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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01:49:01

리지외의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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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외의 데레사
Thérèse de Lisieux
파일:fd3d60e45dbb235903cb6a2d5a341ac4.jpg
<colbgcolor=#000000,#000000> 성인명 아기 예수와 성면의 성녀 데레사
(Sancta Teresia a Iesu Infante et a Sacro Vultu)[1]
세속명 마리-프랑수아즈-테레즈 마르탱[2]
(Marie-Françoise-Thérèse Martin)[3]
별칭 소화(小花) 데레사
출생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오른 알랑송
사망 1897년 9월 30일 (향년 24세)
프랑스 리지외 칼바도스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수도자
소속 가르멜회
종교 가톨릭
시복 1923년 4월 29일,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25년 5월 27일, 교황 비오 11세
축일 10월 1일
(성녀 리지외의 테레사 축일)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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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의 기념, 존경4. 기타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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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
교황 비오 10세#
이 책[4]을 다 읽고 난 후 "만일 이 책이 가톨릭 정신을 대표한다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 나는 겸손과 대담함, 자유와 기율, 기쁨과 슬픔, 의무와 인애(仁愛), 강한 힘과 유연함, 은총과 자연, 어리석음과 지혜, 부유함과 빈곤, 공동성과 개성 같은 한 쌍을 이루는 대립 사이에 살아 숨쉬는 종합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덕(聖德)은 불타의 심성(心性)과 공자의 덕성(德性), 그리고 노자의 철학적 초연성(超然性)을 한데 합친 것과 같아 보였다. 24세를 일기로 죽은 젊은 수녀가 이러한 완덕에 도달했다니!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녀가 만일 그리스도 신비체(神秘體)의 불가결한 지체가 아니었던들 자기 개성을 어떻게 이렇게 충분히 실현할 수 있었으랴!
-우징숑(吳經熊).[5] 《동서의 피안》.[6] 309-310쪽. 김익진 옮김.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프랑스가톨릭 여성 수도자(수녀), 성인. 한국천주교회의 대다수 신자들에게는 '소화(小花)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는 호칭으로 잘 알려졌다.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9세, 성녀 잔 다르크와 함께 프랑스수호성인이다.

리지외의 테레사는 그녀의 영적 삶에 대한 접근의 간단함과 실용성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영향력 있는 신앙 생활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함께,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성인들 중 한 명이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녀를 "현대 최고의 성인"이라고 불렀다.[7]

비록 자신은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었고,[8] 만 24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특유의 실용적이면서도 깊이있는 영성은 신학자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가톨릭 교회의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가톨릭 신학계의 잔 다르크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1873년 1월 2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가 근처에 있는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시계공인 아버지 루이 마르탱 성인, 레이스 제조공이었던 어머니 젤리 마르탱[9] 성녀 슬하의 9남매 중 막내였다. 이들 가운데 테레사를 포함한 5명의 딸만이 어른이 될 나이까지 성장했다.

테레사의 가족은 매우 신앙심이 깊었는데, 본래 부모님도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혼했고, 4명의 언니들도 수녀의 길을 선택했을 정도였다.[10] 이러한 가정 속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인정받아 소화 테레사의 부모는 2008년 시복되었고, 2015년에는 성인으로 함께 시성되었다.#[11] 소화 테레사 부모의 일대기

파일:teresamary.jpg

테레사의 나이 5세였을 때 어머니가 선종했다. 그리고 테레사가 10살 때에 엄마 역할을 대신해 왔던 둘째 언니 폴린이 수녀원에 들어갔다. 테레사는 상실감에 빠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게 되었다. 가족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는데, 테레사가 집 방안에 있던 성모상이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체험을 한 뒤 곧바로 병이 치유되었다.[12] 이듬해에는 첫 영성체를 모시게 된다.

파일:teresafather.png

13살이 된 1886년 테레사는 자신도 수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다.[13] 그러나 어린 나이[14]로 인해 불허된다. 이듬해 1887년 이탈리아 로마 순례 때 당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테레사는 교황에게 자신의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는데,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언뜻 테레사의 신앙심을 높이 사서 격려해준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다짜고짜 보채는 어린 소녀 앞에서 마지못해 모호한 대답을 해준 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테레사가 계속 간청하자 보다 못한 바티칸 근위병들이 강제로(…) 끌고 나갔다.

파일:teresapope.jpg

다행히 테레사가 살던 리지외 현지의 주교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테레사의 결심을 확인하고서 가르멜 봉쇄수녀원 입회를 허락해주었다. 1888년, 나이가 불과 15세 때 일이었다. 이때부터 '아기 예수의 데레사'(Thérèse de l'Enfant-Jé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파일:teresasisters.png
(수녀가 된 친언니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테레사)

수녀원 생활 당시에 테레사는 부각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고, 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사는 이를 '작은 길'이라고 불렀다. 이후 수녀원 입회 이듬해인 1889년에 수련을 받은 데 이어서, 1890년에는 수도서원을 발하여 정식으로 수녀가 되었다.

