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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taiji and Boy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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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아티스트 | 서태지와 아이들 |
유형 | 정규 앨범 |
발매일 | 1992년 3월 23일 |
장르 | 힙합, 팝, 댄스 |
곡 수 | 10곡 |
재생 시간 | 33:29 |
스튜디오 | 서울스튜디오 테크노 믹스 스튜디오 |
발매사 | (주)스포트라이트 |
기획사 | 반도음반 |
프로듀서 | 유대영 |
타이틀곡 | 난 알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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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판 앨범 자켓[1] |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3월 23일에 발표한 데뷔 앨범이며 대표곡은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2. 데뷔와 반응
당시 10대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문화충격으로 다가온 데뷔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3월 23일 앨범 발매 이후에 4월 11일(토) MBC가 봄개편에서 신설한 <특종! TV연예> 1회 방송에서 실질적 TV데뷔무대를 갖게 된다.[3] 신인소개 코너에서 심사위원단한테서 혹평[4]을 들었지만, 정작 방송을 보고 있던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야, 토요일 TV에 서태지란 애 나온 거 봤어?"가 대화의 주제였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춤도 끝장났었고 패션 또한 소방차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땐 인터넷이고 뭐고 없던 시절이라 그 날 점심 교내 방송으로 <난 알아요>를 처음 들은 애들도 많았다. 그리고 화요일쯤엔 누군가가 가져온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돌려들었다.
수요일쯤엔 점심시간에 아예 카세트 크게 틀어놓고 춤 좋아하는 애들이 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5] 그리고 그 해의 각종 체육대회 및 수학여행에서의 장기자랑은 "서태지와 아이들"로 완전히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그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가 가요톱텐에서 모두 골든컵을 수상하면서 유일하게 한 앨범에서 2곡의 골든컵을 배출한 그룹이 되었으며 특히 MBC에서는 <난 알아요>가 무려 10주동안이나 정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당시 앨범에 수록된 전 곡이 (심지어는 연주곡까지) 가요 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그들은 연말 신인상에서부터 가수왕까지 모든 상을 싹쓸이했다.
이 앨범은 130만장이 팔리면서 역대 데뷔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당시 국내 주류 음악과는 너무 동떨어진 음악이라 메이저 음반사에서 받아주지 않아, 당대 마이너 음반사였던 반도음반과 계약을 한 것인데 이게 초대박을 쳤다.[6]
2010년 음악웹진 100BEAT가 선정한 1990년대 100대 명반에서 24위에 랭크되었다.
웹진 이즘 소속 평론가 현지운은 이 앨범에 대해 샘플링이 새로운 창작 기법으로 등장한 앨범이라 평가했으며, 그동안 외면받았던 댄서들을 햇빛 찬란한 곳으로 인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리믹스 시장의 잠재성을 폭발시켰다는 점도 중요하게 언급했다. 링크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앨범이다.
2020년 7월 5일, 피치포크에서 앨범을 리뷰하여 8.3점을 주었다. 한국 대중음악 음반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로 알려져 있다. #
2020년 7월 14일 빌보드에서 지난 30년간 베스트 보이밴드 앨범 중 11위로 선정했다. 링크
2021년 9월 13일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서 운영하는 웹진인 <Udiscovermusic>에서 'The Best Albums Of 1992: 72 Records Worth Your Time(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1992년 베스트 앨범 72)중 40위로 선정했다. 링크
3. 대중가요 변화의 시작
현재 K-POP 세계의 직접적인 시초가 된 앨범이자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파급력이 강했던 앨범 중 하나이다.서태지와 아이들 1집의 대성공 이후로 대한민국 가요계는 하나부터 끝까지 다 바뀌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먼저 가요계 장르는 트로트와 발라드의 양강 구도에서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고, 가요계 소비층은 20대 이상, 특히나 40대 이상 중장년층 중심에서 10대들 중심으로 바뀌었다. 또한 무대의상도 컨셉상 입은 의상을 제외하면 정장이 상당수였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캐쥬얼한 패션, 책가방을 들고 나오거나 캡모자도 많이 착용하는 등 상당한 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활동 중단과 컴백도 이때부터 보편화됐다.
