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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22:40:28

사디스틱 미카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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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黒船(쿠로후네).[1]

1. 개요2. 바이오그래피3. 후일담4. 디스코그래피

1. 개요

Sadistic Mika Band, サディスティック・ミカ・バンド

일본의 락밴드, 약칭 SMB. 1970년대 일본 록의 태동기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로 거론된다.

멤버는 카토 카즈히코(기타, 보컬), 카토 미카(보컬), 타카나카 마사요시(리드 기타), 타카하시 유키히로(드럼), 오하라 레이 - 고토 츠구토시(베이스), 이마이 유(키보드). 멤버들 하나하나 면면이 일본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거물들이었다.

2. 바이오그래피

대학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ザ・フォーク・クルセダーズ)'로[2] 맹위를 떨쳤던 '카토 카즈히코'와 그의 아내 '카토 미카'(결혼전 이름 후쿠이 미카)[3]를 주축으로 1972년 결성된 밴드로서, 영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을 짙게 띄는 밴드다. 밴드 이름은 영국 물 좀 먹었던 출신답게 존 레논오노 요코의 사이드밴드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이름을 꼬아서 만든 것. 여기에 남편이 아내 이름을 향해 사디즘스럽다는 다소 장난어린 표현을 붙여 탄생한 이름이다.

주축 멤버 둘 외에도 기타리스트 타카나카 마사요시, 드러머 타카하시 유키히로[4], 베이시스트 오하라 레이,[5] 키보디스트 이마이 유 또한 각 분야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졌던 뮤지션들로 유명했고, 슈퍼밴드 뺨치는 이들의 탁월한 연주력들은 훗날 일본 밴드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일본 최초의 글램 록 밴드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연주 측면에서는 일본 대중음악 초창기에 훵크 장르를 섭렵하고 널리 알린 밴드 중 하나이면서, 음악적 측면에서는 간결한 음악 속에서도 재즈나 프로그레시브 록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여러모로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토킹 헤즈가 생각나는 대목.

대표곡 중 하나인 Suki Suki Suki
영국에서 Old Grey Whistle Test에 출연한 영상

이들의 공로는 연주력에도 있지만, 사실상 최초로 영국에서 이름을 떨친 아시아 밴드임에도 의의가 크다. 특히 74년 이래로는 영국의 명프로듀서 크리스 토마스[6]의 지원을 한몸에 받으면서 곡을 발표하기도 하는데, 이들의 역작 쿠로후네(黒船)는 영미권에서 발매되었다는 앨범으로도 유명하다. 영국에서 굵직한 공연도 펼치면서 서서히 인지도를 올려가다 아시아인 최초로 웸블리 스타디움에도 서보는 영예까지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크림, 야드버즈 등의 슈퍼밴드들의 말로가 그렇듯이, 이들 또한 3년 남짓한 짧은 수명만을 겪고 단명하게 된다. 결성된 뒤로 짧은 시간동안에도 멤버 교체가 몇번 존재해왔다 1975년 카토 미카가 프로듀서 크리스 토마스와 외도를 한 것을 계기로 주축이었던 카토 부부의 이혼이 결정타가 되어 둘은 밴드를 탈퇴하고, 구심축을 잃은 밴드는 사실상 해산하게 된다.희대의 NTR

카토 부부를 제외한 남은 멤버들끼리는 '사디스틱스'라는 이름으로 바꾸며 밴드를 연명시켜왔지만, 이마저도 멤버들의 솔로 및 사이드 활동에 밀려버린 나머지 1980년을 전후로 즈음 사실상 와해되었다.

