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샤를리 엡도 총격 테러에 대한 대한민국 언론의 반응을 다루는 문서.2. 상세
서방과 달리 한국 언론에서는 양비론적인 반응을 많이 보였다. 진보 진영 언론에서는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을 "서방의 이슬람에 대한 공격, 테러는 그에 대한 반격"으로 받아들였으며 보수 진영에서는 과도한 표현의 자유가 불러온 참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언론의 반응은 언론사 각각의 정치 성향에 따른 편집 방향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반사실적 가정의 오류 내지 연쇄반응의 오류에 매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론의 작태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부재로 오류 덩어리 논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한국 일반 여론이 이 사건에서 테러리즘의 피해와 해악성에 대한 논점을 흐림과 동시에 테러리즘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다만 이러한 접근을 비판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겨례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9.11이라는 비유를 인용한 바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사건 직후 샤를리 엡도를 비판하다가 비난받은 사례도 언급했다. 이 사건 전후의 서방과 이슬람 양측의 발언들을 꺼내놓고 분석하는 논평들도 나왔다. 프랑스나 서방 사회가 담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과 이 테러를 연계하고 그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한 것이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내용마다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 논평들은 서방 사회의 반이슬람 정서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의 연쇄 작용에 주목하고 분석하고 있다. 샤를리 엡도가 언제부터 풍자를 했는가를 살펴보자. 서방의 이슬람과 반이슬람 정서는 여러 세대를 넘어서 충돌했다. 만일 단순히 정말 샤를리 엡도나 이슬람 극단주의만의 문제였다면 이 사단은 벌써 오래전에 벌어져야 했다. 헌데 샤를리 엡도는 풍자를 항상 열심히 내놨고 이슬람 극단주의도 여태까지는 화염병을 던지는 개별적인 테러 정도로 비교적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터진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사단이 벌어졌는가? 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이러한 반응이 나온 원인을 살펴보자면 샤를리 엡도가 보여준 수준의 표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엇비슷한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는 최지룡이나 홍성담, 그리고 일베저장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미 주류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큰 차이가 있다면 샤를리 엡도는 기본적으로 주간지다 보니 다루는 소재가 다양하고 풍자 그 자체에 꽤 공을 들이며 편향성을 보여주는 위 인물들과 단체와 달리 좌우와 종교 구분 없이 모두 풍자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고정된 패턴과 특정 성향을 드러내는 세 사례와는 거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실 이쪽 저쪽 다 깐다고 해서 한쪽만 까는 것과 꼭 다르게 취급해 줄 이유는 없다. 이쪽 저쪽 깔 때 다 편향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1] 히틀러가 좌우를 다 깠다고 해서 히틀러가 균형잡힌 사상을 지녔던 것도 아니고 좌우에서 다 까였다고 해서 정당성을 얻는 것도 아니듯이 말이다. 다만 샤를리 엡도는 표현의 수위를 제외하고 풍자의 의도만 보면 분명 진보적인 면이 있으며 크게 틀린 말을 한 것은 없는 편이다.