신승훈이 1집부터 2집까지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전성기를 누리면서 장기집권할 듯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그 인기에 도전이 들어왔다. 그래도 신승훈은 1992년 KBS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선 1집을 낸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상을 수상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그 변화가 뜻하는 바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기점으로 한 가수가 최고인기를 장기집권 하는 사례가 없어질 정도로 대중들 소비방식이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60년대에 이미자가, 70년대에 남진, 나훈아, 80년대에 조용필이 3년 이상 그것도 3년 연속 원탑으로 장기집권 했던 사례가 있었다.[7]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현재까지 장기 집권한 사례는 신승훈, 김건모, BIGBANG, 조성모, 방탄소년단밖에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무대 중심으로 한국 가요계가 바뀌고 K-POP 시장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대표적인 댄스가수는 소방차, 박남정과 김완선이었다. 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이들과는 또 다르게 이지연이나 강수지 등도 일본 아이돌처럼 살랑살랑 흔드는 정도의 무대는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양현석, 이주노는 1980년대부터 B-Boy의 시조새격 인물로 방송에서 수준 높은 포인트 안무를 선보여 온 바 있다. 예컨대 이런 영상을 보면 이주노는 이미 박철우 (후에 R.ef로 가수데뷔)와 1989년부터 완성된 컨셉을 갖춘 안무를 방송무대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곡 안에서의 백댄서 정도의 위치만 부여받았을 뿐이지, 제대로 된 댄스 브레이크 구간을 받지는 못했다. 당대의 유명한 춤꾼이었던 박남정, 현진영의 1991년까지의 무대를 보더라도, 댄서들이 있는 경우에도 댄스 브레이크는 없고, 안무도 율동 수준으로 댄스 스텝을 밟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들의 댄스실력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위해 군무 구간과 댄스 브레이크 구간을 곡 안에 별도로 마련하는 한편, 당시 한국가요에서 도입 태동기에 있었던 샘플링 기법을 활용해서 곡을 만들어 냈다. <난 알아요>의 곡 27초부터 시작되는 첫 간주구간은 샘플링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사례로, 스트링 세션을 샘플링하여 마치 기타로 스트로크[8]를 치듯이 휘몰아치는 간주를 만들어 1991년까지의 기존 가요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운드를 만들어내었다. 즉 기존의 곡은 스트로크 연주가 가능한 기타로 연주했을 간주 부분을 새로운 기법인 샘플링을 통해 스트링샘플을 기타를 치듯이 조합해서, 기존에는 없던 강렬한 사운드가 나왔고, 이 부분에 포인트 안무인 회오리춤을 집어넣어 선보임으로써 곡에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주었다. 지금이야 댄스곡 안에 다양한 단발성 효과음을 따다가 이리 저리 변조해서 흥을 돋우고 트랙에 버무리거나, 신디사이저 음으로 악기를 조합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드는 작업이 상식 중의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이와 같은 시도 자체가 드물었고 기술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때문에 그 필요성을 알고 있더라도 이처럼 곡 전반에 샘플링을 활용해 써내는 곡은 드물었다. 여기에 서태지는 당대 밀리 바닐리를 통해 빌보드에서 유행하던 랩스타일인 '쿨랩'을 국내 가요 가사에 도입하여 비록 각운은 분명하지 않지만 랩 플로우는 갖춘 초기 형태의 랩 구간을 선보였고, 양현석의 제안으로 멜로디 부분을 추가하여 곡을 완성하였다. 이어 곡이 인기를 끈 이후에는 스타일링에도 공을 들여 당대의 패셔니스타로 당시 청년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시도를 통해 비로소 안무와 곡, 스타일링이 한데 어우러지는 K-pop의 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이는 그룹 내에서 작곡/편곡/안무구성/스타일링이 자체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도해볼 수 있는 구성이었다. 한 가지 정도만 잘 해도 주목받는 신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처음부터 이와 같은 완성형 무대를 선보인 것이다.
난 알아요 무대로 돌아가서 보면 의상컨셉만 비슷하게 잡은 다른 의상을 입은 3명의 멤버가 귀를 잡아끄는 충격적인 스크래치 힙합 사운드와 함께 군무로 시작하고, 서태지가 랩을 꽂은 후 메탈 사운드와 함께 댄스 멤버의 댄스브레이크, 다시 후렴에서 서태지의 사랑노래, 곧바로 양현석의 랩과 댄스, 다시 포인트 안무가 들어간 군무,[9] 그리고 3명의 랩과 댄스, 다시 메탈 사운드와 함께 댄스 멤버의 댄스 브레이크, 그리고 후렴에서 서태지의 사랑노래로 이어지는 꽉찬 구성은 이전의 가수들의 무대와는 그야말로 별세계의 모습이다.[10] 이런 특징은 특히 SM이 철저히 연구해서 다른 가수들에게도 적용시키던 것이[11] H.O.T.에서 폭발하고 또 그것을 다른 소속사들이 다 따라해 지금까지 한국 K-POP 시장의 핵심코드로 자리잡게 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이 서태지 1집 무대에 거의 다 들어가 있다.[12] 1세대 아이돌 이전의 가수들도 이 앨범 이후 달라진 판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가수들은 급격하게 사라진 반면 서태지의 방법론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서 적용할 수 있던 가수들은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13]
서태지 이후 가요계가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 전에도 댄스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인기가 약한 장르도 아니었다. 서태지 이후의 한국 가요계가 서태지의 방법론을 따르는 댄스 음악 중심으로 바뀌었는데, 그 파괴력은 서태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상상 이상이었다고 정리해야 옳은 해석이다.
