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Background)이란?
캐릭터들이 살아가면서 사건을 겪고 일으키는 공간을 뜻한다. 작품에 나오는 대다수의 문장과 묘사는 주인공 및 주역들의 언행을 따라가기 때문에 배경은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이기 쉽다. 그러나 배경은 소설의 장르부터 캐릭터들의 행동 및 사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실감'과 '개연성'을 부여하여 이야기가 보다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가령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연극 무대와 영화에서 본다면 몰입적인 측면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배경이 풍부하고 다양할수록 그 자체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가령 현실에 기반한 작품에서는 마법이나 드래곤을 볼 수 없지만 판타지에서는 볼 수 있다. 현실(이라는 배경)에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수 없고, 반대로 허구(적 내용을 다루는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타지 세계에 범주가 전혀 다른 SF의 우주전함 편대가 등장한다면 굉장히 어색하고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두 소재의 기반을 이루는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1] 즉 배경(세계관)은 작품의 설정을 정의하여 묶는 역할을 한다.
또한 좁은 의미로는 같은 작품 내에서 주인공과 캐릭터들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변하기도 한다. 결혼식장과 감옥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를 테니까. 하지만 결혼식장과 감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1차원적인 느낌과 달리 묘사를 덧붙이면 결혼식장이라도 피보라가 몰아칠 수 있고 반대로 감옥이라도 천국이 펼쳐질 수 있다. 가령 천재 캐릭터가 사회성이나 모종의 사정 때문에 스스로 독방에 감금된 채 살아가느라 이것저것 가져다놓고 사는 식.
이러한 배경이 엄청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면 배경이 캐릭터에 준하는 비중을 가지고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가령 판타지 세계의 늪지대, 마녀의 숲, 고블린 동굴 등은 그 존재만으로도 외부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도 보통 위험지역이 아니라 '뼈와 살이 분리되는' 늪지대, '사악한 미소녀(?!)' 마녀의 숲 등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며, 이는 다른 설정을 구상하는 데에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인물 ↔ 사건 ↔ 배경 3가지 요소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뻗어나가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역 A에 사는 인물 B, B가 겪는 사건 C, 그 C 때문에 생긴 지역 D...(무한반복)
이처럼 작품이 갖춘 자체적인 설정들이 많아지면 이를 통틀어 '세계관(universe)'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세계관일수록 '이 세계관이니까 가능하다'라는 독자적인 논리를 내세울 수 있지만, 반대로 하나가 어긋나면 나머지 설정들이 와르르 무너지기 쉬우므로 정교하고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나마 D&D 등의 훌륭한 데이터베이스가 있는 판타지물은 편하지만, 원피스처럼 독자적인 설정을 만드는 작품은 갈수록 괴로워지고 설정충돌이 빈번해진다.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는 개인이 아닌 회사 차원에서 제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2. 배경 만들기
배경과 설정을 만들 때의 팁은 다음과 같다. 전반적으로 핍진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현실에 기반한 배경이라면 상세한 조사는 필수다.
독자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라면, 해당 배경이나 설정이 맞는지 틀린지는 금방 간파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조사 끝에 구상해야 한다. 물론 작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조사해두면 된다. 아래의 독자적 설정에 관해서도 얘기하듯이 독자에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었다면 고증이나 기타 현실 문제(ex. 역사관 등)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한 대비를 해놓는 것이 좋다. 정 조사가 너무 귀찮거나 막막하다면, 필살기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실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를 사용하자. 농담이 아니라 이걸로 대부분의 문제는 해소할 수 있다(…).
-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한다.
설정이 치밀하고 정교한 것은 작품의 질을 높여주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독자에게 이해를 요구하여 진입장벽을 높이기 쉽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설정을 갖췄다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 과학적 원리나 가능성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고, 기억하기 쉽게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래서인지 설정을 제외한 배경 자체는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들이 많은데, 작가도 독자도 작품을 떠나 충분히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판타지처럼 가상의 세계관을 만들더라도 보통은 지명과 지리적 특징, 세계관상 위치, 주요 거주 종족 등만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특히 양판소에서는 그 이상 따위 바라지 않는다. 넣어봤자 기억하지도 읽지도 않기 때문.
- 세계관상 중요한 배경 및 설정은 반드시 명확하되 간략하게 언급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배경 자체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는 그 배경에 대해 알고 있어야 인물의 행보나 사건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명확하게 언급해야 한다. 설령 사실은 지구였다 식으로 배경 그 자체가 반전이 되더라도, 그 복선은 있어야 한다. 그럭저럭 스토리를 풀어가다가 뜬금없이 '사실은 모두 시공의 폭풍에 끌려가버린 것이었다'고 서술하면 퍽이나 흥미로울 것이다.[2] 독자는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소설을 읽으면서 서서히 몰입할 것이므로, 이것은 반전이나 추리물을 떠나서 '정보 제공'의 문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를 진행하다 말고 구구절절 설정을 늘어놓으란 말은 절대 아니다. 소설작법/구체적 요소의 체크리스트에서도 썼듯이 "그 세계사는 시험에 안 나온다."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만큼, 독자가 최소한 알아두어야 할 만큼만 적으면 되는 것이다.
- 독자적인 배경 및 설정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정리한 자료를 제공하라.
상술한 만화 원피스나 기타 작품에서는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이 독자적인 배경이나 설정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독자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중간중간에 자료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만화의 경우 단행본에서 연재분 사이사이에 공백이 남는 것을 활용해 질문코너를 넣거나 별도의 설정집을 판매하기도 한다. 소설은 대부분의 묘사나 표현이 활자로 이루어져서 입장이 약간 다르지만, 라이트 노벨처럼 삽화를 넣거나 매권 말미에 용어정리를 첨부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편이다.
작품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외부자료이기 때문에 분량의 제한은 없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작중에 나오지도 않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독자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작가가 나중의 연재를 위해 떡밥거리로 던져두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스토리를 풀어놓은 중견 작가의 여유이지, 당장 연재를 시작하지도 않은 작가가 그랬다간 십중팔구 설정놀음에 빠지기 쉬우니 자제하자. 그래서 초보 작가에게는 배경을 쓸데없이 크게 잡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 가령 판타지 세계로 가는 이세계물 같은 데에서 주인공이 현대적인 물건(ex. 핸드폰)을 들고 가면 다른 캐릭터들이 "그게 뭐냐"고 묻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라이터를 보여주면 "오옷! 불의 정령인가!"[2] 자극성을 추가하면 흥미도는 챙길 수 있지만, 이런 걸로 얻는 흥미도는 너무 일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