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4년 2월 11일[1] |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검단동 1187번지[2] (현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 |
사망 | 2012년 9월 19일 (향년 88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달성 서씨[3] |
창씨명 | 오오시로 토시테루(大城敏照) |
자 | 영균(榮均) |
학력 | 토바타고등소학교 (졸업) 토바타중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이윤희, 슬하 1남 2녀[4]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5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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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24년 2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현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1187번지에서 아버지 서영복(徐永福, 1901 ~ 1954.12.1)[5]와 어머니 목천 상씨(? ~ 1972.12.18)[6]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9살 되던 1932년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오카현 토바타시 나카초(仲町) 3정목 5005번지[7]에 거주하였고, 토바타(戶畑)고등소학교를 졸업했다.이후 토바타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1940년 공장 실험공(實驗工)으로 근무하던 시라카와 히로쥰(白川博淳, 1926.1.17 ~ ?)[8]을 알게 되면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분개하게 되었다. 이에 토바타시로 이주해 들어온 조선인 노무자들을 동지로 포섭한 뒤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계획하였다.
1943년 9월에는 가족 전체가 본적을 일본으로 옮기려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일제가 주창하는 내선일체는 곧 조선인을 기만하는 표어임을 알았고, 더욱더 민족의식을 갖게 되어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중화민국의 정치인 저우포하이[9]가 지은 『삼민주의해설(三民主義解說)』을 읽게 되었고, 조선 민족의 진정한 행복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는 길 밖에 없음을 확신하였다.
1943년 11월 시라카와 히로쥰과 여러 차례 만나 "소위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라고 하는 것은 허구이며 조선인의 차별대우는 계속되고 있어 조선 민족의 진정한 행복은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차별적 대우의 불합리성, 태평양 전쟁에서 버마나 필리핀의 독립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상황에서[10] 이 나라들보다 선진국인 조선의 독립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으로 토론하였다. 이에 애국에 열의가 있는 조선인 청년들을 동지로 포섭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동시에 그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1943년 11월 4일, 마침내 항일 비밀결사 흥맹회(興氓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조선인 3명을 동지로 포섭하였고, 규슈 방면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를 상대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1944년 3월 토바타중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달 중순에 대구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잠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때 오오하라 에이키치(大原榮吉)에게 흥맹회 가입을 권유하는 등 국내에서도 동지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뒤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가던 중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었고, 이를 피해 중화민국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다가 1944년 7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4년 10월 18일 후쿠오카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살았으며,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다.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2012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2012년 9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1] 달성서씨세보 권5 72쪽에는 1923년 12월 17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1087번지로 적혀 있으나, 1944년 10월 18일 판결문에는 1187번지로 되어 있다.[3] 현감공파(縣監公派)-성은공계(城隱公系) 24세 상(相) 항렬.[4] #[5] 자는 방우(邦佑).[6] 상연(尙淵)의 딸이다.[7] 현 기타큐슈시 모지구 사카에마치(榮町)[8]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200번지 출신으로, 1944년 10월 18일 당시 후쿠오카현 토바타시 치토세초(千歲町) 2정목 5405번지(현 기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키마치(木町)) 시라카와 나루미(白川成美)의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9] 정작 이 사람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왕징웨이 공작에 호응하여 왕징웨이 정권의 부주석을 지내는 등 한간이 되었다. 나중에 다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귀순했지만 한간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옥사하였다.[10]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