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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22:57:37

삼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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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비판4. 세종실록지리지에서5. 같이보기

1. 개요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와 전후삼한고를 통해 주장한 학설.

삼조선과는 별개로 상나라(은나라)의 존재가 갑골문을 통해 실존했음이 확인되며 신화가 아닌 역사로 편입됨에 따라 고조선 또한 실존국가임이 확정되었다.
또한 요하문명(고조선 지역)이 황하문명보다 최소 1,000년을 앞선 문명임이 유물들이 발굴된 지층과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상나라가 실존역사임이 확정되며 상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상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왕해 또한 실존인물로 확정되었는데, 산해경에 기록되길 이 왕해가 도주하여 힘이 없었을 때, 하백에게 의탁하여 힘을 길러 상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있어 당시 황하 유역의 지배자를 하백으로 불렀음이 확인되었다. 하백을 외조부로 뒀다는 고주몽의 기록이 단순히 신의 손자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 실존인물의 손자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졌다.
당시 해(海)는 지금의 바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매양 매+물수 변으로 항상 물이 존재하는 곳. 즉 큰 강이나 호수 등을 모두 海라고 불렀다.(이 예 중 하나가 황하를 부르는 명칭들을 정리한 내용 중 간략하게 海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되어있다.) 또한 천원지방의 세계관 인식을 통해 화하족의 문화권 밖을 海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장성의 시작이 갈석산임과 한나라와 명나라 시기 장성을 어디까지 확장했다는 기록을 역산 및 진장성의 시작이 갈석산이라는 기록을 보면 삼조선의 영토였다고 추정되는 중원까지의 영토는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한반도까지 진장성이 있었다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 <조선사>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집단이 사실상 중국의 동북공정사업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대학교수 및 주류사학자들이 식민사관 <조선사> 내용이 식민사관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이용하여 동북공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과거 중국 왕조들의 영토가 더 넓었다고 주장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물론 식민사학자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건 역사왜곡 서적인 <조선사>내용과는 상관없는 식민사관이 아니라고 말장난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식민사관 <조선사>의 내용과만 일치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진나라와 한나라 사서인 진서와 한서의 진나라와 한나라 영토를 기록보다 확장하고 한서의와 소설 연의가 아닌 정통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 상의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기록만 봐도 대륙에 존재하는데, 이를 반도로 축소 왜곡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시기의 국가인 당나라의 사서인 구당서의 내용만 보더라도 당나라는 백제의 신하국으로 백제의 사신을 맞이할 때 신하국의 예로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 권199 ‘동이열전’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정관 15년(641년) 장(璋)이 죽자 그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받들고 상을 고하자 당왕, 이세민이 소복을 입고 통곡했다(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 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
즉 당나라에서 백제 무왕이 죽어 사신이 이 소식을 전하자 사신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는 신하국의 예를 갖췄다는 의미다.

많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당나라를 한족의 국가로 착각하고 있지만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한 갈래인 선비족의 국가로 고구려와 백제는 우리가 북방유목민족으로 분류하는 모든 세력과 번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말이 같았다고 기록되고 있다.(신라는 동쪽 변방에 있어서인지 선비 등과 대화할 때 백제나 고구려의 번역을 통해 소통했다고 되어있다. 아마 방언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삼국과 고려가 반도국가라는 헛소리나 북한의 평양이 고구려, 고려시절 평양이라는 주장은 현 대한민국 지역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있다는 헛소리와 다름없다.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낙랑군 남쪽에 갈석산이 있고 그 갈석산 남쪽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있기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갈석산을 북방을 수호하는 영산으로 여겨 황제가 매해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진서와 한서에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진서와 한서 모두 황제가 갈석을 북방을 수호하는 영산으로 여겨 황제가 매해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과 갈석을 지나면 낙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낙랑군이 후에 평양으로 지명이 바뀌었다.(이 점은 어느 쪽이든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기록을 합친 결과물이다.

고로 한반도 평양은 낙랑군이 될 수 없다.
북한이 낙랑군이었다=고구려, 고려시절 평양이었다라는 갈석산을 넘어가면 낙랑군+갈석산은 북방을 수호하는 영산이라는 내용상 북한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면 대한민국 위치에 진나라와 한나라가 있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런 얼토당토하지않은 사기를 칠 수 있는 것은 이병도가 광복이후 이 북한평양 낙랑군설(이병도의 대표적인 주장)을 대한민국의 학술원 부회장과 회장으로 지내면서 식민사관이 아닌 논문은 전부 통과시키지 않고 학위발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병도 생전에 대한민국에서는 식민사학자들만 사학과 학위취득과 논문통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30년 넘도록 식민사학자들만 교수가 되었다는 의미다.

또한 우리가 역사에 관심있다고 해도 발간되어있는 책을 찾아보거나 유튜브를 검색해보는 정도에서 그치지 정부기관인 역사편찬위원회에서 우리역사가 수록된 동아시아의 모든 역사서적을 전산화하여 원문과 번역을 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검색만 해보더라도 진위여부를 확실하게 확인가능하다.

다만 이 역사편찬위원회의 구성원들도 식민사관을 가르치는 교수 아래서 수학했기 때문에 번역내용 중 지명에 관한 점은 원문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닌 식민사관 하의 지명으로 치환하여 번역한 경우가 많다.

요즘은 번역프로그램의 정밀도가 매우 향상됐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번역기에 돌려만 봐도 역사편찬위원회의 구성원 중 식민사학자가 번역한 지명이나 내용을 모두 직역줘서 이런 오류들을 쉽고 빠르게 확인가능해졌다.

2. 설명

신채호는 상고사에 대해 종래와는 완전히 독자적인 학설을 폈다. 단군조선이 대단군진한이 중앙인 진조선을 다스렸고 부단군인 마한변한이 각각 변방인 막조선과 번조선을 다스렸다고 했다. 막조선의 영역은 만주 남부와 한반도이며, 번조선의 영역은 난하 일대에서 요동까지, 진조선은 하얼빈을 포함한 북만주 일대를 다스렸다고 했다.

3. 비판

하지만 단재는 삼조선이 존재했었다는 실증 근거를 조선상고사에서는 제시하지 않고 전후삼한고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그 근거가 관련 사서의 한문을 오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해당 구절을 보면,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 《사기》 조선열전
(일찍이 연나라의 전성시대에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에 붙은 주석으로
"燕嘗略二國以屬己也"
(연나라가 일찍이 두 나라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라는 말이 원래는 "진번조선을 공략하였다"라고 해석해야 당시의 시대상[1] 등을 보았을 때 말이 맞는데, 이걸 그만 "진·번조선을 공략하였다"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삼조선설은 사실상 여기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단재의 삼조선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삼조선설에서 신채호는 기자조선을 번조선의 왕조로 보았으며, 위만조선 역시 기자조선을 잇는 번조선의 한 왕조로 보았다.

4. 세종실록지리지에서

...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中.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삼조선이 나온다. 전조선(단군조선), 후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을 하나로 묶어 부르는 말로, 신채호의 삼조선설과는 아주 다른 개념이다.

5. 같이보기



[1] 연나라의 전성기, 이 때 고조선은 연나라에 패해서 많은 영토를 잃고 주요 근거지 또한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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