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기찰정무위원회 초대 위원장 | ||
한문 | 宋哲元 | |
한국식 독음 | 송철원 | |
영문 | Song Zheyuan | |
자 | 명헌(明軒) | |
출생 | 1885년 10월 30일 청나라 산동성 낙릉현 | |
사망 | 1940년 4월 5일 중화민국 사천성 면양현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없음. | |
직업 | 정치가, 군인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열하사변에서 활약해서 항일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차하얼성 정부주석, 하북성 정부주석 등을 지냈으며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나 루거우차오 사건을 오판하여 몰락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산동성 낙릉에서 태어났다. 1902년 군에 입대, 육건장의 부하가 되었는데 이때 서북군벌 펑위샹과 인연을 맺어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났을 때 진압에 참가했고 펑위샹의 심복으로 지내다가 1924년 2차 직봉전쟁에 참여했으며 북경정변에 참여, 차오쿤의 직예군벌 정권을 퇴진시키는데 일조했다. 국민군이 조직되자 한푸쥐, 스여우싼, 쑨롄중 등과 함께 승진하여 국민군 1군 예하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에 열하도통을 지냈다.1926년 직봉풍전쟁에서 찰동의 방어를 맡았으나 장쭤린, 옌시산, 우페이푸의 협공으로 펑위샹은 하야하고 소련으로 도주했으며 잔류한 국민군은 패배했다. 하지만 그해 7월, 광동성의 중국국민당이 우페이푸의 병력이 하남, 섬서에 집중된 틈을 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전황이 바뀌었고 이 기회를 포착한 펑위샹이 소련에서 귀국, 중국 국민당 가입을 선언한 이후 북벌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2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이에 쑹저위안도 국민혁명군 2집단군 4방면군 총지휘 겸 15군 군장에 임명되어 봉천군벌과 교전했고 국민혁명 완수 이후 섬서성 주석 겸 국민혁명군 2집단군 2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2. 반장전쟁
1929년 펑위샹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장제스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여 하야한 이후 펑위샹을 대신하여 손량성, 석경정 등과 함께 서북군을 지휘했으나 1929년 10월 10일 편견회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이에 난징 국민정부는 10월 11일 쑹저위안을 면직하고 토벌령을 발동함에 따라 2차 장풍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탕성즈 등이 지휘하는 토벌군과 뤄양 등지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벌였으나 11월 임여진 전투에서 패하여 서쪽으로 패주했다.1930년 중원대전에 참가, 3군단장에 임명되어 섬서성을 공격했으나 농해철도에서 중앙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장쉐량이 관내로 진출하자 1930년 10월 15일 동북군에 투항하였고 휘하 부대는 29군으로 개편되어 29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29군을 이끌고 열하 수비를 맡았다.
2.3. 항일의 맹장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장쉐량이 열하로 퇴각해온 후 1932년 왕징웨이 등의 비난을 받아 하야를 통전하자 반발하여 장쉐량과 진퇴를 같이 하겠다고 선언했다.1933년 일본군이 열하사변을 일으켜 맹공을 퍼붓자 대도대를 조직, 희봉구에서 일본군에게 맹렬하게 항전하여 전국적인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일본군은 전 호남독군 장경요 등을 이용하여 쑹저위안을 회유했지만 쑹저위안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5월에 일본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다. 옛 주군 펑위샹이 1933년 5월 26일 장자커우에서 차하얼민중항일동맹군을 결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려 하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북평분회에 의해 무장해제된 이후 8월에 차하얼 주석에 임명되었다.
1935년 6월 5일,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체포되는 장북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쑹저위안의 사과를 요구했고 이 때문에 6월 18일 주석에서 면직되어 차하얼성 민정청장 겸 29군 부군장인 친더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35년 6월 27일 체결된 진토 협정에 따라 차하얼을 떠나 베이핑으로 철수했다. 일본은 쑹저위안을 포섭하여 화북분리공작에 동참케 하려 했으나 쑹저위안은 거부하고 6월 29일, 일본의 사주로 일어난 백견무의 폭동을 단호히 진압했다. 이 덕분에 7월 17일 청천백일장을 수여받고 평진 위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이 일어나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수립되자 하북-차하얼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립된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하북성 주석에 임명되어 하북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935년 12.9 운동이 일어났을 때 베이핑학생연합회는 쑹저위안에게 공개서한을 발송해 항일운동을 지지하고 합작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은 쑹저위안이 몹시 거슬렸는데 1936년 3월 베이핑의 일본 대사관 부무관 이소타니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히사이치에게 쑹저위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쑹저위안은 오직 난징의 명에 따르고 있으며, 우리 쪽의 위령을 완전하게 행사할 수 없다. (...) 우리의 자치공작이 궤도를 회복하는 데는 쑹저위안을 압박하여 우리에게 복종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주둔군을 증강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톈진의 증병시기를 앞당겨, 반드시 4월 중에 실현할 것을 요청한다. |
이에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방공과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신축조약을 위반하고 1936년 4월 17일 톈진에 주둔한 일본군을 6천명이나 증강하여 진황도에 상륙시켰다. 국민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일본은 막무가내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5월 29일 외교부 아주사국장 고종무를 베이핑에 파견해 쑹저위안, 친더춘과 회담하게 했는데 쑹저위안은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장성항전에서 활약하여 명성이 높았던 쑹저위안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북방국 연락국장 왕세영 등을 파견하여 쑹저위안의 29군 내부에 설득 공작을 펼쳤고 마오쩌둥은 1936년 8월 14일 쑹저위안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의 처형을 주장했다.
2.4. 중일전쟁과 죽음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낙릉에서 휴가 중이었다. 장자충, 풍치안, 친더춘 등에게 보고를 받고 처음에는 분개하여 단호히 섬멸하라고 지시했으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회를 보아 대처하여 위기를 피해야 한다. 지금 일본이 아직까지 중국에 대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약간의 양보를 표시하여 가능하다면 국부적으로 해결하라."라고 전보를 쳤다. 이후 치셰위안, 장자충, 진각생 등을 파견하여 일본군과 화평교섭을 하였다.베이핑의 지배권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군의 의도에 대해 오판하여 장제스의 항전 명령과 휘하 장령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중일전쟁이 폭발하는 단초를 낳고 말았다. 나중에야 상황을 깨닫고 방어사령부를 설치, 일본에 저항하려 했지만 베이핑-톈진 전투에서 패하여 베이핑과 톈진 일대가 함락되었고 이후 펑위샹의 6전구에 소속되어 베이핑 탈환전에 투입, 1집단군 사령관으로 항전을 수행했으나 펑위샹의 지시에 불복종하다가 산동 전역에서 도주했다. 29군은 해체되었고 각종 질환에 시달려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어 1940년 4월 5일 사천성 면양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