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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맥퀸 Steve McQueen | |
본명 | 테런스 스티브 맥퀸 Terrence Steve McQueen |
출생 | 1930년 3월 24일 |
미국 인디애나주 비치 그로브 | |
사망 | 1980년 11월 7일 (향년 50세) |
멕시코 치와와주 시우다드후아레스 | |
국적 | 미국 |
가족 | 아내:닐 애덤스(1956~1972) 앨리 맥그로(1973~1978) 바버러 민티(1980~1980) 딸: 테리 맥퀸(1959년생, 1998년 사망)[1] 아들: 채드 맥퀸(1960년생, 2024년 사망)[2] |
신체 | 177cm |
지지 정당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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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 배우. 1960 ~ 70년대의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유명 배우이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으며, 외모는 꽃미남이 아니라 땀내 나는 거친 마초 이미지지만, 그 남성적 매력이 강렬하게 풍겨 개성적인 매력을 뽐낸다. 그는 실제로 속도광에 골초에 마초였다. 그래서인지 충동적으로 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의외로 일본에서는 활동 당시 인기 순위에서 줄곧 상위권에 있었다. 일본[4]에서 광고도 찍고 여러 번 왔던 덕이기도.
2. 생애
2.1. 배우 활동 이전
맥퀸은 서커스단에서 스턴트맨을 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맥퀸이 태어난 후 곧 헤어졌다.[5] 먹고 살기 위해 매춘부 일을 계속 해야만 했던 어머니는 홀로 그를 키울 형편이 못되자 일찌감치 친정에 맡겨버린다. 거기서 맥퀸은 어머니의 외삼촌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 사람은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맥퀸은 후에 술회하길 "나는 남자로서의 모든 것을 그에게 배웠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핏줄에 흐르는 속도광 기질이 나왔는지, 소년시절부터 자전거를 타고 마구 질주하였다곤 한다.어머니는 새신랑을 들이곤 맥퀸을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이때부터 그의 좌충우돌이 시작되는데, 새아빠라고 데려온 사람이 모조리 망나니에 폭력을 휘두르던 이라 맥퀸은 밖에서 나돌곤 했다. 15세에 벌써 그는 길거리에서 몇몇 어린 양아치들과 어울리며 도둑질을 저질렀다. 맥퀸은 스타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양부를 "개새끼"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양부가 엄마를 무지하게 팬 것도 모자라, 맥퀸을 계단 밑으로 던져버리는데, 이에 맥퀸은 양부에게, "한번만 더 내 몸에 손을 댄다면 내 맹세하는데 당신을 죽여버리겠어" 라고 협박한다. 망나니 양부도 이런 반응에 쇼크를 먹었는지, 어머니를 설득시켜 맥퀸을 소년원에 보내게 된다.
소년원에서 몇 년을 썩은 맥퀸은 16살 때 소년원에서 나온 뒤 여기 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상선 선원, 창녀촌 삐끼, 서커스단 홍보꾼, 벌목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원체 반골 기질의 문제아 스타일이라서 어느 일이든 오래 하지 못하고 일찍 잘렸다.
17살때 미합중국 해병대로 입대했다. 역시나 맥퀸은 맥퀸이었는지 곱게 군 생활을 하진 않았다. 군 생활 동안 해병대 상관한테 대드는 등 말썽도 많이 부리고 사고도 많이 쳐서, 이병에서 일병으로 진급[6]했다가 사고 쳐서 도로 이병으로 강등되기를 7번이나 거듭했을 정도였다. 주말 외박을 나가서 애인과 노느라 복귀 시한을 넘긴 뒤 무려 2주일간이나 안 돌아오며 탈영 상태로 도망다니다가 결국 해군 헌병에게 붙잡혀 영창에 6주간 수감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군생활을 했지만, 훈련 중 사고에서 해병 전우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해내는 사건으로 인해 군생활 후반부는 잘 풀리게 된다. 혹한기 훈련 도중에 수심이 깊은 빙판 위를 지나가던 전차 밑의 얼음이 깨지면서 전차가 얼음 밑으로 빠져버렸다. 다른 해병들은 놀라서 벙쪄있는데, 주변 빙판도 깨져가서 위험한 상황인데도 맥퀸이 혼자 순식간에 달려가서 다 가라앉기 직전의 전차 위로 올라가 다섯 명의 해병들을 끌어올려서 생명을 구해냈다. [7] 맥퀸이 영화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도 대단한 용기와 순발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맥퀸은 하루아침에 부대 내의 문제아에서 영웅으로 180도 다른 취급을 받게 됐다. 모범적인 해병들만 차출되는 미국 대통령의 요트 호위대로 차출되어 거기서 근무하다가 1950년에 명예 제대를 했다.
