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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04:36

전국 과대사천왕

센고쿠 과대사천왕에서 넘어옴

1. 개요2. 대상 장수3. 비판점4. 2ch 전국시대 관련 게시판 공지 번역
4.1. 전국시대판의 기초지식4.2. 전국시대 전반편4.3. 오다 노부나가4.4. 도요토미 히데요시4.5. 도쿠가와 이에야스4.6. 다케다 신겐4.7. 다케다 카츠요리4.8. 우에스기 겐신 편4.9. 이마가와가 편4.10. 다테 마사무네 편4.11. 호조가 편4.12. 모리가 편4.13. 시마즈가 편4.14. 불교 세력 편4.15. 혼노지의 변

1. 개요

센고쿠 시대에 과대평가된 사천왕을 이르는 말.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다섯 명을 가리킨다. 사실 이때 언급되는 인물을 전부 합치면 4명이 아닌 5명이지만, 다섯 명인데 4천왕인 류조지 사천왕을 본떠서 그냥 사천왕이라 부른다. 때에 따라서는 시마즈 요시히로나 쵸소카베 모토치카 대신 사나다 유키무라나오에 카네츠구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사실 과대포장의 정도로만 따지면 사나다 유키무라가 다테 마사무네와 투탑으로 꼽히며 다른 멤버들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다이묘가 아닌 무장이라서 포함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모양이다.

2. 대상 장수

2.1. 다케다 신겐


* 다케다 가문 멸망 책임의 상당한 부분이 신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후대인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전가되고 있다.

2.2. 우에스기 겐신

2.3. 다테 마사무네

2.4. 시마즈 요시히로

2.5. 쵸소카베 모토치카

2.6. 사나다 유키무라

3. 비판점

처음 전국 과대사천왕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곳은 2ch. 전문적인 역사교육을 받은 게 아닌, 일본 네티즌들에 의해 작성된 내용이 주를 이룬다.[4]

본래 의도는 각종 창작물을 통해 과소평가 되거나, 혹은 과대평가 된 무장들을 재평가하자는 것이었으나, 2ch의 친 노부나가 성향이 너무 강하다 보니, 노부나가에 반하는 인물들을 깎아내리고 노부나가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변질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과대평가된 부분이 많은 터라 무조건 해당 장수들만 거품이 끼었다고 볼 수는 없다. [5][6]

또한 특정 인물을 평가할 때도 당시 상황이나 역사적 사실, 중간과정은 전부 무시한 채 성급하게 결론 짓고, 단편적인 내용만으로 해당 인물을 깎아내리는 데 주력하는 등 선정 방식이나 내용에서도 엉성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무척 많은 터라 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위의 항목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한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케다 신겐의 경우, 애초에 전략적으로 먼저 유리한 판을 짠 다음에 전장에 나서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권장할 일이며 그런 판을 짜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7] 사실 과대평가의 근거가 되기는커녕 그런 판을 짜는 신겐의 준비성을 칭찬해야 할 부분. 그리고 잦은 배신을 지적당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배신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특별히 비난받을 이유가 아니었다.[8] 모리 모토나리만 해도... 게다가 처음부터 카이 22만 석에 5천 병력이 있었고 경쟁 상대들이 호족 수준이었다고 폄하당할 이유도 없는 것이, 이미 선대부터 호죠가와 다투어 왔기 때문에. 이후 호죠나 나가오(우에스기), 오다 가에 비해서 카이의 석고 생산량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공세를 유지했다는 점에 이미 부당한 비판.

우에스기 겐신도 부처의 화신이라고 자칭한 주제에 특기는 메뚜기전법(적지에서 물자약탈)과 인신매매(포로)였다는 점 정도가 확실한 비판거리이며, 이외에는 원래도 겐신에게 고평가를 한 경우들이 없는 항목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원래 일본에서도 평가가 극과 극을 널뛰는 인물인데, 어쨌든 일본측의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면이 어느 정도 한몫한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나 세키가하라 전투 등의 공적까지 생각하면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폄하 받을 인물은 아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말년에는 이미 지나치게 판도가 기울어 있었다.