가장 효과적인 예시가 바로 한국 흑인음악의 아버지라고 자부하는 현진영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현진영과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의 현진영의 무대는 완전히 다른 가수의 무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인기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의 현진영은 이름이나 조금 알린 정도였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의 현진영은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는 가수가 된다. 당시 최고 수준의 흑인음악 이해도와 열정, 아직도 한국 역대 최고의 댄서로 꼽는 전문가들이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댄스 실력, 남부럽지 않은 가창력, 잘생긴 얼굴까지 완성형 가수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던 것이 현진영이다. 그리고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옆에 끼고 등장했던 데뷔 시절을 생각하면, 흔히 사람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고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현진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진영이 초절정 인기가수가 된 것은 뛰어난 실력과 성공조건을 갖춘 데뷔초부터가 아니라 서태지에 엄청난 영향을 받은 무대를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2010년대 후반부터 소위 탑골 GD라고 불리면서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섰다고 칭송을 받고 있는 양준일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엄청난 것은 현진영과 마찬가지다. 미국 본토에서 직접 흑인음악을 듣고 한국에 들고 나온 양준일이지만 서태지 이전은 미래적인 모습보다는 과거의 가수들과 비슷한 색깔의 무대를 보여줬다. 반면 서태지 이후는 동일한 양준일임에도 무대의 색깔과 임팩트가 완전히 다르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이후로는 한국 가요계에 완전한 단절, 단층이 생겼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비슷한 위치인 플리퍼즈 기타와 그들의 영향력으로 J-POP 시장이 크게 변화한 것과 비교하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이 한 장의 앨범과 무대가 K-POP 시장을 재편했다는 것은 해가 지나갈수록 더 명확해지고 있다. 사실상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한국 가요 앨범이다.
4. 성적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 | ||||
노사연 만남 (1991년) | ▶ | <colbgcolor=#FFFFA1,#5D5E00>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 | 김수희 애모 (1993년) |
- | ▶ | <colbgcolor=#FFFFA1,#5D5E00>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 |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
서울가요대상 대상 | ||||
태진아 <거울도 안 보는 여자> (1991년) | → | <colbgcolor=#FFFFA1,#5D5E00>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년) | → |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년) |
5. CD 수록곡
트랙 | 곡명 | 작사 | 작곡 | 편곡 | 재생 시간 |
01 | Yo! Taiji! | 서태지 | 0:39 | ||
02 | 난 알아요 (Club Mix) | 3:48 | |||
03 | 환상 속의 그대 | 3:27 | |||
04 |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 | 4:21 | |||
05 | 이 밤이 깊어가지만 | 양현석 | 서태지 | 3:54 | |
06 | 내 모든 것 (Live Mix) | 서태지 | 4:49 | ||
07 | 이제는 | 4:18 | |||
08 | Blind Love (English Ver.) | William.B | 서태지 | 3:58 | |
09 | Rock'n Roll Dance ('92 Heavy Mix) | 서태지 | Angus Young | 서태지 | 3:11 |
10 | Missing | - | 서태지 | 1:08 |
6. 테이프 트랙별 수록곡
6.1. SIDE A
6.1.1. Yo! Taiji!
- 인트로 성격의 짧은 노래. <난 알아요> 앞소절을 부르고 끝난다.
Yo! Taiji! |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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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난 알아요
- <난 알아요> 오리지널 뮤직비디오. 오리지널 버전은 MBC(고재형 PD)와 협업하여 무작정 당인리 발전소에 가서 찍어왔다고 한다. 후에 방송에서 자주 틀어준 다른 버전이 존재하는데 이것도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급조한(?) P/V로 이쪽인 KBS에서 자주 틀었다.