2.2. 배우 데뷔 후
1952년에 뉴욕에서 연극 극단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무명 시절엔 연기만으로는 수입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오토바이 레이스 대회에 참가해서 입상하여 상금을 타가기도 했다.1955년부터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헐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점차 스타로 떠올랐다. 같은 해 스타의 산실이었던 액터스 스튜디오에 마틴 랜다우와 함께 유이하게 합격해 훈련 받기도 했다.
1963년 라이프지는 스티브 맥퀸을 다음과 같은 칭찬으로 평했다. "잘난 체하는 캐그니, 텁털한 보가트, 거칠게 다듬은 다이아몬드의 가필드를 겸비한 배우".
남자 중에 남자였던지 자연인으로서도 온갖 마초성을 내뿜었던 터라 뒷얘기가 상당히 많다.
첫째로는 미친 듯한 속도광에 운동광. 이는 아버지부터가 스턴트 운전수였던 만큼 핏줄에 흐르는 기질이었던 듯싶다. 모터사이클, 버기카, 스포츠카, 경비행기 등 다양한 것들을 모는 데 미쳐 있었고 소질도 있었다.[8] 평생 오토바이 201대, 자동차 55대, 비행기 5대 등, 아무튼 질주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수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동료 제임스 코번은 "커다란 장난감을 좋아했던 덩치 큰 어른이" 라고 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었다 하여 사치를 부린 사람은 결코 아니다. 사실 그는 이 특별한 취미 외에는 소문난 구두쇠로 유명했고, 또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불우한 어린아이들을 돕는 데 거금을 쾌척했던 사나이였다.
그의 영화들 중 하나도, 그의 카레이싱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듯한 영화로서, 스턴트 없이 위험한 장면들을 그가 직접 소화하며 혼신을 다해 찍은 《르망》이 있다. 본래는 실제 르망 레이스에 드라이버로 참전하려고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극영화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자체는 여러 곡절로 인해 망했다는 평을 듣지만.[9] 하지만 레이싱 팬들에게는 거의 성역으로 취급받을 정도의 영화이며 오히려 르망의 실제 분위기와 지리함, 끔찍함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영광을 추체험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런 그의 레이싱에 대한 열망은 그의 수명을 깎아먹게 된다. 가장 큰 원인은 당시 방염복 재질로 쓰이던 석면이다.[10]
두 번째로는 여성편력이 있다.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했고, 좀 더 나이 먹어서는 당시 잘나가던 영화 제작자 로버트 에반스의 아내였던 당대 최고의 스타 앨리 맥그로를 꼬셔 결혼에 성공한다. 둘의 결혼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부인이었던 바버러와는 1년밖에 살지 못하고 요절한다.
세 번째로는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신인 시절부터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자신의 비중을 당당하게 요구하곤 했다고 한다. 황야의 7인 출연 당시 이미 대배우였던 율 브리너보다 더 주목을 받고 싶어 그의 말과 총이 자기 것보다 눈에 잘 띈다고 지속적으로 투덜대며 시비걸다 율 브리너가 자꾸 그러면 모자를 벗겠다고 하자(율 브리너는 대머리 카리스마 배우의 정점으로 불린다.) 그제서야 멈췄다. 타워링에 함께 출연한 폴 뉴먼과의 라이벌 구도로도 유명했다. 후에 대성공한 이후로는, 오히려 쉬고 싶다며 쏟아지는 출연 요청을 모조리 거부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건방지다거나 오만방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런 그의 자신감은 주변 많은 이들을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출연 조건으로 대량의 물품을 공짜로 줄 것을 요구하는 기행(?)으로 유명했다. 대개 볼펜, 청바지, 일회용 면도기 같은 값싼 생필품이나 학용품 종류를 수십 상자씩 챙기곤 하여, 저 인간이 왜 저러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이 물건들을 한 소년원에 기증하고 있었다. 극히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맥퀸 자신도 소년원 생활을 했고, 대성한 후에도 그 시절을 잊지 않았던 것. 꽤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알려진 사실이다.