3. 수위에 대한 허용 논쟁
문제는 표현의 수위이다. 또 하나는 디시식의 조롱을 넘어서 부조리를 잘 다루어낸 질 높은 풍자인지 여부의 문제도 있다. '샤를리 엡도=프랑스판 일베'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2] 풍자의 질과 성향을 제외하고 과격성만을 따지자면 한국에서도 최지룡, 홍성담 등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을 보면 실정법상 샤를리 엡도 같은 언론사가 존재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 다만 도덕적 엄숙주의가 강하고 정치적 편가르기가 일상화되어 있는 한국에선 풍자나 개그가 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성적 요소가 들어가면 더욱 민감성이 높아진다. 더 나아가서는 작가나 기자의 사상과 인격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쉬쉬할 뿐이다. 소위 말하는 국민감정이 이런 걸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사우스 파크 등의 매체에서 예수나 교황 등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면 대개는 기독교 단체의 항의 정도로만 끝나고 무함마드 등의 이슬람 관련 인물을 건드리면 테러 협박 내지는 실제 테러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교회 애들은 징징대기만 하는데 너네들은 왜 그러냐?" 는 의견을 보이는 사람들을 두고 이슬람이 사회적 비주류인 서양, 한국의 인식에 기반한 이기적인 논지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서구권은 정교분리 이후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폭넓게 인정했고[3] 그와 동시에 표현의 자유에 큰 가치를 둔다. 웬만한 종교에선 큰 죄로 단정짓는 무신론도 다른 종교와 서로 공격만 하지 않으면 큰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샤를리 엡도가 그 서방에서도 거부감을 보일 정도로 매우 강도 높은 수위의 풍자를 하는 언론사인 것은 맞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서구권이다. 한 이슬람 유명 인사의 말대로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부모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는 걸 왜 이해하지 못하냐고 부르짖을 순 있다. 하지만 이건 반대로 서구권이 이룩해낸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를 종교의 이름으로 억누르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걸 옹호한다는 건 결국 특정 종교에게 비판받거나 풍자되지 않을 신성불가침을 특별 적용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특정 종교 역시 샤를리 엡도와 같은 공격적인 만평에 대해 대응할 권리는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적으로 용인되는 선에 국한되어야 하며 그 선을 넘어 사적 보복의 형태로, 그것도 살인을 동반한 테러의 형태로 나타날 경우 모욕의 자유에 대항할 권리가 아닌 폭력으로 자유를 틀어막는 것이 된다.[4]
한국인 수니파 이슬람 전도사가 1월 25일에 올린 동영상(☞, ☞)들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할 건 자극적 만평이 과연 표현의 자유냐는 것에 있다. 전술한 것처럼 샤를리 엡도는 프랑스판 일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그 자극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란 상대방의 모욕을 용인한다는 의미가 될 수 없으며 실제로 한국은 모욕죄로 실형 선고가 가능한 나라이다. 샤를리 엡도의 만평이 표현의 자유라면 노무현 대통령 합성 사진도 표현의 자유가 된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여성의 입장에서는 차마 듣기 힘든 조롱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가 된다. 일베에서 창작된 자료들이 세간에서 문제가 된 사례가 여럿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표현의 자유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지켜져야 한다.[5] 특정 종교에 대한 비판적 기사만 걸러진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되겠지만 샤를리 엡도에서 문제가 된 것도 기사의 논조가 아닌 만평의 자극성이었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한국 언론이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기사 역으로 말하자면 그간의 한국 언론, 한국 사회 자체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찰을 해 온 적이 거의 없다는 반증도 될 것이다.[6]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을 말하며 샤를리 엡도가 잘못했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것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의견도 있다. 첫째로 그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는 풍자 따윈 불가능하다. 둘째로 정치적 신념 역시 존중받지만 그렇다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풍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특정 정치인 A가 열렬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풍자한다면 그 지지층은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불쾌해하는 지지층이 있다고 성역을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정치인은 누군가의 자식일 것이고 누군가의 부모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정치인을 풍자하는 것이 그 가족들에게 테러의 빌미를 제공하는가? 이슬람에 대한 풍자 역시 마찬가지다. 풍자에 대해 화는 낼 수 있고 시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거기에 욱해서 테러하는 것, 더 나아가 테러당한 자에게 테러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행위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샤를리 엡도에 문제가 있다는 측의 의견은 다르다. 테러는 용서받지 못할 행위이고 어떤 것도 거기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지만 문제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에 있다. "빌미를 제공"했다는 뜻은 샤를리 엡도가 더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잘못은 분명 테러리스트들에게 있으나 테러리스트도 한편으로 '피해자 흉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왔듯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조롱까지 포함해야 되냐는 것에는 의견이 다분함에도 상대방이 신성시하는 존재를 (비판이 아닌) 조롱한 것은 이성적 행동이 아닌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신성시한 자들의 공격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풍자의 딜레마와도 같다.
