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20:59:06

속말말갈

퉁구스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word-break:keep-all"
민족
<colbgcolor=#fff> 북퉁구스족 네기달족 | 어룬춘족 | 어웡키족 | 에벤족 | 오로치족 | 우데게족
남서퉁구스족 만주족 | 시버족 | 여진족
남동퉁구스족 나나이족 | 울치족 | 윌타
원시퉁구스족(추정)†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지역
다수 거주지 파일:중국 국기.svg 만주 | 파일:중국 국기.svg 청더 | 파일:중국 국기.svg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 |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극동 | 파일:러시아 국기.svg 시베리아
해당 지리적 인종 동아시아인 | 시베리아 원주민
언어 및 문화·사상
언어 퉁구스어족
사상 만주 민족주의
신화 만주 신화 | 샤머니즘 }}}}}}}}}
파일:말갈 7부.jpg
6세기 말갈 분포도

1. 개요2. 발해 이전 역사3. 발해와의 관계
3.1. 속말말갈 ≠ 발해3.2. 속말말갈 = 발해
4. 연구

[clearfix]

1. 개요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大)씨다
신당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은 말갈의 분파로 백산말갈과 함께 고구려에 일찍 복속된 말갈 분파다.

2. 발해 이전 역사

5세기 후반에 물길부여 땅에 침투하여 고구려 북부에 위치한 옛 부여 지역에 물길 족속이 정착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속말말갈로 불린다. 6세기에는 백산말갈과 더불어 고구려에 가장 먼저 복속했다. 말갈계 고고학 자료는 예맥계와는 꽤 다른 양상을 보이며 이들이 어느 정도 종족적 공통성을 띠고 있긴 하였으나, 적어도 그중 이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예맥계 요소가 대단히 비중이 높고 따라서 예맥인의 비중 또한 높았을 개연성은 분명함에 주목해야 한다.[1]

일단 속말말갈 같은 경우 그 분포 지역 중에 태조대왕~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미처 확보하지 못하고 물길에게 잠식을 허용했던 옛 부여 지역이 포함되고, 그 옛 부여 지역에 정착한 속말말갈 유적에서 부여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말갈식 도기인 통형관이 폭넓게 출토되는 게 속말말갈의 공통되는 고고학적 요소지만, 옛 부여 지역의 속말말갈은 그와 함께 부여식 토기인 서단산 문화의 쌍이도호가 널리 분포하는 게 다른 속말말갈 지역과는 꽤 다른 점이다.

물론 광개토대왕~문자왕 시기에 고구려는 속말말갈이 차지한 옛 부여 영역 전체는 물론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의 원뿌리인 옛 고리국(=북부여) 영역까지 죄다 점령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투사했다. 그 시점부터는 고구려 토기 양상의 특징이 더해지지만, 속말갈갈이 차지한 옛 부여 지역에서 여전히 부여의 문화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었음은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다.

또한 발해 건국 초기 육정산 고분군을 보면, 묘제와 출토 유물은 고구려적 요소가 기본이돼 말갈 요소도 꽤 많이 드러나는 반면 퉁구스 말갈계 특유의 공통 요소인 통형관이나 과판2형은 전혀 나오지 않으며 퉁구스 말갈계에서는 나오지 않는 짐승뼈가 공반되어 나타나는 예맥계 요소도 혼재해 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상층민으로 갈수록 고구려적 요소가 두드러지고 상대적으로 하층민일수록 말갈계 요소가 상대적으로 많이 보임은 중요하게 볼 사항이다.

이는 당나라 조정에서 본인들이 분산배치한 속말말갈 부족 중 오고소부락을 구태여 부여말갈이란 뜻인 '부투말갈'로 언급한 내용[2], 그리고 송서 발해전에서 발해국왕을 굳이 '오고성 부투부 발해염부왕'[3]으로 언급하는 문헌 사료와 교차 검증된다.

