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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1:13

여진족/역사

1. 개요2. 기원과 계통3. 역사
3.1. 금나라 건국3.2. 금나라 멸망 이후
3.2.1. 몽골(원)의 지배3.2.2. 조선과 명의 지배
3.3. 후금-청나라 건국
4.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
4.1. 고대4.2. 고려4.3. 조선

1. 개요

여진족의 역사, 특히 기원 및 13세기 금나라 멸망 이후와 17세기 청나라 이전의 부족으로서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2. 기원과 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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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만주 일대에 분포한 퉁구스계반농반수렵 집단이었다. 여진족의 전신 집단은 말갈족으로 불렸으며, 이는 물길과 같은 부족으로 비정된다. 말갈과 물길은 고대로 거슬러올라가면 숙신, 읍루계 부족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완전히 같은 집단이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유목민 부족 서로간에 동족 의식이 없는 경우도 많았으며, 같은 조상을 갖고 있어도 약탈과 전쟁이 이루어졌다. 이들이 살던 만주 지역은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었고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며 끊임없이 편입과 이탈이 반복되었다.

'여진'(女眞, Jušen주션)이란 이름이 문헌상으로 첫 등장하는 것은 902년 《요사》에서이다. 금나라 건국 이전에는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숙여진은 사실상 거란에 복속된 여진이었고, 생여진은 거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독립적이었으며 흑수말갈이 이에 해당되었다. 훗날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부가 생여진에 속했다. 명나라 시대에는 건주여진[1]해서여진, 야인여진 등으로 분류되었다. 이후 1635년 누르하치가 '여진'이라는 이름을 금하고 자기 부족을 만주족이라 정의했는데, 소수의 야인여진, 몽골의 코르친부와 호르친부 그리고 시버족이 포함되었다. 만주 팔기에 소속되지 않은 야인여진도 있었는데 나나이족(허저족 혹은 혁철족)이 이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읍루, 말갈이라고 불렸을 당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추운 겨울에는 땅굴 같은 깊은 집에서 거주하며 온몸에 돼지기름이나 오줌을 발라서 추위를 극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이는 몇몇 사람들의 풍습이나 민간요법 등이 확대해석하여 나타난 오해 및 비하적 의도로 왜곡된 정보인 듯하다. 주변 국가들에게도 이러한 비하적 이야기들이 나올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로 보는 것에 더 가깝다.[2]

3. 역사

3.1. 금나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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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후반부터 영가, 우야소 등의 지도하에 요나라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생여진(동부의 여진 세력) 완안부가 힘을 키웠으며, 1115년 완안아골타가 최초의 통일국가인 금나라를 건국하자 급속도로 상승세를 타서 북송해상의 맹을 맺고 요나라를 박살냈다. 그 다음에는 동맹국이었던 북송정강의 변을 통해 멸망시켜 북중국 + 만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여진은 과거 거란이 그들을 핍박했듯이 그들도 그들 아래에 있었던 유목민족을 핍박하고 분열시키던 중에 자신들이 요나라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금나라칭기즈 칸몽골 제국과 한번 박살났던 남송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했다(1234).

금나라 출신 무장인 포선만노는 1215년 만주 지역에서 동하를 건국했지만 1233년 몽골 제국구유크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그 외 요동 및 만주 중동부 일대에서는 여러 여진 군벌들이 난립했으나 1230년대 이전에 여러 세력들 역시 몽골에 의해 무너졌다.

3.2. 금나라 멸망 이후

3.2.1. 몽골(원)의 지배

금나라가 처참히 멸망했을 때, 중원에 살던 여진족 대부분은 학살을 당하거나 나중에 중원을 통일한 원나라 치하에서 중하계급으로 흡수되었다. 이래저래 고려로도 많이 귀화했다. 한족에 동화되거나 몽골인의 일부가 되지 않고 훗날까지 여진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주(요동)에 남아있던 소수에 불과했다. 거란과 융화되기도 했으며, 해서여진 예허부의 시조인 싱언 다르한은 본래 몽골 투메드부 사람이었다.[3]

3.2.2. 조선과 명의 지배

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
여진정벌
조선의 편집증적인 여진 기록의 일례.
조선의 대여진 정책과 그로 인한 번호(藩胡)의 증가.
조선 초기 여진족 분포도와 이동로

원나라가 고비 사막 이북으로 축출되고, 한족의 명나라가 들어서자, 여진족들은 명과 조선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면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의 세 부류로 나뉘었다.
그렇게 여진족은 분열된 씨족사회 상태로 명나라의 치하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명과 조선에 눌려 기도 못 펴고 있었는데, 명나라도 장군 이성량[4]이 요동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무렵까진 여진을 꽉 휘어잡고 있었다. 특히 조선이 국경을 건너 여진 토벌에 나서는 것을 명에서는 묵인하고 방관했다. 여진족이 계속 노략질을 하자 변경을 접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때때로 여진족 부락을 토벌했다.