- 한국 가요계 역사를 바꿔버린 대히트곡. 자세한 내용은 난 알아요 문서 참조.
난 알아요 |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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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환상 속의 그대
- <환상 속의 그대 Remix> 뮤직비디오. 기독교적 모티브를 많이 차용한데다 악마(?)로 추정되는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당시 개신교계에서 반발이 많았다. 심지어 뮤직비디오에 사탄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서태지가 가장 싫다고 주장하는 개신교도도 있었을 정도다.[15] 결국 이 버전의 뮤직비디오는 방송심의 불가판정을 받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MBC는 토토즐, KBS는 가요톱텐 스페셜 무대로 P/V를 대신했다.
- <난 알아요>의 후속곡이며,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환상속의 그대 문서 참조.
- 시간이 흘러서 양현석의 소속사 가수 BIGBANG이 커버를 했고 샘플링을 해 <Crazy Dog>라는 곡을 만들었다.
환상 속의 그대 |
결코 시간이 멈추어질 순 없다 Y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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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인 곡. 세션은 당시 '한국의 케니 지라 불리던 이정식.[16] 6집 콘서트 '태지의 화'와 8집 콘서트 '뫼비우스 투어'에서는 엔딩으로 사용되어 팬들의 눈물과 감동을 이끌어냈다.
- 서태지 데뷔 25주년을 맞아 헤이즈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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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이 밤이 깊어가지만
- 앨범의 다른 곡은 모두 서태지 작사/작곡이지만 이 곡은 양현석이 작사했다. 원곡은 다소 심플한 구성이나 Live & Techno mix에서 큰 폭으로 편곡이 되었다. 이후 활동은 거의 해당 버전으로 이루어진 편. 리믹스 버전에서 계속 사용되는 샘플링 음원은 No Woman No Cry (Roots mix)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8]
- 이 곡은 1집 수록곡이지만 2집 하여가 컴백 및 활동 당시에도 무대 공연 레퍼토리로 자주 사용했다.
이 밤이 깊어가지만 |
옛 생각에 까페 문을 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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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SIDE B
6.2.1. 내 모든 것 (Live Mix)
- 후일 Quiet Night 투어에서 밝히길 원래 <난 알아요>보다 먼저 만든 노래였다고 한다. 데뷔곡을 이걸로 할 뻔 했다고. Quiet Night 컴백 콘서트에서 리믹스가 공개되며 서태지의 이혼과 결혼 후까지 남은 마지막 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었다.[19] 서태지는 Quiet Night Live투어에서 "이제 갓 데뷔한 신인이 팬들의 함성소리를 미리 믹싱했던 패기"에 대해 언급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준 팬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내 모든 것 (Live Mix) |
그렇게도 힘들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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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이제는
- 이 곡은 3집 라이브 콘서트인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2집 노래인 <너에게>와 믹스되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ETP 2008에서 13년만의 라이브가 공개되며 8집 활동 내내 팬들이 서태지에게 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제는 |
짙은 어둠에 서 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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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Blind Love (English ver.)
- <난 알아요>의 영문 버전. '윌리엄 변'이라는 재미교포 친구가 가사를 준 곡이며 이 사람은 현재까지도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Blind Love (English ver.) |
I once met a lady she was all so f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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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Rock'n Roll Dance ('92 Heavy Mix)
- AC/DC의 <Back in Black>을 편곡•개사한 곡이다. 이 곡도 표절이라고 당시 스포츠신문 기레기들이 까대기를 쳤고 여기에 부화뇌동한 PC통신 어그로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곡은 1집 부클릿에 작곡이 AC/DC의 멤버인 앵거스 영으로 정확히 표기되어 있다. 아예 1992년 1집 콘서트 당시에는 서태지와 친한 인디밴드가 등장해 AC/DC의 원곡을 부르고, 그 이후 서태지와아이들+댄서들이 등장해 Back in Black 원곡을 소개하고 나서 Rock'N Roll Dance 버전으로 퍼포먼스했다. 당시 대부분 중.고등학생들로 이루어진 서태지와 아이들 팬덤이 락 음악은 생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 두가지 버전이 있다. 1집에 수록된 '92 Heavy Mix와 1집 라이브 앨범에 들어가 있는 '93 Metal Mix[20]로 후자는 메탈 버전인만큼 AC/DC의 원곡과 더욱 흡사히 들린다.
- 이후 2000년 태지의 화 공연에서 서태지가 팬들에게 치킨 슬램을 가르칠 때 또 쓰였다.