3. 출연 작품
- 《지옥의 영웅》 (1962년)
돈 시겔 감독의 전쟁 영화.
- 《대탈주》 (1962년)
탈옥영화의 수많은 클리셰를 제공한 영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용소 탈출 실화를 그렸다. 스턴트맨 없이, 미합중국 육군 대위 포로를 연기한 스티브 맥퀸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아서 독일-스위스 국경의 철조망 바리케이트를 돌파하려는 씬은 영화의 백미.
- 《신시내티 키드》 (196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밤의 열기 속으로》 등의 영화로 유명한 노만 주이슨의 영화. 폴 뉴먼에게 《허슬러》가 있다면, 스티븐 맥퀸에게는 《신시내티 키드》가 있다.
- 《산 파블로》 (1966년)
192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현지에서 미국의 이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던, 미합중국 해군의 강상 포함 USS Sand Pebbles에 부임한 기관중사 홀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주인공 홀맨 중사는 군 생활을 10년간 하면서 근무지를 7번이나 옮길 만큼[12] 적응력이 떨어지는 인물인데, 스티브 맥퀸 자신의 해병대 시절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된 듯하다. 영화 자체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당시를 반영해 미국의 팽창주의를 비판했다는 시각과 중국인을 야만적으로 그리면서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시각이 공존한다.
- 《네바다 스미스》 (1966년)
정통 서부극으로, 건달 셋에게 부모를 잃은 청년이 원수들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하는 영화이다. 허나 마지막에는 복수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마지막 원수를 '죽일 가치도 없다' 라며 그냥 보내주며 영화가 끝난다.
-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1968년)
노만 주이슨의 영화. 상대역은 보니와 클라이드로 스타덤에 오른 페이 더너웨이였다. 개봉 당시 평가는 좋지는 않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소위 컬트 무비로 재평가를 받아, 99년에는 피어스 브로스넌과 르네 루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감독 할 애슈비가 편집을 맡은 작품이기도 하다.
- 《블리트》 (1968년)
피터 예이츠의 영화. 자동차 추격 장면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작품이다. 여기서 속도광 맥퀸은 직접 운전을 했다. 이 영화는 《더티 해리》와 《프렌치 커넥션》과 더불어 형사 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 《르망》 (1971년)
레이서들의 꿈의 대회 중 하나인 르망 24시 자동차 경주를 다룬 영화.[13] 이 영화는 속도광 맥퀸의 꿈의 프로젝트였지만, 존 스터지스 감독의 하차, 제작비 초과, 스태프들의 파업 등으로 악몽이 되었다. 결말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서 결말 장면만 여러개를 찍었으며 전방위적인 혼돈이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르망 레이스가 본래 그렇듯 내내 미친듯이 자동차만 몬다. 거의 다큐멘터리 느낌이 날 정도. 서킷 자동차 경주 영화가 대부분 재미가 없지만, 이건 더럽게도 재미가 없다. 하지만 레이싱 팬들에게는 특별한 영화인데, 애초에 다른 레이스 영화들은 실제 레이스에 관심이 별로 없거나 과장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실제 레이싱 느낌을 재현하는 영화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다지만 레이싱 팬들에겐 재미만 있다(...). 실제로도 르망 레이스는 좀 더 진이 빠지는 마라톤 같은 것으로,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모두가 예측하지 못했던 말도 안되는 이벤트가 일어나 레이스가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도 르망 레이스이며 그 때문에 모든 관람자와 시청자가 밤을 새워가며 졸기도 하면서 하루를 같이 보내는 것이다. 꼭 르망이 아니더라도 마치 인생과도 같은 것이 레이스이고 레이스 팬들은 그런 것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물론 그런 만큼 일반인 대상의 흥행 실적도 좋지 않아서, 돈이 떨어진 맥퀸은 일본에 가서 혼다 오토바이 광고를 찍었다.