즉 이는 물길이 대대적으로 북쪽에서 이주해올 때 옛 부여 지역에 살던 부여인들이 다 몰살당하거나 문화적 정체성이 말갈화된 게 아니라, 속말수 근처 지역으로 이주해온 물길인들과 어울리면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유지하다가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어 고구려화되었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속말말갈이라 불리는 집단 안에는 통념대로 흑수 말갈과 뿌리가 같은 숙신계 부족도, 옛 부여 유민인 예맥인들도 함께 혼재해 있었고, 이들 모두 어느 정도 고구려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중 돌지계처럼 퉁구스계인 속말말갈 일부는 고구려에게서 벗어나 당나라를 선택했으나 그 나머지는 모두 정체성이 고구려화되었던 것이다. 대조영 집단이 그중 속말말갈과 어울려 살았던 옛 부여계였다가 고구려화된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건 물론이다.[4]

고구려와 당의 마지막 전쟁에서 속말말갈은 고구려와 함께 당에 맞서 싸우고, 고구려 유민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다. 후에 대조영의 세력이 발해를 건국할 때 걸사비우등 속말말갈도 함께한다. 그러나, 추장 돌지계[5]로 대표되는 속말말갈 내 내부 숙신계 세력 중 일부는 고구려 복속에 반발해 수나라에 투항하기도 했다.

3. 발해와의 관계

발해 문서의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서에 자세하게 서술되어있다.

3.1. 속말말갈 ≠ 발해

중국의 관천 정사서로 당나라 시기를 다룬 구당서에서 발해말갈의 건국자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 즉 분명 고구려 사회 기득권층 주류는 아니지만 분명히 고구려인임이 명시되어 있다. 중국 사서에서 '별종'이라 함은 별개 종족이 아니라, 주류 집단은 아닌 비주류지만 엄연히 속한 종속임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해 풍습이 고구려나 거란의 것과 비슷했다고 서술되었다. 신당서에는 속말말갈이 고구려에게 부속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했는데, 이는 서술 자체로만 봐선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대조영에 대해서는 강조점이 구당서와 명백히 다르다. 이는 당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에서 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용례가 신당서에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조영이 예맥계가 아닌 고구려와 무관한 숙신인이란 증거는 아님을 명심해야 겠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란 건 단순히 혈통과 민족 운운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보나 지연으로 보나 역사의식으로 보나 고고학적 요소로 보나 발해가 분명히 고구려와 계승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주장인 것이다. 삼국유사 에서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이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즉 종합해보면 대조영은 상술한 고고학 자료에서도 검증되듯 말갈족과 교류가 잦은 지역에서 성장한 옛 부여계 고구려인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젋은 시절을 여진족과 가까운 지역에서 자란 후일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가 있다. 대조영 또한 조상이 부여인이지만 본인이 말갈인들과 함께 살다보니 생활풍습과 친근감이 말갈인들과 있으나,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고구려인으로 살며 게다가 조상이 어디까지나 부여인이니 당연히 정체성을 고구려에 두었다. 중국사로 굳이 따지면 선비화된 한족이 세운 수당 황실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3.2. 속말말갈 = 발해

당나라의 신당서에는 발해가 본래 속말말갈이라고 한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등 건국의 주체가 말갈이고,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읍루의 동모산에 중심을 잡은 것으로 서술된다.

신라고려는 대체로 속말말갈이란 집단이 발해를 건국한 것이라고 봤다. 신라의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발해는 속말말갈의 후신"이라며 멸시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部落)으로 앙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전문 출처

이러한 생각은 고려, 그리고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 이전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삼국유사, 제왕운기는 발해를 속말말갈로 분류해 한국사의 방계 국가로 해석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결론에서 고려와 신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라는 발해가 고려 아니라고 했고, 고려는 발해도 고려 맞다고 했다. 이와 같이 된 건 나당이 고구려 직후 발해 존속 기간 동안 구축했던 국제 질서와 국가관이 큰 이유를 차지한다. 신라는 고구려 남부 지역과 중남부 일대의 유민, 안승의 고구려 왕통을 흡수하면서 고구려의 정통성을 통합했다고 생각했기에, 나중에 등장한 발해의 고구려성은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 건국한 '고려'란 사실 자체를 전면부정하긴 어려웠기에 고구려 '잔당'인 건 인정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 고구려의 주된 정통성은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고려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신라와는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신라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신라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의 핵심 지역인 패서 일대에서 부활시킨 '고려'였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는 삼국-신라-고려 순으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지지했지만[6] 이건 삼한통합 이데올로기와 연관이 있었을 뿐, 발해를 '고려'로 인정한다고 딱히 고려가 정통성 대립에서 불리할 건 하나도 없었다.[7] 고려는 옛 고(구)려의 핵심지를 모조리 움켜쥐고 있었던 데다[8], 시초부터 국호 자체에 딴지를 거는 주변국[9]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10]