- 2000년 이후 근 20여 년 넘게 서태지 공연에서 거의 막차로 달려갈 때 클라이막스에서 꼭 한 번은 나오는 곡이다. 라이브와이어와 함께 막 달리기 좋은 템포인지라...
Rock'n Roll Dance ('92 Heavy Mix) |
내 마음대로 춤을 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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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Missing
- 연주곡으로 당시 테이프버전의 앞뒷면의 길이조정을 위해 삽입한 곡이며 아웃트로 개념의 곡으로 생각해도 좋다. 1996년 Goodbye Best Album과 영상모음집인 굿바이 베스트 비디오에도 삽입되어 있다.
Miss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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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재발매판 추가곡
트랙 | 제목 |
11 | 환상 속의 그대 Part Ⅲ (Techno Taiji Mix) (Live & Techno Mix)[21] |
12 | 이 밤이 깊어가지만 (Extended Dance Mix) (Live & Techno Mix) |
13 | Rock'N Roll Dance ('93 Metal Version) (Live & Techno Mix) |
14 | 난 알아요 ('04 Zero Live) |
15 | 난 알아요 ('92 TV Edit)[22] |
6.4. 라이브 영상 및 음원 링크
난 알아요(92 Debut)난 알아요(93 Live)
난 알아요(04 Live)
난 알아요(08 Symphony)
환상 속의 그대(92 Live)
환상 속의 그대(02 Live)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00-01 Live)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09 Live)
이 밤이 깊어가지만(93 Live)
이 밤이 깊어가지만(04 Live)
내 모든 것(93 Live)
내 모든 것(14-15 Live)
이제는(93 Live)
이제는(08 Live)
7. 제작진
- 제작 : 유대영
- 레코딩 엔지니어: 서태지
- 작사 & 작곡 & 편곡: 서태지('이 밤이 깊어가지만' 작사 제외)
- 컴퓨터 프로그래밍: 서태지
- 기타:
- 신디사이저: 서태지
- 색소폰: 이정식
- 코러스: 양현석, 이주노, 김종서, 장혜진
- 앨범 커버 디자이너: 최성원
- 포토 스튜디오: 한성전 for G-Studio
- 제작사: 테크노 믹스 (Techno Mix)
- 레코딩 스튜디오: 테크노 믹스 스튜디오 (Techno Mix Studio)
- 믹싱 스튜디오: 서울 스튜디오
[1] 아래의 타이포그래피를 사진 위쪽으로 올리고, 상단의 Seotaiji and Boys 로고를 없애면 카세트테이프용 자켓이 된다.[2] 3집 라이브 ''95 다른 하늘이 열리고' 앨범 자켓 속지에는 사진이 있다.[3] 특종!TV연예 이전에 다른 프로그램에도 몇 번 출연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 바로 위 영상이 뒤늦게 발굴된 4월 11일 전 출연 동영상 자료이다. 다만 4월 11일 방송에 소개된 모습에 비해 의상이나 안무에서 다소 완성이 덜 된 모습이 보이고, 인터뷰 기회도 따로 없었으므로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이 불기 시작한 것은 4월11일 <특종! TV연예> 방송이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4] 정확히는 작곡가 하광훈과 작사가 양인자가 혹평을 가했다. 연예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상벽은 두루뭉술하게 빠져나갔고 서태지의 과거 시나위 경력을 알고 있던 전영록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모든 평가는 팬들한테 맡긴다"는 코멘트로 마무리했다. 하광훈과 양인자의 혹평도 현대 음악 평론지 수준의 신랄한 비판이 아닌, '이 점이 조금 아쉬웠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방송 이후 하광훈과 양인자는 거센 역풍을 받아 방송계에서 얼굴을 비추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하광훈은 이후에도 늪과 같은 명곡을 발표했고, 양인자 또한 조용필 노래 작사에 참여하는 등 이후에도 작사, 작곡가로 오래 활동했다. 30여 년이 지나 예능에 다시 출연한 하광훈이 회고하기로는 원래 저 혹평은 프로그램에서 미리 정해진 컨셉이었다고 한다.[5] 당시 10대였던 많은 남자연예인들이 이런 얘기를 하곤 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전진, 이민우, 장우혁, 문희준 등 1세대 아이돌들이다.