"약자"라는 표현에 의문을 표하는 자들도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가 약자인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약자인가? 잡지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벌어진 상황, 인물, 분파 중 무엇을 풍자한 것인지, 이민자들이나 가난한 무슬림을 풍자한 게 있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 약자 자체를 직접 조롱하는 것과 시스템의 문제를 조롱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네오나치와 같이 극우들이 일으키는 문제의 상당수는 경제적 몰락을 비롯한 사회적인 절망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풍자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지언정 네오 나치의 사상을 풍자하는 것은 문제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7]
그러나 그 나라에 있던 기존의 문화나 세태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은 국가적인 분노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태의 폭력으로 기존에 이루어졌던 그 사회의 통념을 무너뜨리려 한 행위가 사회에서 납득되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프랑스 내의 무슬림들의 대부분은 외국인 노동자나 이민자들로 주요 도시 외곽에 마을을 형성하며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스스로 서구 문화와의 융화를 거부하고 고립을 택한 탓이 있긴 하지만 그 고립성 때문에 이해받지 못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얻기가 힘든 서구 사회의 무슬림들은 분명 사회적으로 소수이면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폭력의 명분으로 자리잡는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그 소수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테러는 결국 소수들의 처절한 탄압과 고립, 그리고 그걸 견디면서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모독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는 것.
테러 유발 요소를 차단하여 "안전"을 좀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테러를 자주 당해 왔고 때론 중동에 물리적인 공격을 해 왔던 서구 사회에서는 한국 사회로 치면 종북과 다름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단주의는 매우 위험한 경계 대상이고 그러한 자제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에게 테러로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다는 잘못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8]
4. 결론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표현의 자유와 국민정서에 대한 찬반 이전에 이것으로 이슬람 극단주의나 테러리스트들의 테러에 어떤 식으로든 면죄부를 줄 순 없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피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다. 무고한 시민들까지 공포와 혼란에 빠뜨리고 피해를 입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샤를리 엡도의 만평을 공격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반격은 어디까지나 법의 테두리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선에서 이뤄져야지 살인과 테러라는 폭력으로 앙갚음한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는 명백하게 선을 넘었다. 샤를리 엡도의 발간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이것에 극단적인 폭력과 테러라는 폭력으로 응징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어떤 이유에서든 테러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있어선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무개념한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 혹은 비난으로 반격하거나 때에 따라서 법적 절차로 반격하면 되지, 폭력으로 반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몇몇 종교인들이 타 종교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거나 가톨릭 등에서 동성애, 여성주의 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많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가서 테러를 할 것이 아니라 키배를 벌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덧붙이자면 앞서 예로 든 이 사건을 다룬 한국 언론들의 칼럼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인 방응이 주류이다. 2000년대 초반 급속히 부각되기 시작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온갖 인권유린과 광신 행위, 각종 병크들 때문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들에 대해서 샤를리 엡도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지네브 엘 라주아/ 샤를리 엡도 기자> "종교를 공격하지 않고 어떻게 토론과 풍자 잡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종교는 엄청난 돈을 모으는 세계 최대 기업들이며, 많은 사회에서 국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말도 안 되는 권력을 갖고 있는데다 권력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사 이래 발생한 숱한 전쟁의 원인이 돼 왔습니다."
