으로서는 살아남았다.
3. 방식
훨아라 하판(hvlara hafan)[5]이 넣는 구령에 따라 시행한다. 원래는 만주어로 구령을 넣는 것이 예법이었으나, 점차 한화되면서 관화 중국어로도 구령을 넣게 되었다.1. "파이다(faida, 정렬하라, 排列)"라는 명령에 자리를 잡고 선다.
2. "냐쿼라(niyakvra, 꿇어앉아라, 跪)"라는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3. "헝킬러(henkile, 조아려라, 叩頭)"라는 명령에 양손을 바닥에 두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린다.[6]
4. "일리(ili, 일어나라, 起)"[7]라는 명령에 무릎을 펴고 일어난다.[8]
여기까지가 한 세트. 이것을 3번 반복한다. 즉,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2. "냐쿼라(niyakvra, 꿇어앉아라, 跪)"라는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3. "헝킬러(henkile, 조아려라, 叩頭)"라는 명령에 양손을 바닥에 두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린다.[6]
4. "일리(ili, 일어나라, 起)"[7]라는 명령에 무릎을 펴고 일어난다.[8]
현대 한국에서는 웃어른께 1배, 죽은 어른께 2배, 부처께 3배[9]가 그나마 일상에서 접해본 인사법인지라 9번 절하는다는 것에 "이것은 인사법이 아니라 항복의식이다!"라는 인식이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해이며, 조선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할 때 조선인들이 느낀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 그냥 맨땅에 해딩 수준으로 삼궤구고두례가 끝난 후 인조의 머리에 선혈이 가득했다, 혹은 인조가 머리를 바닥에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태종에게 들릴 때까지 행했다 등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다. 이는 한자 叩에 "두드리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로 보인다. 叩頭의 叩에는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두드린다는 의미는 없으며,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면 된다.
4. 사례
청나라엔 300년간 황제 12명이 재위했고, 황제들은 신하를 접견할 때 당연히 삼궤구고두례로 인사를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사례를 나열할 수는 없다. 그나마 이와 관련한 유명 에피소드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강희제는 남방을 순행하는 도중에 다섯 번이나 주원장의 무덤인 명효릉을 참배하며 삼궤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지금으로서는 대단한 파격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대명국을 범한 이자성과 그 잔당들을 토벌한 우리 대청국이 대명국을 계승한다'는 게 주된 프로파간다였으므로,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의 무덤을 이를 계승한 청나라의 황제가 신하의 예로서 참배함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랫사례들과 달리 강희제 입장에선 주원장은 어차피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계승한다는 정치적 퍼포먼스였기에 꺼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 건륭제 시절(1793년) 영국사신 매카트니와 애머스트가 건륭제와 대면할 때 청나라 측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하라고 하자 "서양에선 신에게만 두 무릎을 꿇고, 임금에게는 무릎 하나를 꿇는 게 전부다."[10][11]라거나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들은 "차르의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며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하려 했지만, 청나라는 싸그리 무시하고 삼궤구고두례를 강요하기도 했다. 당연히도 매카트니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영국과 청나라의 외교는 나중에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패배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고로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리치먼드를 방문했을 때 그곳 흑인들이 무릎을 끓자 링컨은 "이래서는 안된다. 무릎은 신 앞에서만 끓어야 한다"라고 한 일이 있다.)
- 위 사건 이후 시간이 지난 뒤 이에 대한 일화는 서양에서까지 크게 퍼졌고 네덜란드의 사신들은 건륭제를 찾아올 때 그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하사한 포도송이가 담긴 은쟁반을 향해서도 머리를 조아리며 지나치게 예를 표했다. 이는 네덜란드의 입장에서 체면보다는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서 생기는 이득이 우선되었기 때문인데, 청나라측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꿰뚫어봤고[12] 결국 네덜란드 사신은 후하게 대접받은 것과는 별개로 무역 허락은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 역으로 의화단 운동이 끝난 후 독일에 사죄사로 파견된[13] 순친왕 재풍의 수행원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삼궤구고두례로 사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는 독일측이 청나라에 굴욕을 줄려고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두가 유럽 외교가에서 전제군주에 대한 야만적 복종행위로 여겨져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청나라에서도 외국 사절들에게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게 된 상황이었기에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독일도 수행원들에게만 요구했지 재풍에겐 그런 막 나가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독일 외 다른 8개국은 고두의 정치적 의미에 주목하여 독일이 중국을 단독으로 복종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반발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고두의 종교적인 의미에 집중하면서 중국인들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기독교도인 카이저가 받아서도 안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결국 중국 사절단은 카이저에게 훈장을 수여받은 적이 있는 음창에게 통역을 맡기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서 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은 고위 사절들을 대거 배치하여 이들에게 고두를 막무가내로 요구할 수 없도록 배수진을 쳐버렸다. 결국 전세계 언론의 비난 속에서 카이저는 결국 재풍과 음창만 자신을 알현하도록 지시하여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이에 독일 언론에서는 중국인들에게 졌다고 독일인들이 중국인들에게 고두하는 자학 만평이 쏟아냈을 정도로 황제의 체면을 구겼다.