때문에 발해에 대해선 전혀 껄끄러울 것 없이 명쾌하게 단도직입적으로 '형제'라고 부르면서 발해의 고구려성을 흔쾌히 인정하였다. 하지만 삼한일통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깨어진 신라 삼한통일 내 천하를 고려 왕조가 다시 수습했다는 내러티브까지 부정할 순 없었기 때문에 발해는 방계국가가 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고, 무엇보다도 엄연히 발해는 그 당대에 고려와는 달리 국제사회에서 고려라고 인정받지 못하여 그 국호를 온전히 쓰지 못했다.[11] 때문에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공식 인정해주면서도, 어디까지나 직계는 자신들임을 자신 있게 표방할 수 있었다.

4. 연구

송기호 著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연구총서 제35권)
최진열 著 발해 국호 연구 저서 참조


[1] 물론 굳이 첨언하면, 본디는 옥저인의 터전이었고 전연과 고구려의 압박에 못이긴 부여인들이 대거 이주해간 백산말갈 지역(=소위 말하는 훗날의 간도 지역 및 함겸북도 일대다. 참으로 우연이지만 조선 성립 전 이성계 가문의 주된 세력권에 속하기도 했었다.)보다는 예맥인 비중이 낮긴 했다. 백산말갈 지역은 속말말갈 지역보다는 적어도 백 년 먼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애초에 침입해온 퉁구스계 말갈까지 고고학적으로는 결국 전부 예맥화시켜버렸을 정도로 예맥인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말갈갈 또한 다른 말갈보다 고구려화 정도 및 예맥인 비중이 크게 높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2] 신당서 기재[3] 이것은 고구려나 발해에 대해 신당서 편찬자들이 보이는, 특유의 비하성 의도가 들어간 표현이다. 대조영 집단이 본디는 당나라에 끌려온 포로들이었음을 특별히 부각한 것이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포로기를 부각하는 표현과 사실을 굳이 골라서 쓴 것에 뭔가 의도가 없었다곤 보기 어렵다.[4] 실은 서양사에서도 갈리아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었다. 서로마 멸망 후 갈리아 전체가 여러 게르만족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적어도 남서 프랑스 일대는 강력한 갈로-로만적 전통의 유지가 문헌으로든 고고학적으로든 드러난다. 이 일대 실력자들은 적어도 메로빙거 왕조 때까지는 기독교계의 명분적 군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프랑크족 지배자들도 어쩌는 수 없이 한동안은 그런 주장을 인정했었다. 고구려사에서 다른 점은, 고구려가 결국 옛 부여 일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그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전통을 다시 예맥화했음이다.[5]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의 당나라 지휘관인 이근행은 이 돌지계의 아들이다.[6] 애초에 고려는 고구려에서 바로 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걸고 궐기했다. 그래서 시작부터 제후왕급인 군왕 같은 게 아닌 국왕을 칭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 연호도 그냥 썼다.[7] 현대 한국인들 중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만주 없는 고려가 무슨 고구려냐, 영토가 넓은 발해가 곧 고구려다, 라고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편견에 불과하다.[8] 고구려 건국 초기 일대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여기는 후기로 갈수록 정치적으로는 몰라도 인구밀집지역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전성기 고구려의 정치, 행정, 사회, 문화적 핵심 지역(수도권)은 서북한일대이다.[9] 거란조차 국호 자체를 문제삼지는 못했고, 구태여 속지주의적 사항만 들이대다 논박당했을 뿐이었다.[10] 후백제도 사실 '백제'란 국호를 널리 인정받았으나, 신라한테서는 그걸 한 번도 승인받은 바 없었기에 이 부분에서는 약간 하자가 있었다. 정작 신라를 신하국으로 삼게 되는 고려는 백제의 실체를 인정했고 중국계 왕조인 후당, 오월에게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신라 자체가 그때는 이미 후당한테서도 주체성을 부정당하던 국제 사회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다르게 생각할 여지는 있지만. 국왕인 견훤 개인이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신라에게도 인정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을 뿐이었다.[11] 현대에 거의 비슷한 사례로 대만과 북마케도니아가 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