즉,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실드칠 부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4. 2ch 전국시대 관련 게시판 공지 번역

원문 링크 #

해당 단어가 만들어진 곳이자 과도한 친 노부나가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니 참고하자. 상술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병법 따윈 무시하기 일쑤이며,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이긴 경우에만 명장으로 취급해 주는 기묘한 성향이 있다. 애초에 전쟁의 기본은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과 장소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정작 소수로 다수를 이긴 것처럼 보이는 전쟁에서도 실제로 보면 큰 틀의 전쟁 아래에 있는 각 전투 당시의 병력은 서로 대등하거나 오히려 소수인 쪽이 다수인 쪽에 비해 병력을 더 많이 동원한 경우가 많았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전설 중 하나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며, 각개격파기동전이 전략전술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유이다. 애초에 공격자가 유리한 상황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때 공격하거나 그런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다음으로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전쟁의 80%인 준비부분을 무시하는 것부터 이들의 무식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도 특징. 전체적으로 보면 알겠지만 전국시대를 지나치게 오다 노부나가 입장에서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제도 시행이나 국가 경영 등을 굉장히 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티도 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지 자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다. 가령 모리 가문이 '고쿠진 연합맹주 체제의 전형적인 예'라고 설명한 것도 맞는 이야기이며 그 연장에서 모리 료센 체제가 실은 그만큼 가문의 지배력이 약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는 설명도 일리 있는 해석이다. 모리가 뿐만 아니라 대개 전국시대 다이묘들이 이런 지역 유력자들의 연합맹주라는 형태이기도 했다. 이 틀을 깨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문이 다름 아닌 오다 가문인데, 오다 노부나가 통일 사업의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부나가는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일본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권 아래 묶으려고 시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다케다 카츠요리가 실은 녹록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이나, 사원 세력이 막강했다는 점, 다케다나 우에스기는 물론 시마즈나 모리 등이 게임이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 자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특히 다케다 신겐은 에도시대부터 과대평가되었다는 견해가 있었으며, 시마즈가 임진왜란 때의 사천 전투를 얼마나 과장해 놓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은 시마즈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 관련 사료 자체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한데, 대개 일본 전국시대의 기록들은 조선이나 중국처럼 관찬 사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행장'이나 에도시대에 작성된 '군기물'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도 그렇게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애당초 이 공지글은 나무위키처럼 불특정 다수가 편집한 글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된다.

4.1. 전국시대판의 기초지식

이 정도도 모르면 여기서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4.2. 전국시대 전반편

4.3. 오다 노부나가

4.4. 도요토미 히데요시

4.5. 도쿠가와 이에야스

4.6. 다케다 신겐

4.7. 다케다 카츠요리


한 줄 요약: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다.[79]

