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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43:21

아산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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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삼한마한의 염로국(冉路國)이 위치해 있었다. 마한의 수장국이었던 목지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가 목지국 및 그 일대를 정복한 뒤 탕정군(湯井郡, 구 온양군 지역), 아술현(牙述縣, 구 아산군 지역), 굴직현(屈直縣, 구 신창군 지역)이 설치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때는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나제동맹의 북진 때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백제 대성팔족 중 연씨(燕氏)의 근거지였던 걸로 추정된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웅진도독부 소속이 됐다가 당군이 물러난 뒤 신라 문무왕 초기 탕정주로 승격된다. 이후 9주 5소경 개편으로 탕정군으로 격하, 아술현은 음봉현(陰峯縣)[1]으로 개칭되었고, 굴직현은 기량현(祁梁縣)으로 개창되어 탕정군의 영현(領縣)이 됐다.

온양의 옛 이름인 '탕정(湯井)'이 '끓는 우물'이란 뜻이고 이후 '온수(溫水)', '온양(溫陽)' 등의 이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삼국시대부터 온천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온양의 옛 이름인 '탕정'과 아산의 옛 이름인 '음봉'은 오늘날에도 각각 면 이름(탕정면, 음봉면)으로 이어져 남아 있다.

2. 고려 시대

구 온양군 지역은 온수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천안부에 소속, 명종2년(1172) 온수현을 분리시켜 감무를 두게 했다. 구 아산군 지역은 초기에 인주(仁州)로 개칭하여 자사를 두다 목종 8년(1005년)에 폐지되고 현종9년(1018년) 아주(牙州)현으로 개칭하고 감무를 두게 했다. 구 신창군 지역은 신창현으로 개칭하고 천안부에 소속, 공양왕3년(1391년)에 만호 겸 감무를 두게 했다.

아산의 옛 이름인 '인주'는 오늘날에도 면 이름(인주면)으로 이어져 남아 있다. 이 이름은 인천광역시의 고려 시대 이름과 동일하나 아산 쪽이 사용했던 시기가 더 앞선다.

3. 조선 시대

파일:아산_1895년.png
온수현은 세종24년(1442년) 온양군으로 승격, 아주현은 태종13년(1413년)에 아산현으로 개칭, 구 신창군 지역은 태종16년(1416년)에 신창현이 되었다. 현재의 아산지역 1군 2현이 모두 고종33년(1895년)에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충청남도 관할의 37개군 중 4등군이 됐다.

4. 일제강점기

파일:아산_1914년.png
1914년 조선총독부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이 아산군으로 통합되었다. 온양면, 염치면, 송악면, 배방면, 탕정면, 음봉면, 둔포면, 영인면, 인주면, 숙정면, 도고면, 학성면의 12개면, 163개리를 관할하였다. 1917년 숙정면을 선장면으로, 학성면을 신창면으로 개칭했다. 1922년 아산군청을 영인면 아산리에서 온양면 온천리로 이전했다. 그런데 군명은 '온양군'으로 개칭하지 않고 그대로 '아산군'을 유지하여, 이 때부터 아산과 온양의 명칭 혼동 논란의 불씨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1941년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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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군과 온양시 통합이후 2년간 사용된 시기
파일:아산시기(1995–1997).png
1997년 시청을 현 위치(온천동 1626번지)로 이전하였다. 2003년 행정동 명칭을 온양1~6동으로 변경했다.[2] 2008년 수도권 전철 1호선신창역까지 연장 개통되었고, 2009년 5월 배방면이 배방읍으로 승격되었다. 2014년 2월, 인구 30만 명을 돌파했다.

[1] '아술(牙述)'은 '어금/엄(훈차)+수리(음차)'를 한자로 옮긴 것이며, 이를 다시 '어금/엄→음(陰)', 수리(높은 산)→봉(峰)으로 바꾸어 '음봉'이 된 것.[2] 온양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외면받고 있는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