조선 측의 토벌 기록을 보면 조선군 기병대가 마을에 들어가서 미적거리던 민간인은 학살 or 포로, 저항하는 자는 살해했으며, 집은 불태우고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서 뒤엎어버렸으며,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들이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역시 여진족이 변경을 침략하고 약탈한 터라 조선과 협력하여 토벌에 나섰다. 어쨌든 이런 토벌은 거의 누르하치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진족이 사는 땅은 개척하기가 힘든 땅이었다. 사실 만주 서단부분에 동북평원이라는 독일 면적에 맞먹는 거대한 평야지대가 있고, 연변 등 동단부 상당수 지역에서 농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만주 땅이 완전히 척박한 것은 아니었다.[5] 하지만 요나라금나라 시기에 대대적인 인구 유출에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만주 지역의 인구가 감소했다. 또 명나라가 요동 지방을, 조선이 함경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윗쪽으로 개척하기에는 여진족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어하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들고 치안도 나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려는 조선인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후기에 조선인들이 상당수 연변 일대로 이주해 정착해왔지만 이때는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여 만주족들이 지배 계층이 된지라 조선까지 가서 약탈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여진족이 힘을 기르면 무섭다는 것[6]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 가운데 세력이 큰 부족이 나타나면 충돌을 핑계로 기병대가 가서 짓밟아 놓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군사적 대응 외에도 거의 편집증적일 정도로 여진에 대한 정보 수집에 집착한 편이다. 종성, 회령 일대 여진 부족들의 마을 인구, 가구별 인원 수와 유력 가문의 족보, 아들이 몇명인지 같은 사소한 정보를 보고서에 있는대로 휘갈겨쓰며 달달 외우다시피 한 것이 대표적 사례.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 3월 24일 기사 2번째 기사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이 거의 여진족 마을 촌장에 빙의한 수준으로 평범한 동네 주민 하나하나까지 파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진족의 생활 양식은 유목민족보다는 반농 반수렵에 가까웠다. 유목을 안 한 건 아니지만(정확히는 반유목에 가까움), 주력 산업은 농업과 수렵, 채집. 땅이 척박해서 그런지 밭을 일굴 수 있는 곳은 모조리 개간해놔도 당연히 남쪽의 중국이나 한반도보다는 농업 생산력이 떨어졌지만, 최대한 농사를 지었다. 또 수렵으로 얻은 모피나 기타 부산물들을 팔고 식량을 확보하는 등의 교역도 중요한 부분. 누르하치 시절에는 명의 무역 봉쇄 한방에 크게 궁지에 몰렸고, 그간 쌓여온 것들까지 합쳐져 전쟁이 터졌다.

조선과 가까이 있다보니 개중에는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땅 안으로 들어와 사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을 조선에서는 '향화호인(向化胡人)' 혹은 '향화인(向化人)'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조선 땅에 들어오지는 않았어도 조선의 국경 인근에서 조선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살 경우에는 번호(藩胡)로 삼아서 성저야인(城底野人)으로 만들기도 하였다.[7] 이렇게 조선 조정에 복속된 여진족들은 조선에 복속되지 않은 여진족들에 대한 첩보 활동이나 조선군의 여진족 토벌 작전에서 휘하 병력들로서 참전하기도 하였었다.

이러한 번호(성저야인)들의 숫자는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늘어나서 1455년의 단종대 기록과 1588년 이일의 제승방략을 비교한 결과, 번호의 부락은 53개에서 289개로 5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번호의 호수는 800호에서 8523호로 10배 이상 증가하였다고 하는데 이걸 보면 아무리봐도 번호의 인구증가는 자연적인 인구증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가파르게 인구가 증가했으며 인구는 추정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최소 추정치가 4만명 이상이고, 설에 따라서는 무려 10만명에 육박할 수준으로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대여진정책이 여러모로 매우 훌륭하게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로 조선이 여진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기만 한게 아니라 명나라 비교 할 경우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여진족들을 관리했다고 볼 수 있다.[8] #