4.8. 우에스기 겐신 편

4.9. 이마가와가 편

4.10. 다테 마사무네 편

4.11. 호조가 편

4.12. 모리가 편

4.13. 시마즈가 편

4.14. 불교 세력 편

4.15. 혼노지의 변


[1]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붙잡아서 외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매우 흔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었던 다이묘인 오토모, 오무라, 아리마가 파견한 덴쇼 소년사절단이 로마 교황을 만나러 1582년 유럽으로 갔을 때 도중에 방문한 지역들마다 수많은 일본인 여자들이 노예로 팔리는 모습을 보고는 화가 나고 슬프다고 기록했으며, 덴쇼 15년(1587년) 6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당(중국), 남방(동남아), 고려(조선)에 일본인을 팔아넘기는 일은 범죄이니 중단하라."는 명령을 일본 전역에 내렸다. 히데요시의 말처럼 조선에도 일본인 노예가 팔려 왔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남아있다.[2] 그의 갑옷이 어찌나 간지나는지 후에 헐리우드에서는 다테 마사무네가 입었던 갑옷을 모티브로 다스 베이더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3] 깡촌이었던 센다이를 100만석으로 성장시켰다. 에도막부 시대에 에도에서 먹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 산이라는 얘기도 있었다.[4] 히데요시 항목에서 임진왜란은 시종일관 일본의 우세였다는 둥... 한 마디로 전문지식 없는 네티즌들이 위키만도 못한 미검증 정보를 써놓은 것. 나무위키도 이런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최소한의 자정은 가능하다는 점에서...[5] 애시당초 전국시대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같이 비교적 객관화되고 기준이 되는 역사서가 없었고 대부분 해당 가문의 기록이다보니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이 컸다.[6] 오다 노부나가만 해도 분명히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걸물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혼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토 도산이 사위를 보고 감탄했다든가, 오케하자마 전투가 의도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은 과대평가에 해당된다. 또, 오다 노부나가가 학살을 즐기고 잔혹한 성격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문제가 될 정도로 학살한 적도 없거니와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의 잘못이 더 컸다. 또, 영지 내 상업을 장려했다거나 철포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7] 애초에 이걸 깎아내릴 거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폄하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유리하고 이기는 싸움만 했으며, 그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철저한 사전 조사와 전략을 통해 싸우기 전부터 이기는 판을 이미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고대의 손자병법때부터 있던 내용이라 병법에 대해 안다면 나올 수가 없는 소리다.[8] 다만 배신 자체는 그렇다쳐도 너무 근시안적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작은 이득때문에 절대 배신하면 안되는 동맹을 배신했기 때문.[9] 지도만 봐도 영지 크기는 얼마 안 되지만 평야를 끼고 있어서 엄청나게 부유했다. 다만 평야에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서 머릿수로는 많아도 굴릴 수 있는 병력이 적었다.[10] 쿠루와(성곽 내부를 일정 구획으로 나눈 것)에서 '가장 바깥쪽 성곽'을 칭하는 말. 특히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성이 잘 정비된 소가마에로 유명했다.[11] 대체로 전국시대 평균 수준. 다만 아무래도 전국시대 최고 유명인이었던 만큼 구설수에 빠지기도 쉬웠다. 거기다 노부나가가 각잡고 상대한 곳이 불교 세력이었던 만큼 더더욱 욕먹기 쉬웠다. 물론 절에 불을 지르자 벌거벗은 여성들이 뛰쳐나왔고 하니 불교 세력의 잘못이 훨씬 컸다. 소헤이 참조.[12]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노부나가가 죽이라고 명령해서 죽였을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이에야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죽여놓고 노부나가에게 뒤집어씌웠을 개연성이 더 크다.[13] 당시 이에야스와 가신들은 친노부나가였지만 정실 츠키야마도노는 이마가와 출신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문에서 내전을 피하기 위해서도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14] 실제로 자신과 대립한 혼간지 세력은 가차없이 공격했지만 그렇지 않고 제대로 불문을 지킨 사찰은 후원하기도 하였다.[15] 일단 총을 쓰기는 한 듯하다. 어쨌거나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 등을 통해 가장 많은 조총을 모은 건 사실이었다.[16] 애시당초 삼단철포 자체가 비효율적인 짓이다. 굳이 셋으로 나눠서 쏘는 것보다 그냥 한꺼번에 쏘는 것이 훨씬 낫다. 무엇보다 아예 셋으로 나눠서 쏠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 그 시간이면 기병대가 돌격해서 아시가루들을 말발굽으로 다 밟아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건 전열보병 참고.[17] 좀 더 상술하자면 원래 조총은 연기가 나는 유연화약을 사용하므로 한번 쏘기만 해도 그 뒤의 명중률은 크게 내려간다. 그러므로 굳이 셋으로 나눠 쏘기보다는 그냥 첫방을 잘 쏘는 게 명중률 면에서 크게 낫고 또 한꺼번에 많이 쏘는 편이 명중률을 올릴 수 있다. 그 뒤로는 어차피 백병전이 될 테니 총이 아니라 창칼로 싸우는 편이 낫다.[18] 시장 좌석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하게 만든 일종의 자유시장 제도.[19] 다만 라쿠이치라쿠자를 가장 대규모로 연 것은 역시나 오다 노부나가였다. 