연합뉴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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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의견은 상당히 과장되었다며 세상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라는 종교인의 의견도 있는데 자본과 권력은 감시와 견제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반면 종교는 그렇지 않기에 더욱 비판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는 노조도 있고, 노사협상도 있고, 어쨌거나 과거에 비해 점차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가 보장받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는 속성 자체가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감시와 견제시스템이 작동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잘못된 관행에 지적하려 하면 '넌 시험에 들었다!'면서 묵살한다든지, 믿음이 부족하다든지. 괜히 북한에게 '종교국가'라고 하는 게 아닌데 말 그대로 '최고존엄', 즉 감시와 견제가 안 되고 무조건적인 우상숭배를 강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뭔가 논리적인 토론, 합리적인 의견 교환이 어느 정도 되어야 발전하는 것인데 알다시피 이슬람만 봐도 그런 건 없고 불신자는 무조건 죽여도 정당하고 최고존엄만 숭배할 뿐이고 이렇게 종교에 세뇌된 인간들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에 의해 얼마든지 조종당할 수 있으니 무서운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에서 일한다고 해도 이건희 회장이 '너 죽어!'라고 한다고 죽을 노동자는 없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너 죽어!'라고 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종교를 위해서 타인의 목숨은 물론, 심지어 자기 목숨 따위도 헌신짝 버리듯 내다버릴 수 있게 세뇌시키는데 종교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종교가 단순히 권력을 지니고 있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서 나쁘다는 게 아니다.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면 정의가 나쁜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찰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고 단지 권력이 악용되면 나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으로 지배한다고 나쁜 게 아니고 그게 정당하게 번 돈인지 아닌지 그게 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애플 창업자들이나 비행기 제작사 같은 기업들은 사람들에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문명의 혜택을 안겼기에 거대한 자본을 축적해도 누가 뭐라고 안 하지만 사기꾼들이 사기쳐서 자본을 축적하면 비난받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백날 기도해 봐야 실제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심리적 위안을 주는 것일 뿐인데 그것에 비해 비대할 정도로 엄청난 자본과 절대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십자군 전쟁이나 IS만 봐도 믿음이 지나치면 광신으로 치닫고 전쟁과 학살로 이어지는 것도 분명한 사실인데 삼성 이건희 회장이 '나를 위해 다 죽어라!'라고 외친다고 죽을 노동자는 없으나, IS 지도자가 '이슬람을 위해 죽어라!'라고 외친다면 진짜로 목숨 바쳐 테러하는 사람들이 많다은 게 문제다. 그야말로 신의 수준으로 절대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D수첩에서 삼성을 비판했다고 삼성 노동자들이 달려가서 방송을 마비시킨 적은 없으나 어떤 사이비 종교를 다뤘을 때 신도들이 왕창 달려와서 방송사를 마비시킨 일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떠올려 봐도 종교가 '최고존엄' 수준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방식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나를 위해 다 죽어라!'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에 대해 '나를 위해 죽는다면 너의 남은 가족들을 보살펴 주고 빚도 탕감해 주고 가족들에게 돈도 남겨주겠다.' 같이 물질적 보상을 제시할 것이다. 또 이건희 회장에 대한 치부가 방송된다고 하더라도 사이비 종교처럼 신도들이 몸으로 막을 필요 없이 조용히 윗선이나 PD를 회유하거나 명예훼손 등을 명분으로 내세워 법원이나 방통위를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종교나 세속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기꾼들에게 속고 있느냐 아니냐'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삼성 회장이 약속한다고 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며 믿을 수 있는가?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게 정상적인 일인가? 이걸 믿으면 극단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극단주의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실제로 보복성 테러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골적인 언급이나 비판을 꺼리는 이슬람에 대한 풍자는 분명 특별한 예외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샤를리 엡도의 저 대답은 그러한 풍자 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용기 있는 발언임은 분명하다.
샤를리 엡도가 표현의 자유의 순교자처럼 떠받들어진 이유는 내용이 옳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풍자만화가로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지간한 강심장들도 언급을 꺼리는 이슬람에 대해서 마음껏 풍자하고 그로 인해 숱한 살해협박에 시달렸어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펜으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해 왔으며 비록 사망했으나 죽기 직전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했던 풍자만화가들이었던 만큼 다른 언론인들이(샤를리 엡도를 싫어하던 언론조차도!) 귀감으로 삼고 추모한 것이다.
5. 여담
- 대한민국의 여론이 샤를리 엡도를 '프랑스판 일베'로 칭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 좀 다른 게 일베는 인터넷 커뮤니티고 샤를리 엡도는 주간지 형식의 언론매체이다. 오히려 강도 높은 풍자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프랑스판 딴지일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봐야 한다.