그러나 거칠고 황량한 북방에서 살아가며 약탈을 일삼던 난폭한 습성들을 채버리지는 못했던지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이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1609년 8월 25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에 그러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용인(龍仁)에 사는 박길상(朴吉祥)이 이끄는 80여 명의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향화인들이 용인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의 큰 길가에 7~8년 동안 살고 있으면서, 박길상이 부하 16~18명을 거느리고 말을 타거나 혹은 걸으면서 활과 화살 및 긴 칼과 몽둥이를 무기로 삼아서 집단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물건을 빼앗는 도적질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향화인들은 읍내의 땅을 원래 주인들한테 빼앗아서 농사를 짓거나 곡식을 마구 베어가는가 하면, 자신들이 키우는 수많은 소와 말들을 멋대로 풀어서 키우고 그 가축이 남의 땅에 들어가 곡식들을 먹어치우도록 내버려 두는 식의 행패를 저질렀다. 이런 행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관청에 알려 고발을 하면 관청에서 향화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관아로 나오라고 하는데, 문제는 관청의 명을 알리려고 온 사람한테까지 향화인들이 마구 때리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향화인들이 깽판을 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릴 정도였다.

그 밖에 15세기 조선은 여진족들에게 강대국으로서 여겨졌으며 그저 강대국으로 여겨지는 것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여진족들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려 이를 입증했다는 기록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9]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10]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11]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12]

3.3. 후금-청나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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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을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통제하던 명나라가 잇따른 암군들의 통치로 점점 위태해지자 1618년 1월 1일, 여진한국의 '쿤둘언 한' 누르하치가 '수러 겅기연 한'이 되어 요나라의 천조제 및 명나라의 만력제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대금국을 건국해 1619년, 훌룬 4부 중 예허부를 복속함으로써 표면적인 여진 통일을 완수했다. 1635년 10월 13일, '압카이 수러 한' 홍타이지가 조서를 내려 족칭을 만주로 개칭하고, 1636년 4월 11일에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반란으로 대순을 세운 이자성을 일편석 대전에서 제압하고 후에 명왕조의 영토를 완전히 지배했다.

중국 간쑤성(감숙성) 경천현[13] 완안마을이라는 곳에는 완안 성씨를 가진 여진족(정확히는 그들의 후예)들이 동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감숙성으로 도망간 사연은 대략 금 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완안올출의 아들이 살해당하자 몇몇 황족들이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의 여진족 후예들은 사당도 지었고 족보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14] 뿌리는 같은 여진족이지만 만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간쑤성의 여진족을 그냥 만주족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실제로 금나라 황족계 후손들 중 또다른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어 진짜 만주족이 되기도 했다.

4.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

4.1. 고대

부여에서 읍루를 복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니 한국사의 서장부터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고구려, 발해시대에는 말갈이란 이름으로 피지배층에 복속해 있기도 했으며, 신라에 내려가 9서당에 소속되어 살거나 신라에 살았고, 말갈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이 이들과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들은 침략자의 이미지이지만 꽤 오랜 시간 한민족의 피지배 민족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유목민 특성상 진짜 피지배를 당하고 있는것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하다.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등도 자기 영토 혹은 영향권 안에 있는 유목민들을 피지배민으로 여기기도 했으나 거기 살던 유목민들 중에는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반란(?) 혹은 침략을 벌여서 그러한 나라들을 멸망시킨 유목민들도 많았다.