거기다 다른 다이묘들과는 달리 정말로 세금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20] 노부나가가 동생인 오다 노부카츠를 이긴 전투.[21] 애시당초 오다 가의 영지인 오와리는 적으로 둘러쌓인 형국이라 지켜야 할 곳이 많았다.[22] 다만 미카타가하라 전투 직후 신겐이 병사하면서 결과적이지만 노부나가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신겐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당시 노부나가 포위망에 갇혀 있던 노부나가는 정말로 폭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차피 오다 노부나가와는 한몸이나 마찬가지라 둘 중 하나가 망하면 나머지 하나도 망하는 관계였으니 말 할 필요도 없고.[23]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1차 포위망 시절에는 아군이었던 아자이에 기습을 당해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에 여유가 전혀 없었다. 반대로 2차 포위망 때는 맞는 말인 게 이 때는 기습을 당하지 않아서 충분히 여유롭게 돌파할 수 있었다. 다만 보통 노부나가 포위망은 1차를 가리키고 2차 때는 신겐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24] 또, 순수하게 국력(고쿠다카)으로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다케다는 사실 영지인 카이가 거의 산지다보니 고쿠다카는 신통찮은 편. 대신 다케다는 산에 있던 광산을 통해 부를 쌓았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신겐 상대로는 무리였고 어디까지나 전쟁에는 능한 신겐이 사망해서 구심점이 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애시당초 포위망 자체가 신겐을 믿고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25] 다만 어차피 아케치 미츠히데는 반역자로 잡혀 죽었고, 니와 나가히데는 군사적인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장수로서는 거의 시바타 다음가는 위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26] 물론 이건 단지 성격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다. 전임자의 평판이 국민들 사이에서 좋으면 후임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기 때문에 후임자 입장에선 어느 정도 전임자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도 집권기 동안 사실상 전임자인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봐줬으며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역시 스탈린을 비판했다.[27] 말하자면 '참모'가 필요 없이 자신이 뛰어난 스타일의 리더.[28] 시종 우세란 얘기에서 2ch 네티즌의 수준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일본이 우세했던 건 처음 1년 정도, 1592년 4월에 시작해서 5월에 한양에 입성하지만 1593년 2월, 약 10개월 만에 한양을 잃고 경상도로 철수했다. 이후로는 명군과 조선군도 재정비를 거치면서 경기/강원/호남을 탈환하였고 이후로 왜군은 경상도에 짱박혀서 휴전협상만 주고 받는 소강 상태였다. 정유재란 때는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원균으로 교체하면서 다시 엎어질 뻔 했지만 이후 명량대첩을 통해 만회했다. 개전 초반 1년과 정유재란 반년 정도를 제외하면 7년 전쟁 중 5년 이상을 대부분 협상이나 지리한 대치로 시간을 보냈다.[29] 원문은 種無し. 아이를 만드는 씨가 없다는 소리. 내가 고자라니![30]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없지만 히데요시는 왜소한 체구에 원숭이를 닮았는데 비해 히데요리는 엄청나게 덩치가 크고 풍채도 좋았다.[31] 다만 오다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반대로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노부나가의 조카 요도도노의 피를 이어받은 히데요리가 키가 컸다고 해도 히데요시의 친자인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당시에 무슨 DNA 검사같은 것도 없었고.[32]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는 가신에게 살해당했으며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도 가신에게 살해당했다.[33] 에도시대 들어서 대표적으로 미카와모노가타리 같은 서적등에서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잡혀있었고 가신과 주군이 무슨 견우와 직녀마냥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쩌고 하는 신파극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으나, 실상은 이에야스가 괴로운 인질생활은 커녕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히려 후견인의 입장에서 이에야스를 돌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질녀까지 시집보내고 젊었을 때의 스승이자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가로급이었던 타이겐 셋사이를 거의 가정교사급으로 붙여서 교육시켰고, 원복 이후 자신의 본 영토로 돌아갔을 때에도 가신단과의 사이가 좋지않고 어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가신단에게 골치 아파하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리인 격으로 붙여둔 이마가와가문 직속 신하에게 하소연하여서 일을 진행시켰다던가. 그리고 요시모토 사후 완전한 독립 이후에 잇코잇키 발발로 미카와는 말 그대로 반쪽이 나 버렸고 혼다 마사노부같은 중신마저도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정도. 이에야스가 가신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이 잇코잇키 사건 이후로 보는 편이다.[34] 물론 도쿠가와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 것이 애초에 이마가와 가문은 이에야스의 보호를 빌미로 미카와를 모략으로 합병했기 때문이다. 