딴지일보는 일베와 사상은 다르지만 강도 높은 풍자를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게 일베로 와전된 건 그간 일베가 저지른 온갖 악행 때문에 일베가 '나쁜 것'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6. 인용문
무슬림 사회는 무슬림 전통의 존중과 표현의 자유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슬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뿐만 아니라 인간을 형상화하는 자체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있다. 이를 존중한다고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아니지 않냐는 주장이다. 상대의 종교·문화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서구 사회, 특히 프랑스가 내세우는 관용의 정신인 ‘톨레랑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7일 공격을 받고 희생된 샤르보니에 편집장은 <르몽드> 인터뷰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해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가치를 고수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샤르보니에의 이런 입장이 유럽의 극우파와 이슬람권의 극단주의 세력 모두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하지만, 7일 공격을 받고 희생된 샤르보니에 편집장은 <르몽드> 인터뷰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해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가치를 고수했다. 본질적인 문제는 샤르보니에의 이런 입장이 유럽의 극우파와 이슬람권의 극단주의 세력 모두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국립외교원 인남식 교수는 “샤를리 에브도나 율란츠포스텐 등은 유럽 사회에 침투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불편함을 만평이라는 형태로 공격한 것”이라며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공격은 같은 사회 내부의 마이너리티를 향한 것이었으며 약자들에 대한 선동이었다”고 지적했다.
알자지라방송은 “프랑스 대통령은 샤를리 에브도 공격이 프랑스의 문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으나 이번 사건 뒤 유럽 곳곳에서 모스크 방화 등 반이슬람 공격이 뒤따랐다”며 “책임이 ‘이슬람’에만 있느냐”고 반문하는 좌담을 내보냈다.
경향신문
알자지라방송은 “프랑스 대통령은 샤를리 에브도 공격이 프랑스의 문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으나 이번 사건 뒤 유럽 곳곳에서 모스크 방화 등 반이슬람 공격이 뒤따랐다”며 “책임이 ‘이슬람’에만 있느냐”고 반문하는 좌담을 내보냈다.
경향신문
이런 상황은 그간 무시당했던 이슬람 이민 2·3세대를 더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이민 1세대들이야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 주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차별을 참아냈지만, 이미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랐음에도 국민 대접은커녕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자라난 2·3세대들의 좌절과 분노는 엄청나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 통합과 공존을 말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상대가 그렇게 싫어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서울신문
테러는 당연히 비난받아야 하지만 표적이 된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해 수위를 넘는 표현을 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함마드를 누드로 그린 만평에서 음담패설로 조롱해 특정 종교가 증오심을 갖도록 한 것은 테러의 빌미를 준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보호돼야 하는지도 이번 사태로 고민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매일경제
매일경제
[1] 더군다나 좌우 모두에게 고인드립을 쳐 봤자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인드립당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뭐 우리만 때리는 것보다 저쪽도 때리는 게 기분은 좀 덜 나쁘겠지만... 좀 진지하게 따지자면 기계적 중도성은 위키 같은 곳에서는 불가피한 최선책이지만 그렇다고 정당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2] 일베의 그 유명한 고인드립 면에서 보자면 샤를리 엡도는 마이클 잭슨 사망 당시 '마침내 백인이 되다'라는 강도 높은 만평을 기재한 적이 있다.[3] 물론 과거에는 지금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뺨치거나 그 이상으로 종교적 교리가 모든 세속적 가치 위에 군림했다. 계몽사상과 자유주의, 근대적 인권이 등장하며 세속주의자들의 강한 공격에 어느 정도 굴복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톨릭 등 종교집단이 이러한 가치를 받아들이면서 현재의 틀이 만들어졌다.[4] 사실 프랑스 가톨릭이 샤를리 엡도의 온갖 모욕 행각에 아예 저항조차 안 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너 고소라는 합법적 수단에 국한되었다.[5] 일베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 학생을 어묵으로 비유하면서 모욕한 사건도 이와 같은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판사는 표현의 자유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가 아닌 고인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며 분노를 느꼈다.[6]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실적시 명예훼손도 처벌하는 나라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여타 서방 국가와는 매우 다르다.[7] 정확히 말하면 '약자'를 지칭하는 쪽은 어느 무슬림이든 신성시하는 무함마드를 극단주의 세력을 풍자하기 위해 조롱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 풍자는 의도의 유무와 상관 없이 극단주의든 약자인 소수 빈민 무슬림이든 가리지 않는 조롱이 될 수 있다.[8] 여러 사상의 극단주의자가 존재하는 곳에서 이들이 감시 대상인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