파일:teresafinal.jpg
(결핵으로 투병 중인 테레사)

그러던 1896년 결핵에 걸려 각혈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결핵이 불치병에 가까웠고, 테레사의 건강은 치명적으로 나빠졌다.[15] 결국 1년 동안 투병하던 끝에 테레사는 1897년 선종했다. 불과 24세, 수녀원 생활 9년 만에 너무나도 짧은 생을 마쳤다.

3. 사후의 기념, 존경

테레사가 선종한 후, 가르멜 수도회는 <한 영혼의 이야기>(Histoire d'une âme)라는 제목으로 테레사가 수녀원 생활 동안에 쓴 자서전을 출간했다. 이 책은 뜻밖에도 신자들 사이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으로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생전에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테레사라는 수녀가 가톨릭교회 안에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스테디 셀러로 널리 읽히고 있다.

이에 힘입어 선종 26년 만인 1923년에 교황 비오 11세가 시복했고, 불과 2년 후인 1925년에는 성인으로 시성되기에 이르렀다. 다시 2년 후 예수회의 창립 멤버이자 자신보다 무려 3세기 앞서 활동했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선종 100주기인 1997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성으로서는 3번째로 교회학자로 선포하는 영예를 안았다.[16]

4. 기타

5. 외부 링크



[1] 라틴어 Teresia는 '테레시아'로 읽는 게 맞지만, 한국 가톨릭에선 Teresia라는 이름을 '데레사(테레사)'로 표기한다. 이는 아마도 스페인어와 영어의 영향으로 보인다.[2] 프랑스식 작명법이 국내에 생소할 수 있는데, '마리-프랑수아즈-테레즈' 전체가 하나의 퍼스트네임이며, 평소에는 '테레즈'를 줄임말로 사용했다. 참고로 소화 데레사 성녀의 가족은 본인 포함 9남매였는데, 남녀불문 모두 퍼스트네임 첫머리에 Marie(마리)를 돌림자로 사용했다.[3] 라틴어: 마리아 프란치스카 테레시아 마르틴(Maria Francisca Theresia Martin)[4] 소화 데레사 자서전[5] 1899∼1986. 중화민국의 법학자. 중화민국 헌법유엔 헌장의 기초에 참여했다. 1917년에 세례를 받고 감리교 신자가 되었으며, 1937년에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큰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6] 원제: 《Beyond East and West》. 런던 1952[7] 하지만 비오 10세가 이 말을 할 당시, 소화 데레사는 아직 정식으로 시복/시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그럼에도 가톨릭 교회에서 일찍부터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8] 건강상의 이유로 만 13세에 수녀원 기숙학교를 그만둔 이후, 더이상의 공교육은 받지 못했다. 다만 학창 시절 월반을 할 정도로 학업은 우수한 편이었고, 독서량도 상당히 많이서 지성적으로 탁월했다. 테레사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성녀가 굉장히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9] 결혼전 성은 게랭.[10] 테레사는 자신의 자서전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에 더 어울리시는 부모님을 제게 주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이 말은 리지외에 위치한 테레사 부모의 묘비에도 새겨졌다.[11] 이들 부부의 축일은 7월 12일인데, 바로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다.[12] 현재 프랑스 리지외에 위치한 소화 테레사의 옛날 집에는 이 성모상의 복제품이 전시 중이다. 진품은 테레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수녀원에 안치된 테레사 유해의 유리관 곁에 위치하고 있다.[13] 이러한 테레사의 결심은 자신의 독실한 신앙심에 더하여, 앞서 수녀가 된 언니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도 상당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된다.[14] 오늘날은 대개 만 18세 이상부터 수도회 입회가 가능하다.[15] 당시 투병기간 중의 한 일화로, 어느 선배 수녀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한 테레사를 대신해서 그녀의 수녀복에 고정용 핀을 꽂아주었는데, 그만 실수로 핀이 테레사의 살갗을 뚫은 채 하루를 지냈다. 그럼에도 테레사는 아픈 내색조차 없이 참고 지냈으며, 이를 뒤늦게 알고 사과한 선배 수녀에게 "덕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며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16] 앞선 1970년 가르멜 수도회의 대선배인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동시에 여성 교회학자로 선포되는 첫 주인공이 되었다.[17] 그러나 소화 테레사의 생전에는 아직 잔 다르크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잔다르크는 이후 1910년에 시복되었고, 10년 후인 1920년 비로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18] 프랑스 정부는 테레사와 귀스타브 에펠 두 명을 후보에 올렸으나 최종적으로 리지외의 테레사가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