개막장 센고쿠시대근대사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뭐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황태자 이은에게 황족급 교육을 시킨 것과 유사하다.[35] 또, 실제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미카와 무사들을 선봉에 내세우는 전법을 즐겨 썼다고 하니 완전히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충성심은 둘째쳐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밥벌이가 안 되니까. 그리고 잇코잇키에 빠져서 이에야스에게 등을 돌린 이들도 많긴 했지만 미카와가 안정되고 이에야스가 관용을 내세우면서 이렇게 떨어져 나간 이들도 거의 대부분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은 주군을 배신한 전력 때문에 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말도 있다. 사실 애시당초 이들이 잇코잇키에 빠진 것도 이마가와가 미카와를 통치하면서 전통적인 마츠다이라 가문의 가신들이 밥벌이할 곳이 없어졌던 탓도 있었다.[36] 종합하자면 애시당초 잇코잇키를 물리친 때부터가 이에야스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잇코잇키가 벌인 내란은 미카와를 이마가와가 차지했다가 토해낸 것에 대한 부작용같은 거고.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미카와를 평정한 이에야스의 역량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37] 이때는 사실 오다 노부나가도 노부나가 포위망에 갇혀 제코가 석자인 상태라 도쿠가와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거기다 미카타가하라에서 패한 것도 사실 이에야스가 전술을 엉터리로 펼친 것이 가장 컸다. 적이 돌파를 위해 어린진을 펼치고 있는데도 이에야스는 어린진에 돌파당하기 딱 좋게 학익진을 고집했다고 한다. 그것도 전국시대 전술의 귀재인 신겐을 상대로 말이다.[38] 물론 헛소리. 애시당초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밖에 없도록 외통수로 몰아넣은 게 대단하지 않다는 말 자체가 매우 엉터리이다.[39] 고아가 부유한 집안에 입양돼서 영재 교육을 받고 자란 격이며, 요시모토가 측근으로 기용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예상밖으로 요시모토가 어이없이 죽자 이에야스는 자기 조상의 영지로 그대로 돌아가 뒤통수를 쳤다는 주장이다.[40]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마가와는 이에야스를 핑계로 미카와를 통째로 합병했고 이에야스를 인질로 삼은 것이니 실제로는 이에야스를 탓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41] 다만 이런 사건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어렸을 때 인질로 잡혀간 것에 대한 반동의 성격이 강했다. 애시당초 다이묘가 되어야 할 사람이 인질로 잡혀가고 그 가신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지니 종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거고 노부야스 숙청도 결국은 이마가와 가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가혹한 인질시대가 없기는 개뿔, 애시당초 인질로 10대를 보낸 것 자체가 가혹한 건데 그걸 고작 교육 좀 시켜준 걸로 퉁치지 마라.[42] 애시당초 2ch에서 그렇게 빨아주던 오다 노부나가도 결국은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습격당해 사망했고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에야스는 그래도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43] 이에야스가 통수왕 약속을 잘 깼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행동은 전국시대에 딱히 이에야스만 했던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신겐은 절대 이에 대해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44]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과 꾸준히 통상관계였다. 다만 종교에는 그다지 관용적인 편이 아니었다.[45] 다만 이건 좀 웃기는 소리인 게, 일본에는 삼국시대 신라구에서 페리 제독의 흑선이 개항을 요구할 때까지 외적이라는 것 자체가 올 일이 없었던 고립된 곳이었다. 즉,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은 전부 다 내부 전쟁이었다는 말. 결국 에도시대의 평화는 도쿠가와 막부가 반란을 일으킬 만한 자들을 전부 억눌러두었기 때문이지 외적이 없어서가 아니다.[46] 과대사천왕 드립은 이 대목에서 나온 말인 듯.[47] 당연히 개소리다. 전쟁이 무슨 스포츠도 아니고.[48]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패배는 병가지 상사인데 한 번 진 걸로 허접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오다 노부나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다 몇 번씩이나 패배한 적이 있었다.[49] 그나마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 공식적인 세율이 사공육민이었다.[50]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워낙 전쟁을 많이 한 터라...[51] 실제 신겐은 전국에서도 병종별 부대 편재를 가장 선구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실시하는 다이묘였다.[52] 다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일본의 다이묘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지방 호족들의 우두머리 수준이기도 했고.[53] 실제로는 인재를 많이 불러모아서 나중에 도쿠가와에서 구 다케다의 신하들을 등용한 예가 있었다.[54] 사실 다케다와 싸운 건 거리적 특성 상 대부분 오다가 아니라 도쿠가와였다. 다만 무서워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해도(우연이라고는 해도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베었다.) 꽤나 까다로운 상대임에는 변함이 없다.