[6] 이 앨범이 반도의 14번째 앨범이다. 실제로 반도음반은 그 전까지 고작 13장의 앨범을 유통한 소형 음반사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 반도음반이 배출한 유명 가수는 칠갑산을 부른 주병선 정도였다.[7] 물론 이미자, 나훈아도 kbs 가요대상+ mbc 가요대상 그랜드 슬램을 3년 연속 수상하지는 못했다. 조용필도 이용(1982년 mbc 가요대상), 김수철(1984년 kbs 가요대상)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랜드슬램은 3년 연속 달성하진 못했다.[8] 이런 주법을 말한다. 예시는 강승윤의 '본능적으로'[9] 물론 이 시대에 가까운 포인트 안무로는 박남정이 ㄱㄴ 댄스로 엄청난 인기를 끈 바 있다.[10] 해외에서 한국 K-POP의 특징으로 꼽곤 하는 멤버들의 캐릭터 만들기와 균등한 파트 분배는 당시 한국을 강타하던 뉴 키즈 온 더 블럭이나 후대의 영미 아이돌 그룹에서 중심멤버 1명이 모든 비중을 다 잡아먹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11] 가장 가깝게는 후술된 현진영 SM 시절.[12]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이전에 그나마 가장 이들의 방법론에 근접했던 것은 놀랍게도 나미와 붐붐이었다. 나미 혼자만 나올 때는 다른 댄스 가수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만 나미와 붐붐으로 세 명이 나올 때는 무대에 따라서 멤버들이 상당히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하지만.[13] 서태지와 동년배거나 더 어린데 기존에 데뷔해서 인기를 끌던 댄스 가수들도 적응하지 못하면 싹 쓸려나갔고 오랜 시간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당시 대중들의 관심사는 거의 놀라울 정도로, 서태지의 방법론을 따르는 댄스가수들에게만 쏠렸다. 예를 들어 김창환 사단의 노이즈만 해도 색깔이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상당히 다르고 그 시대 최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댄스그룹이지만 원래는 보컬과 작곡 멤버 2인조로 구성하여 데뷔하려고 했다. 그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나서는 급히 댄스 멤버 2인을 추가하여 4인조로 데뷔하였다.[14] 1996년부터 지금의 SBS 가요대전으로 분리되어 실시된다.[15] 서태지가 데뷔한 1992년은 휴거소동도 있었고 개신교계가 국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떨치던 1980년대의 끝물이었다. 이 시기에는 극렬 개신교 세력이 서태지를 헛소문으로 까내리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서태지가 목에 걸고 다니던 평화의 목걸이(비둘기 발자국 모양을 형상화함)도 사탄의 목걸이라고 소문내고 목사들이 예배 설교시간에 공공연히 극딜하곤 했다. 이 사태는 1994년 교실이데아 악마소동까지 이어진다.[16] 이정식은 이 곡 외에도 '이 밤이 깊어가지만', '이제는' 등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서 많은 부분 색소폰 세션을 담당했다.[17] 크레딧과는 달리 이주노는 합류가 늦어 앨범에 참여하지 못 했다.[18] 허나 당시의 일반적인 리믹스 관행을 감안할 때 해당 곡의 사운드 역시 다른 샘플러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므로 정확한 출처인지는 알 수 없다[19] 힘들게 지내온 날들을 뒤로 하고 내 모든 걸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가사와도 잘 들어맞았다.[20] 라이브 실황이 아니라 스튜디오 녹음 트랙이 들어가 있다. 기타는 이태섭.[21] TV활동에서 쓰였던 것과는 약간 다른 곡으로, 도입부에 사물놀이가 추가되었다. 중간 랩에도 약간 다른 부분이 있는데, TV활동에 쓰인 버전은 "하나, 둘, 셋, 렛츠고~" 앨범에 실린 버전은 "하나, 둘, 셋, 워~어"[22] 활동시기에 주로 사용한 버전. 많은 부분들이 일신되었는데, 우선 곡의 키를 반키 올렸으며, 2절에 양현석과 이주노의 랩을 추가하고 재녹음하면서 랩의 질감도 달라졌다. 1절의 끝 부분에 카메라 셔터음 효과음을 추가했으며, 2절의 끝을 약간 잘라내고 그 뒤로 나오는 댄스 브레이크 부분에 회오리춤에 맞는 샘플링 효과음을 추가했다. 그리고 곡이 끝날 때 원곡이 Fade Out 처리되는 것과 달리 TV Edit는 Orchestra hit 효과음과 함께 곡이 확실히 끝난다. 3인의 파트가 잘 분배된 부분과 더욱 격렬한 안무를 위한 라이브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