3. 후일담

비록 3년으로 끝나버린 밴드였지만, 이들의 연주력은 어디가질 않아서 각자도생한 멤버들은 일본음악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타카나카 마사요시는 일본내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이어가면서 명성을 쌓아가는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드러머 타카하시 유키히로는 밴드를 떠난 직후 핫피 엔도호소노 하루오미와 떠오르는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라는 또다른 전설을 결성하면서 특유의 비트감을 일렉트로닉에 이식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미카를 제외한 전성기 멤버들끼리 훗날 몇차례 재결성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나가기도 하는데, 단순히 라이브 위주의 재탕 목적이 아닌 신보를 내는 엄연한 활동 재개였다. 재결성할 때마다 게스트 여보컬을 영입하면서 이름의 미카 부분을 게스트의 이름으로 치환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데,[7] 게스트들만 봐도 마츠토야 유미, 키리시마 카렌, 키무라 카에라 등 쟁쟁한 여보컬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밴드를 떠났던 카토 미카는 탈퇴 이후로는 밴드와 접점은 일절 없는 상태며, 크리스 토마스와도 결국 이혼한 뒤 음악계에서는 손을 뗀 채로 런던에 거주하며 요리 연구가로 평범한 삶을 지내고 있다. 그래도 뮤지션으로서의 명예는 남아있는지 배드핑거의 'No One Knows'의 일본어 나레이션을 맡기도 했으며, 1994년자로 솔로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로부터 나레이션 제안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으나, 본인이 거절했고 나레이션은 '히로타 미치'로 대체된다.[8] 폴 매카트니 가족과 친해서 1980년대 매카트니가 내일했다가 대마초 소동이 터졌을 당시에도 같이 동행했다고 한다. 반면 카토 카즈히코랑 사망 당시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재결성 당시 부르지도 않았다며 재결성에 대해서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9]

밴드 구심축이던 카토 카즈히코가 2009년 자살로 세상을 떠남으로 밴드의 완전체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타카하시 유키히로 또한 2023년자로 별세.

4. 디스코그래피


[1] 후술할 동명의 앨범 黒船에서 3부로 수록되었는데, 그중 3탄이다.[2]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북한노래 임진강을 일본식으로 번안해 부르던 밴드로도 유명하다.[3] 원래 포크 크루세이더 팬이었다가 카즈히코에게 기타를 가르쳐달라며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4] 본래 츠노다 히로가(잭스의 드러머로도 활동했고 'Mary Jane'이란 히트곡을 먼저 발표하던 보컬리스트로도 유명) 드러머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지만, 개인 활동을 위해 탈퇴하고 몇번에 멤버 교체 끝에 1집 데뷔 시점부터는 신인 드러머 타카하시가 고정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훗날 활동하는 YMO의 신스팝에 맞게 절제된 분위기와는 달리 SMB에선 프로그레시브풍 기교가 절륜히 들어간 드러밍이 인상적.[5] 핫피 엔도스즈키 시게루와 '스카이(スカイ)'라는 밴드에서 한솥밥을 먹던 인연이 있던 세션이었다.[6]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배드핑거, 섹스 피스톨즈, 펄프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 그 자체인 밴드들의 프로듀싱을 맡은 인물이다. 다만 미카 밴드 프로듀싱 당시엔 조금 이름 알린 정도의 수준이었다.[7] '사디스틱 유밍 밴드'(마츠토야 유미), '사디스틱 미카엘라 밴드'(키무라 카에라) 등.[8] 히로타 미치는 스파크스의 1974년작 Kimono My House 앨범 커버에 등장하기도 했다.[9] 음악활동 자체를 그만두지는 않았기에 1997년 타카나카 마사요시의 게스트 보컬로 나오거나 마츠토야 유미가 보컬로 있던 시절 게스트 보컬로 출연한것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어느 정도의 친분은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인데 엄청나게 후덕해졌다(...). 곡은 동일하게 타카나카 마사요시의 곡인 タイムマシンにおねがい(타임머신에게 부탁해). 이외 YMO 활동 당시 타카하시 유키히로를 방문해 녹음하는 모습도 보여 카즈히코 제외한 다른 밴드 멤버들과는 양호한 사이였던 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