[55] 사실 다케다는 무력 외에 모략에도 능해서 사실상 1차 노부나가 포위망을 획책한 것도 신겐이나 마찬가지였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이 나온 것은 국력에서 다케다가 오다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오와리는 매우 비옥한 땅이라 척박한 다케다와는 고쿠다카 면에서 비교를 불허했다. 거기다 신겐과 투닥거릴 시점에는 미노의 사이토, 미카와/스루가/도토미의 이마가와가 정리된 후였으므로 오다는 더욱더 부유하고 막강해졌지만 반면 다케다는 여전히 척박했다.[57]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가를 낼름했을 때 총 고쿠다카가 600만 석 정도였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신히 확보한 게 150만 석이었으니 상대가 안 되는 수준. 그래서 이 때문이라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후로는 이 차이가 역전된다.[58] 근거없는 소리. 애시당초 격이 높고 낮다는 말의 근거 자체가 불분명하다.[59] 사실 요시모토 생전에는 거의 일본 최강의 다이묘였기 때문에 이마가와에게 머리를 든 인물은 거의 오다 노부나가 정도였고 그 오다 역시 전황 자체는 굉장히 불리했다. 단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장 마츠다이라같은 경우도 후계자를 인질로 바쳤을 정도고. 최강자라 꼬리를 말고 있었던 거지 딱히 오야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60] 애시당초 3배의 병력을 만든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61] 사업할 때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업을 그만두면 망할 수밖에 없어서 적자를 내면서 호전되기를 기다리며 사업을 계속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우리 말로 돌려막기 정도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금을 3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아 3개월 전에 납품한 물건 대금으로 이번 달 경비를 충당하는 식으로 자금 여유가 전혀 없이 대금을 받자마자 지출 경비를 돌려막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을 흔히 자전거 조업이라고 부른다. 속도를 유지하는 동안은 넘어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일단 사업이 계속 돌아가는 동안에는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유 자금이 한계에 달하면 망할 수 밖에 없는 적자 영업과는 좀 다르지만, 사업이 멈추거나 차질이 생기면 (속도가 느려진 자전거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처럼) 망할 수 밖에 없는 위태로운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위에서 제시된 3개월짜리 어음의 사례를 생각해 볼 경우, 만약 자기 회사가 납품하던 원청회사가 도산하면 자기 회사가 받은 2개월치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고, 그러면 자기 회사는 물론 자기 회사와 거래하던 다른 하청업체들 역시 줄줄히 도산하게 되는 것. 즉 약탈이나 인신매매로 어떻게든 수입이 있을 때는 나라가 유지되지만 그런 수입이 없어지면 나라를 유지할 수 없어서 지속적으로 약탈이나 인신매매 같은 수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가리킨다.[62] 말할 것도 없이 이건 본거지인 카이가 워낙 가난한 땅이라 그런 것. 물론 광산개발을 통해 부를 축적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이를 통해 전쟁경제를 벌인 것이 문제긴 했다. 무엇보다 판을 너무 크게 벌린 상태에서 사망한 것이 패착이었다. 뭐 자전거 조업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63] 오케하지마 전투도 별 차이는 없다.[64] 사실 상술했다시피 카이가 가난한 영지였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판을 크게 벌렸다가 사망하는 바람에 나가리가 된 것. 일부는 신겐의 탓도 있지만 원래 이런저런 이유로 한계가 있었다.[65]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게 이런 식으로 동맹을 깨서 원한을 샀고 그 이후 변사하는 바람에 카츠요리가 이 뒷감당을 전부 뒤집어써야 했다.[66] 과장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다와 동맹을 맺었다가 뒤통수를 친 게 바로 노부나가 포위망이다.[67] 다만 오와리는 땅은 기름졌지만 대신 주변에 적들도 많았다.[68] 반대로 노부나가의 경우 처음부터 움직일 수 있었던 병력은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2~3천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다의 그 많은 고쿠다카는 다 어쩌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 주변의 적을 견제하는데 써야 했기 때문에 병사들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69] 다케다 가문이 카이 슈고였다는 의미. 그러나 신겐이 활약하던 전국시대 중반엔 딱히 슈고 다이묘 출신이라고 메리트가 있는 게 아니었다. 시바씨, 토키씨 밑에서 크다가 통수를 친 오다 가문, 아시카가씨의 통수를 치고 명문 호조씨를 참칭하던 후 호조 가문, 본성은 나가오씨 였으나 간토 칸레이 우에스기씨로부터 직위와 성씨를 양도 받은 우에스기 가문 등. 아시카가 막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면서 허수아비 슈고들이 수두룩 했었다. 게다가 카이 다케다씨는 다른 슈고 가문들처럼 슈고다이, 고쿠진들의 세력 강화로 거의 무력화된 상태였다가 신겐의 부친대에 와서 재기에 성공한 경우였다.[70] 다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신겐이 뻗어나갈 곳이 거기밖에 없어서 문제지. 남쪽에는 이마가와, 동쪽은 호조가 떡하니 있었으니까. 이 둘은 고쿠다카에서 다케다를 압도했다.[71] 줄곧 나오는 말이지만 신겐 본인의 능력은 훌륭했으나 기반인 카이가 따라주지 않았다.[72] 다만 사실일 수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와 달리 다케다는 제 코가 석 자라 상락같이 배부른 소리를 할 만한 상황은 전혀 아니긴 했다. 현재도 역사학자들은 신겐이 정말로 상락의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시하고 있다. 차라리 이마가와 요시모토였다면 모를까.