《송막기문》에[15] 거란인과 발해인(고구려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거란은 발해인에게
'논밭을 주고 그 부입을 덜어주었으며 무역이 오고 가고 시장을 모두 탈취하지 않았다'(給以田疇, 捐其賦入, 往來貿易, 關市皆不征)
라고 했으나,
'전쟁이 있으면 곧 앞서 말을 몰게 하기 위하여 부렸다.'(有戰則用為前驅)
라고 하여 전시(戰時)를 위한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송사》와 《송기》에는
'발해의 병마와 토지는 해장[16]에 비해 풍성하다. 비록 거란에 힘써 일하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 원한을 품고 있다.'(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
라는 언급이 나와 발해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음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은 고려나 여진족과의 전쟁에도 발해인을 강제 동원하여 선봉에 세웠다. 특히 여진족과 싸움을 붙인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여진족과 발해인이 사이가 나빠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거란국지》 1116년 기사에
'대저 요동에는 일찍이 여진과 발해가 원수여서 전호가 곧 양민들로 하여금 여러 번 명하여 전쟁하게 했다.'(蓋遼東夙與女真, 渤海有讎, 轉戶則使從良, 庶幾效命敢戰)
라고 기록했다. 또한 《금사》 <호사보 열전> 에서 여진족 호사보가 거란에게 사신인 척 파견되어 정탐하다 발해군과 마주치자 발해군은 오랑캐를 향해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말하기를
'들으니 여진이 난을 일으키고자 한다는데 너희들은 참으로 나쁘도다.'(遇渤海軍, 渤海軍向胡沙補且笑且言曰: 聞女直欲為亂, 汝輩是邪)
라고 말한다. 즉
'야 너희 여진족 녀석들 거란을 상대로 반란 일으키려다가 이제 와서 사신 보내고 꼬리 내리냐? 이런 졸렬하고 간사한 족속들 같으니'
라고 욕한 것이다. 발해인들이 얼마나 여진족에 대해서 안 좋게 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골타의 경우도 《금사》 1114년 기사에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로 하여금 거짓으로 도망치게 하여 그 고향 사람들을 불러놓고 '여진과 발해는 같은 집 식구이니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야 (거란의) 죄를 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망동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서 죄가 없게 해야 한다.'(召渤海梁福, 斡答剌使之偽亡去, 招諭其鄉人曰: 女直, 渤海本同一家, 我興師伐罪, 不濫及無辜也)
고 하여 여진과 발해를 한 집안이라고 언급을 하지만 곧
'딴 생각 말고 우리 따라와라?'
라고 말하게 하여 사실 세력 흡수 목적임을 천명했다.

《금사》 1116년 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드러난다. 고영창이 동경을 근거지로 삼아 발해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금나라에 달불야를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제안한다.[17]

이에 《금사》 <알로(斡魯) 열전> 에
'오래지 않아 달불야가 영창과 탁자를 잡아 바치니,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하여 요나라 남로의 계적여진(요나라, 즉 거란 국적의 여진)과 동경의 주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알로를 남로도통과 질발극렬에 임명하여, 오준에 남아 동경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나라의 법을 폐하고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맹안모극을 설치하여 본조(금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未幾, 撻不野執永昌及鐸刺以獻, 皆殺之. 於是, 遼之南路系籍女直及東京州縣盡降. 以斡魯為南路都統, 迭勃極烈, 留烏蠢知東京事. 詔除遼法, 省賦稅, 置猛安謀克一如本朝之制.)
즉 얼마 후 고영창을 배신하고 정복 후 죽여버린 다음 그 세력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하다.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0,000명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18]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했는데 동원과 강제이주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19]

《금사》 <병지> 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게 된다.[20]

《금사》 <희종(熙宗) 본기> 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발해인들을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21]

《금사》 <병지> 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한다.[22]

《금사》 <세종(世宗) 본기> 에서도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23]

다만 같은 고구려 유민에 의해 세워졌고,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던 고려에서조차 한족의 글자인 한자를 썼으며, 형사취수 같은 풍속은 애초에 사라지되 서옥제 즉 데릴사위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남아 있었다. 즉 송나라나 몽골 사람들이 고려인들을 두고
"글도 알고 불교 믿고 하는 것이 꼭 한족들 같아 다름이 없다"
고 한 것을 감안하면 이를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여기서 '한족들의 풍습을 강제당했다'는 말을 꼭 1930년대 일본제국에 의한 한민족 말살통치와 동치시켜 볼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하여튼 위의 기록들을 보면 북방에서 꽤 많은 숫자를 유지하며 살고 있던 한민족(발해)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거란족과 여진족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위의 선비족 원씨(탁발씨) 황족의 후손인 원호문의 《중주집》에 의하면 요나라에 의해 발해인은 귀족들을 제외하면 전부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학살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요동 지역을 관리하는 심왕 자리에 고려 왕족인 왕씨를 임명했다는 기록이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세 차례나 요동 정벌을 계획했던 것을 보면 많은 수가 한족에게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15세기 무렵까지는 발해인의 집결지였던 요동에는 동화되지 않은 고려인들이 적지 않게 살았던 듯하다.

발해인들이 산둥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에도 고려 방면에서 북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 살게 된 고려인들의 경우, 몽골과의 전쟁으로 포로가 되거나 몽골군에 항복한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는 훗날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몽전쟁 및 대몽항쟁을 지속한 삼별초 역시 기존의 좌•우 야별초에 몽골에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포로 출신들만 모아서 구성한 부대인 신의군이 더해져서 삼별초를 이루었다.

