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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8:55:00

쑤파누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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쭘말리 싸이냐쏜 분냥 보라칫 통룬 씨쑬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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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초대 국가주석
쑤파누웡
ສຸພານຸວົງ | Souphanouvong
파일:쑤파누웡.jpg
출생 1909년 7월 13일
프랑스령 라오스 루앙프라방
사망 1995년 1월 9일 (향년 85세)
라오스 비엔티안
재임기간 초대 국가주석
1975년 12월 2일 ~ 1991년 8월 15일
학력 그랑제콜 파리 공과대학교
가족 아버지 : 분콩 왕자
어머니 : 카무안 공주
이복형제 : 쑤완나 푸마
소속 정당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CC0000, 사이즈=.9em, 글자색=#FFD700, 내용=라오 인민혁명당)]
약력 라오 인민혁명당 주석[1]
라오인민민주공화국 주석[2]

1. 개요2. 생애3.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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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9년에 태어난 라오스 왕국왕친(王親)[3]이자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의 초대 주석. 붉은 왕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며 현대 라오스의 역사적 운명을 바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힌다.

다른 동남아 유명인들이 그렇듯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2권이나 한국 언론 등지에선 영어식으로 '수파누봉'이라 한다.

2. 생애

라오스 왕족 출신인 그는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이왕(二王)이었던 분콩(Bounkhong) 왕자의 세 아들 중 하나였으며 라오스 왕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 쑤완나 푸마의 이복동생이었다. 다른 두 왕자들과 다르게 그의 모친은 평민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가정환경은 이후 그가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20대에 베트남에서 유학한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호치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1950년 8월 공산주의 정당인 빠텟 라오를 세우고 쑤완나 푸마 라오스 왕국 총리와 팽팽하게 대립하였는데 빠텟 라오 임시정부 수상이었던 그는 빠텟 라오 창건 이후 "빠텟 라오는 '조국 라오스', '라오스의 땅'으로 진정한 라오스 인민의 정당이며 지금 정부는 프랑스의 꼭두각시이다!!" 식의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라오스 왕국과 계속된 분열과 계속된 냉전싸움을 반복하였고 베트민과 더불어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953년 라오스 삼네우아에서의 승리는 베트민과 그가 지휘하는 파테트 라오가 연합하여 이룩한 승전이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 우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라오스 평화 정상회담 때에도 겉으로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왕실을 유지하는 척 기회를 보면서 라오스를 공산화시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하고 미국의 인도차이나반도 지원 중단을 계기로 전세는 빠텟 라오에게 기울어졌고 1975년 마침내 라오스의 공산통일을 이뤄냈다.

빠텟 라오가 일당체제로 집권하면서 그는 초대 주석에 취임하였으며 까이쏜 폼위한은 정부수상에, 누학 품싸완은 정부 부수상에 임명됐다. 빠텟 라오의 이름을 라오 인민혁명당으로 바꾸고 공산주의 정책을 시작했으며 폐위된 싸왕왓타나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탄압하고 라오스 왕국의 우익, 자본주의 세력들, 소수민족들을 재교육소로 보냈다. 단 공산화 전까지 쑤파누웡과 대립했던 이복형 쑤완나 푸마 총리는 사형당하지 않고 공산정부의 고문을 지냈다.

비슷한 시기에 극단적인 폭압적 공산주의 통치를 행하면서 자국민들과 이전 캄보디아 왕국과 크메르 공화국 정권의 구 인사들을 수십만명이나 죽였던 남쪽 이웃나라 민주 캄푸치아의 공산주의 독재자이자 집권 세력이었던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였던 폴 포트에 비하면 온건한 편에 속했으며 그의 정책은 실패했지만 까이쏜 폼위한 2대 주석과 함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만 노력하였다.

1978년농업을 집단체제로 바꾸어 경제 공산혁명을 시도했지만 해안선이 없는 내륙국에 내전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더불어서 반공주의 국가였던 태국미국의 원조 단절, 중산층의 도주 등으로 실패하자 결국 1986년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해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를 약간 수용하였다.

1991년 퇴임 후에도 정치인으로 정치생활을 하였고 1995년 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3. 출처



[1] 1950년~1975년 12월 2일[2] 1975년 12월 2일~1991년 8월 15일[3] 왕의 친척이 공산주의 국가의 정부수반이 된 유일무이한 사례다. 정부수반급의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도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프랑코 정권 시절 좌파들의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