- 《주니어 보너》 (1972년)
샘 페킨파가 감독한 영화로는 폭력적인 스토리가 아니지만, 옛날 시대를 그리워하는 인물이 나오는 건 공통적인 요소.
- 《겟어웨이》 (1972년) 샘 페킨파 감독 영화. 국내 개봉 당시엔 제목을 게터웨이 또는 게타웨이 라고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1989년에 출시한 SKC 비디오 제목도 게터웨이. DVD는 '스티브 맥퀸의 겟어웨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맥퀸은 당시 파라마운트 사장이었던 로버트 에반스의 아내였던 앨리 맥그로[14]를 유혹해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하여. 실사판 NTR을 찍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함께 부부로 출연했는데 나중에는 이혼했다. 페킨파 영화에서 가장 흥행 대박(제작비 335만 달러로 3600만 달러 가까운 미국 흥행을 거둬들임)이니 재미는 꽤 있기에 영화 자체는 괜찮다.[15]
- 《빠삐용》 (1973년)
- 《타워링》 (1974년)
라이벌인 폴 뉴먼과 크레딧에 누가 먼저 나오느냐로 싸우다가 결국 동시에 나오는 방법을 썼다.
- 《헌터》 (1980년)
그의 유작. 실제 현상금 사냥꾼 랄프 소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624만 달러 그저 그런 흥행을 거둔 범작. 감독인 버즈 컬릭(1922~1999)은 티브이 영화나 드라마 연출을 더 많이 맡았으며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드라마 연출만 맡았다.
- 《스티브 맥퀸: 더 맨 앤 르망》 (2015년)
다큐멘터리.
4. 사망
맥퀸의 최후는 꽤나 쓸쓸했다. 그는 1978년 들어서 원인을 알수 없는 기침에 시달렸고, 1979년 말 유작인 더 헌터를 촬영한 후 받은 건강검진에서 석면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악성 중피종으로 진단을 받았는데, 이미 상당히 전이가 된 상태였고, 맥퀸은 이를 비밀로 부치려 했으나 1980년 3월에 한 타블로이드지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 후 멕시코로 가서 비과학적인 치료를 받아보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심장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로 가서 사무엘 셰퍼드라는 이름으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은 다음날 심장마비를 일으켜 현지에서 5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석면 재질의 레이싱용 방호복이 원인이란 설도 있었으나 맥퀸이 레이싱을 즐길 당시는 이미 코듀라 소재의 안전한 제품이 상용화된 시점이라 레이싱용 방호복이나 장갑이 원인은 아니다. 그의 악성중피종은 1940년대 미 해병대 군복무 시절 석면 제거작업 중 노출되어 잠복기를 거쳐 발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다. 그가 남긴 씁쓸한 유언은 바로 “이제 일어나서 다음 영화 만들어야지”였다.
폐암으로 임종을 앞둔 맥퀸은 앞서 말한 황야의 7인에서 다툼이 있었던 율 브리너에게 전화를 걸어 화해를 요청했다. 20여년 전의 일로 갑작스런 연락을 받은 브리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유머러스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나는 왕이었고 당신은 반기를 든 왕자였어. 둘 다 죽여주게 멋있었지."[원문] #
5. 여담
- 출연할 뻔 했던 영화들이 후덜덜하다. 《람보》, 《지옥의 묵시록》, 《티파니에서 아침을》, 《내일을 향해 쏴라》, 《프렌치 커넥션》, 《더티 해리》, 《대부》, 《죠스》, 《보디가드》 등등…
- 소싯적 자신과 오토바이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여자친구의 말에 오토바이를 택했다.
- 소장했던 갈색 컬러의 페라리 250 GT 베를리네타는 핫휠에서 1:18 모형으로도 발매했었다.