[73] 이 역시 화전양면전술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딱히 거짓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너무 진지하게 여길 만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신겐이 자신을 노부나가보다 아래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편지를 보내 노부나가를 혼란스럽게 해서 노부나가가 빠르게 원군을 보내는 것을 저지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사실 그게 화전양면전술이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 우습게 보는 수작이니 노부나가가 화내는 것도 당연하다.[74] 근거없는 소리. 말년에 병에 걸려 죽은 걸 가지고 하는 말인 듯하지만 애시당초 당대에 53세까지 산 것도 꽤나 장수한 편에 속한다. 신겐도 자주 원정에 나섰던 만큼 병약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장 신겐이 암살 또는 저격당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워낙 신겐의 사망이 급사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다만 마지막에는 전투가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거짓이 아닌 듯하다.[75]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신겐도 잘 한 점이 있었고 카츠요리도 실수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다케다 멸망에 신겐의 지분이 큰 건 사실이다. 특히 외교 부문에서의 근시안이 가장 큰 문제. 그 뒷감당을 카츠요리가 해야 했다.[76] 하지만 다케다 카츠요리도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영토와 돈을 받아먹고 우에스기 카게토라와 호조 가문을 배신한 전적이 있고 이게 다케다 멸망의 큰 지분을 차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77] 엄밀히 말하면 마방책이 있었는지 여부도 의심받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설령 마방책에 달려들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획기적인 발상이라든가 전술상 큰 실수라든가 그런 것도 아니다. 애시당초 기병으로 마방책을 부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78] 반드시 그런 건 아니고 애시당초 카츠요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와 결혼했으나 이 조카가 일찍 죽고 나서 호조 가문에서 후처를 데려온 탓도 있다.[79]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본인 책임도 상당했다.[80] 근거는 별로. 뇌피셜에 가깝다.[81] 이는 사실이다. 에치고는 여러 발전한 지역에 비해 기술 전파가 늦고 날씨가 추워서 이모작을 할 수가 없었고, 겐신은 군량과 재원 조달을 위해 겨울만 되면 칸토 지역으로 남하해 보리를 베고 지역민들을 잡아갔다.[82] 1561년 1차 오다와라성 전투를 말한다. 겐신이 간토 호족 연합군과 함께 호조의 본성까지 쳐들어가서 1달 정도 농성하다가 호조가의 동맹이던 다케다 신겐이 북 시나노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철군한 전투. 오다와라성은 이전 성주인 오오모리씨(1495년 멸망) 때부터 이미 잘 정비된 성이었고 이 시기(1561년)엔 산노마루까지 보유 중인 철옹성이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건, 겐신은 에치고국부터 출병해서 고즈케국, 무사시국을 휘저었으며 사가미국의 오다와라 성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는 것. 그 와중에 옛 간토 칸레이였던 코가 쿠보 가문을 정복해서 가독을 바꿔버렸고, 철군하는 길에는 무사시국의 방어 요충지인 마쓰 산성, 우마야바시성 등을 점령해 전향한 구 호조 가신들에게 뒤를 맡기고 에치고국으로 돌아갔다.[83]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성기 때 단독으로 200만 석 이상의 고쿠다카를 자랑했고 이것만으로도 우에스기가 가진 고쿠다카의 2배다. 거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가신들에게 뿌려둔 고쿠다카도 상당했다. 그게 다 원래는 오다 노부나가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아무리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해도 감히 도전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 시절에는 오다의 동맹인 도쿠가와 쪽 고쿠다카도 감안했어야 했을 테니 더더욱. 참고로 에도 막부 시절 도쿠가와 가문은 자체적으로 약 250만석에 최대 700만석의 고쿠다카를 가지고 있었다.[84] 다만 오다 가문이 우에스기만을 상대한 것도 아니고, 신겐 시절 포위망만은 못해도 꽤나 강력한 포위망에 둘러쌓여 있던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오다 가문은 규모로는 우에스기보다 한수 위의 세력을 지닌 모리 가문과의 전선에선 더 적은 병력으로 싸워야 했다. 때문에 겐신이 급사하지 않았다면 오다 가문을 붕괴시켰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85] 이건 일본 역사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뭐라 딴지걸기 어렵다. 정말로 이 전투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리 큰 전투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까.[86] 원래 요시모토는 한번 출가했다가 위의 형들이 전부 죽는 바람에 환속해서 가독을 이었다고 한다.[87] 흔히 알려진 귀족적인 모습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거짓. 사실은 전형적인 전국시대 다이묘였다. 귀족적인 모습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지 본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덩치가 컸을 수는 있지만 살이 쪄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일 가능성은 제로.[88] 사실 무식한 영지민들에게 귀족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의외로 통하는 방법이었다. 