- 영어로는 '고두'의 광동어 발음을 음차한 'kowtow'라는 단어로 소개되었으며, 상대에 대한 굴종(grovel)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일본에서 도게자를 한다거나, 한국에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것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 청대의 풍습이므로, 그 이전의 작품에서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식의 예를 황제에게 보이는 건 재현 오류이다. 이 같은 점은 중국인들도 의외로 잘 모르는 모양으로, 왕샤오레이(王曉磊) 같은 프로 작가도 <삼국지 조조전> 같은 작품에서 조조가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당연히 오류이다. <조조전> 말고도 수많은 중국 영화들이 이 덫에 걸린다.
- 한가지 재밌는 일화로 1982년, 영국령 홍콩 반환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던 마가렛 대처 수상은 당시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회담을 마치고 회담장이었던 인민대회당을 나오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모습이 딱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화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라서 덩샤오핑은 대처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이 사진과 영상을 중국 언론에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홍콩과 영국 기자들에겐 당연히 알바 아니었으므로 전 세계에 이 굴욕짤이 퍼지고 말았다. 홍콩에서는 이를 두고 영국 수상이 마치 중국에 굴복한 것 같다고 불안에 떨었는데, 매카트니 이후로 드디어 영국 사절이 중국 황상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했다는 블랙 유머가 퍼지기도 했다.
[1] 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2] 혹은 '삼배'(세 번 절을 하고)[3]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연산군 때까지만 해도 이를 사배삼고두나 오배일고두로 대체했는데, 명이 번국에 내린 『번국의주(藩國儀註)』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조선은 오배삼고례가 굴종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아 거부해왔던 듯하다. 다만 중종은 그 당시 명과 조선의 정치적 위치와 종계변무 분쟁까지 겹치면서 오배삼고례를 하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명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이는 계승되었다.[4] 『번국의주(藩國儀註)』는 『대명집례(大明集禮)』 내에서 번국에 대한 사항만 따로 발췌하여 인쇄한 책자인데, 고려의 요청으로 명이 인쇄하여 보낸 책이었다. 이는 왕조가 바뀐 조선조에도 계승되어 대명외교의 기본 지침이 되었다. 정작 명 사신 중에는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도 있었고, 중국 사서에도 이 책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하니 철저히 대외용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지 않는다.#[5] '소리치는 관리'라는 뜻. 한림원에서 근무하던 시독학사(侍讀學士)를 만주어로 이르는 말이었다.[6]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이런 식으로 고두한다. 다만 꿇어앉을 때의 구령을 그냥 '어무(하나), 주어(둘), 일란(셋)'으로 넣는다는 점이 다르다. 나중에 만주족의 한화(漢化)가 좀더 진행된 이후로는 고두 횟수에 따라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라는 구령을 일일이 구분해 넣었다.[7] 흥(興)이라고도 했다.[8]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유일하게 알던 만주어인 "일리(일어나라)"는 여기에서 온 것이다.[9] 흥미롭게도 홍타이지는 부처에게 불공을 드릴 때에도 삼배구고두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가장 높은 수준의 예를 올린 것이다.[10] 실제로 서양인들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신분 차이를 뒤로 하고 같은 '인간'에게 두 무릎을 모두 꿇거나 머리를 여러 번 조아리는 것이 '동양의 미개한 풍습'이라고 생각해오며 이에 대해 모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신하들한테 엎드려 절을 하는 페르시아식 예법을 하라고 강요하자, 분노한 신하들이 대왕을 죽이려는 반란 음모를 꾸미다 적발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이는 인간 취급도 못 받는 노예라면 모를까 왕과 신하 사이의 관계라곤 해도 동양의 미개한 풍습을 강요하기를 매우 꺼렸기 때문이었다.[11] 우습게도 현대에도 비슷한 게 있다. 바로 태국인데 국왕에게 무릎을 끓어야 하는 것. 문제는 2004년에 방콕 국제 영화제에 참가하여 공로상을 받게된 올리버 스톤에게도 왕이 상을 줄 때 이런 요구를 하여 분노한 스톤은 시상이고 뭐고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당연히 영화제 측도 세계적 망신이 될테니 낭패였고, 결국 고민 끝에 계단에서 좀 내려간 상태로 받는 것으로 서로 합의했다. 이 영화제는 2008년 뇌물 및 온갖 논란으로 영화제가 사라져 나중에 방콕 태국 국제영화제라는 새 이름으로 1회부터 다시 열렸고 2021년에 7회 영화제가 개최되었다.[12] 애초에 외국 사신에게 이런 방침을 강압적일 정도로 요구한 것부터가 감히 황제가 있는 청나라가 다른 나라와 공평하게 무역을 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청나라의 의사표명이었다. 청나라는 애초에 공평한 위치에서 무역할 생각이 결단코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어디까지나 이전까지 유지된 조공무역만 인정했다.[13] 무려 사죄사까지 보낸 이유는 의화단원에 의해 주중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 남작이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대사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파견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공사가 주재국 외교사절의 으뜸이었다. 현대로 치면 그 나라 주재 대사가 살해당한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