물론 그렇다고 요동에 발해인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강제 이주는 송나라 공격에 동원된 발해인 병력 3만여 명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다수는 요동이나 요서의 거란 내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에서도 요양발해인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말선초의 요동정벌이 무산되고, 명나라의 통치가 장기화되면서[24] 결국 대부분은 한족이나 만주족에 동화되고, 일부는 조선으로 가서 한반토 본토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서만주의 몽골족과 접촉하면서 몽골족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4.2.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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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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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만주'는 이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이었다.[2] 그런데 그런 기록이 나올 만큼 초창기 이들의 거주지역이 추웠긴 했다. 후대의 여진, 만주족 시대에는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 현 랴오닝성 일대를 중심지로 삼다가 중원으로 넘어갔으니 해당사항이 없지만 초창기에는 바로 한민족 국가들과 거란족 등에 막혀서 몹시 추운 현 헤이룽장성, 끽해야 지린성 동부 일대가 중심지였고, 한반도로 침투한 말갈, 여진족도 역시 한민족에게 막혀서 함경도 쪽에 주로 거주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시베리아의 냉기가 직빵으로 밀려오는 곳이 이들의 주 거주지였고, 이들 지역은 농사짓기에는 좋은 토질을 지니고 있었어도 겨울 평균기온은 영하 20도에 심하면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현대와 같은 난방이나 로션도 없던 시대에 특히 경쟁에서 밀려 따뜻한 거주지를 차지하지 못한 부족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피부가 갈라질 정도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3] 예허부는 그래서 자신들이 다른 여진 부족들보다 우월하다 여겼고, 해서여진을 리드하면서 건주여진과 자주 충돌했다. 건주여진의 여진족 통일 후 예허부는 몽골의 황족(황금씨족)인 보르지긴씨(보르지기트씨)와 더불어 황후족으로 우대받게 되었다.[4] 조선 사람의 후손으로 성주 이씨였다.[5] 정확히는 토질 자체는 괜찮은데 기후가 그렇다 보니 현대 농업기술이 도입되고 난 뒤에야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다. 전근대에는 제한적인 농업만이 가능했고 북대황(北大荒, 세계 전체 흑토지 면적의 5분의 1 가량을 차지한다) 같이 현대에도 유명한 토지를 개간하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6]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이 평소에 올적합(兀狄哈)과 올량합(兀良哈)을 알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하기를 즐겨하며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고 진중(陣中)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한곳에 모여 사는데, 3, 400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00명으로도 우리 나라의 1만 군사를 당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당시 여진족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록이 나온다.[7] 다른 말로는 번리(藩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8] 조선전기 두만강유역 ‘女眞 藩籬・藩胡’의 형성과 성격, 고려사학회, 한성주, 2010, vol., no.41, pp. 163-201 (39 pages)[9]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 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는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10] https://www.fmkorea.com/5366988869[11]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건 당연한일이었다.[12]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을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13] 경안현으로 잘못 알려짐. 중국어로는 '징촨'[14] 출저: 역사스페셜(만주대탐사 2편, 금태조 아골타 신라인의 후예였다).[15] 당 고종대인 648년에 이 거란 지역에 설치한 기미주의 이름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이후 거란의 추장들은 당 조정으로부터 현지 기미주 수령 자격으로 송막도독(松漠都督)에 임명되었다. 발해의 개창으로 이어진 유명한 이진충 역시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송막도독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16] 해족의 영역을 가리킨다.[17] 원문 : 閏月, 高永昌據東京, 使撻不野來求援[18] 원문 : 金人慮其難制, 頻年轉戍山東, 每徙不過數百家, 至辛酉歲盡驅以行[19] 원문 : 至辛酉歲, 盡驅以從, 其人大怨[20] 원문 :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21] 원문 : 天眷元年 六月 乙未, 詔百官誥命, 女直, 契丹, 漢人各用本字, 渤海同漢人[22] 원문 : 迨夫國勢浸盛, 則歸土地, 削位號, 罷遼東渤海, 漢人之襲猛安謀克者, 漸以兵柄歸其內族, 熙宗皇統五年, 又罷遼東漢人, 渤海猛安謀克承襲之制, 浸移兵柄於其國人, 凡漢人, 渤海人不得充猛安謀克戶。猛安謀克之奴婢免為良者, 止隸本部為正戶[23] 원문 : 丙戌, 制漢人, 渤海兄弟之妻, 服闋歸宗, 以禮續婚者, 聽[24] 이 무렵이 결정타였던 걸로 보이는데 명나라에서는 요동 지방을 더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원래 인구밀도가 낮았던 이 지역에 이주를 많이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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