오히려 농민들과 비슷한 차림을 하는 쪽이 더 얕보일 가능성이 컸다.[89] 다만 무능하지는 않았을 뿐,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죽은 이후 상황 자체가 워낙 불리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우지자네가 뭘 할 수도 없었다. 특히 이에야스가 등을 돌리고 신겐이 뒤통수를 쳤던 게 컸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원래 인질이라 속으로는 이마가와 가문에 반심을 품고 있었던 것.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고 마츠다이라의 영지인 미카와를 얼렁뚱땅 먹은 업보를 치러야 했고 신겐은 원래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인간이었다. 물론 요시모토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힘으로 충분히 누를 수 있었겠지만 하필 그 요시모토가 오케하지마에서 사망해 버렸다.[90] 원래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과거 역사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공차기나 좋아하는 바보 도련님 취급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즉, 바보 도련님은 아니었을 뿐 그렇다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마가와 가문을 제대로 유지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말. 설령 유지할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고 해도 당시 급변하는 센고쿠 시대에서는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91] 오대십국시대 이극용의 별명이다.[92] 조총은 한 번 쏠 때마다 화약을 넣고 장전해야 했으므로 기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최소 후장형 소총이나 권총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택도 없는 소리다. 그래서 당대의 기마 전술도 드라군(기마보병) 형태였다.[93] 실제로 다테 마사무네는 군재는 별로 없었다. 대신 그는 내정과 모략에 탁월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거물급 다이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94] 흔히 말하는 오고쇼와 비슷하다. 보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에 오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인세이에서부터 내려오는 꽤 유구한 전통이었다. 당장 아자이 가문만 해도 비슷한 짓을 했고.[95]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현재에 와서는 낭설이다. 가와고에 전투는 반 호조 연합과의 기나긴 전쟁을 하나로 압축시킨 가상의 전투로서 실제론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다.[96] 정확히 말하면 농성만 한 것은 아니고, 주 전법이 농성 후 반격.[97] 그래서 호조 가문은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에도 땅으로 전봉해온 이에야스는 이 땅을 안정시키는데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98] 노부나가는 이세 지역의 두 가문인 기타바타케 가에 차남 노부카츠를 양자로, 간베 가에 차남 노부타카를 양자로 보내 이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모리 모토나리킷카와 가코바야카와 가에 양자로 보냈던 것과 비교한 것이다.[99] '오니'는 전술가 타입의 무장이 아니라 보통 전면전에서 활약한 돌격대장 타입의 맹장들에게 붙는 별명이라 이 점을 비꼰 것이다. 시바타 카츠이에가 대표적이다.[100] 시마즈가의 전술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조금 어려운데 굳이 번역하면 '유인매복전술' 정도?[101] 사실 문제는 버림돌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걸 가신들이 자발적으로 했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자발적으로 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만약 주군인 요시히로가 여기서 죽었다면 가신들은 전부 나가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102] 아마도 시마즈 가의 영지인 사츠마가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크게 일조를 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사실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고.[103] 사실 어지간한 교단의 종주급이면 웬만한 다이묘 급이다. 대표적으로 혼간지 켄뇨. 물론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제대로 된 교단도 있었다.[104]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 직전 읊었다는 "때는 지금 천하를 지배하는 5월이로다(時は今 天が下知る 五月哉)"라는 시는 사실 히데요시가 바꿔치기한 내용이라는 소리. 이건 뭐 야사남이유자광도 아니고.[105] 세키가하라 전투 때 히데타다가 늦게 온 것이 사실은 이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히데타다가 늦어서 이에야스에게 욕을 먹었다는 것은 페이크고 실제로는 이에야스가 비밀리에 지시해서 일부러 늦게 온 것이 노부나가와 노부타다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주의했다는 설.[106] 노부타다는 노부나가 못잖게 능력이 있어서 멍청한 동생 노부카츠와는 많이 달랐다.[107] 다만 데려간 병사의 수가 적었다는 게 문제. 너무 어중간했다. 물론 노부나가는 미츠히데를 믿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겠지만.[108] 노부나가 부자를 죽이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뒷감당을 하기는 어려웠다는 말. 사실 당시 오다 가문은 전국통일 일보직전이었던 상태라 배신한 미츠히데는 오다 가문이 정비되기만 하면 답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컴백하자 순식간에 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