- 쿠엔틴 타란티노의 9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배우 대미언 루이스가 연기했다.[17]
- 허영만의 타짜 4부에서 동명이인의 포커 플레이어가 등장한다. 인물 설정상 카드 기술면에 있어 절정을 찍은 것으로 묘사되며 소유한 거대 저택을 개방해 엄청난 판돈의 카드 게임을 개최하기도 한다. 여기서 각시탈을 쓰고 나오는 인물이 바로 맥퀸이다.
[1] 간 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 부작용으로 호흡부전이 생겨 사망한다.[2] 테리와 채드 모두 첫번째 부인 닐 애덤스와의 자식들이다.[3] 생전 공화당을 지지했다.[4] 맥퀸이 독수리 5형제 캐릭터 중 한명인 콘돌 죠의 모티브.[5] 그 뒤로는 상선을 타고 바다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해안경비대에서도 근무했었다. 계속 바다 위에만 있었던 탓에 소식이 끊겨 스티브 맥퀸 본인도 아버지의 근황을 알 수 없었고, 나중에 수소문하여 겨우 소식이 닿았을 때엔 이미 작고한 뒤였다.[6] private - private first class : 미군 계급 체계는 각 군마다 조금씩 다르며, 우리 나라 이병-일병과 1:1 대응하지는 않는다. 전시 외엔 지원병 제도라 전부 직업 군인이기도 하다.[7] 참고로 영화 워리어에서 톰 하디가 과거 해병대 시절 영웅이 되는 에피소드가 바로 이 스티브 맥퀸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다[8] 1970년 세브링 12시간 레이스에서 종합 2위를 차지했을 정도의 실력가였다.[9]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대탈주에서 공연했던 제임스 가너가 카 레이싱 영화 그랑프리에 출연하자, 레이싱 선수라는 자부심이 있던 맥퀸이 엄청나게 열받았던 것.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맥퀸의 맨션 바로 아래 층에 가너가 살았는데 맥퀸이 가너의 베란다에 오줌을 쌀 정도였다고 한다. '그랑프리는 쓰레기다. 진짜 레이싱 영화가 먼지 보여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디스하면서, 레이싱 선수들을 불러들여서 영화를 찍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맥퀸의 완벽주의 성향이 제작기간과 제작비를 초과하자 인내심을 잃은 영화사가 감독을 갈아치우고 맥퀸을 배제하면서 서둘러 영화를 완성하다보니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왔다. 촬영 중에도 플롯이나 결말이 완성되지 않아 각 결말에 맞는 장면을 따로 찍기도 했다. 그래도 레이싱 팬들에게는 지금의 헐리우드도 만들기 힘든 카 레이싱 영화라고 인정을 받는다고. 영화는 다른 얘기는 별로 없고, 내내 미친듯이 차만 몬다. 그냥 르망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 직접 차를 몰면서 찍었으므로 땀과 먼지투성이에 피곤에 찌든 맥퀸의 모습은 연기가 아니다.[10] 물론 자동차 부속에 석면이 널리 쓰이고 있었던 건 사실이나 당시에는 이미 석면을 대체하는 재질의 방염복이 상용화된 지 오래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스티브 맥퀸의 경우엔 이보다 이른 군시절 단열재 교체 작업중 노출된 석면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11] 최초에는 리메이크가 아니었다. 황야의 7인 참조.[12] 육군과 달리(사실, 한국과 달리 미 육군은 장교보다 턴은 길어도 부사관도 부대를 계속 옮긴다.) 해군은 함정과 육상을 오가야 하므로 근무지 이동이 잦은 편이나, 이 정도면 그 정도가 심한 편. 10년 근무자면 보통 3~5회 정도 옮겼을 것이다.[13] 보통 르망 24시, 모나코 그랑프리, 인디500이 전통의 3대 레이스로 불린다.[14]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15] 94년에 알렉 볼드윈 - 킴 베이싱어 부부 배우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 이 부부도 곧 이혼했다. 평행이론?[원문] "I am the king and you are the rebel prince. Both are dangerous."[17] 실제배우와 루이스의 인상이 비슷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