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전경
랜드마크인 해안 성벽의 크즐 쿨레 (붉은 성탑)
1. 개요
Alanya튀르키예 남부의 도시. 안탈리아에서 동남쪽으로 90km, 카라만에서 서남쪽으로 110km, 메르신에서 서쪽으로 18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30만 명이고,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휴양 도시 중 하나다. 고대에는 중소 도시에 불과했으나 12세기 룸 셀주크 조의 대표 항구로 개발되었고, 14-15세기에는 알리예 베이국의 수도가 되어 번영하였다. 비록 16세기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쇠퇴했지만 20세기 들어 관광 도시로 부흥하였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아름다운 해변 및 유적 덕에 여름철 성수기가 되면 피서객들로 붐비며, 2만의 유럽인 (그중 절반은 독일인)이 상주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안탈리아에서 시데를 거쳐 알라니아로 향하는 해안 유적 관광 역시 추천할 만하다.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에 소속된 알란야스포르의 연고지이다.
2. 역사
옛 성벽과 시가지
옛 동로마 성당. 이후 모스크로 활용된다.
석기시대부터 거주 유적이 발견되었고, 기원전 3천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기원전 7세기 무렵의 페니키어어 비석이 발견되고 기원전 4세기 그리스 문헌에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항구로 발전했다. 헬레니즘기 지명은 코라케시온이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서 성채가 세워졌지만, 느슨한 지배 덕에 해적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199년, 도시는 저항 끝에 안티오코스 3세에게 함락되어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다. 기원전 140년경 셀레우코스 내전 당시 도시는 디오도토스 트리폰의 거점 중 하나였고, 기원전 137년 안티오코스 7세가 점령한 후 새로운 성벽과 항구를 축조했다.
기원전 102년, 킬리키아 해적 소탕에 나선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시데를 기반으로 일대의 해적들을 소탕하였다. 기원전 78년에는 세르빌리우스 바티아가 이사우리아 토벌을 위해 주둔했고,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의 토벌 당시 인근에서 벌어진 코라케시온 전투로 해적은 완전히 소탕되었다. 로머 역사가 스트라본은 코라케시온이 팜필리아와 킬리키아 간의 경계라 기록하였다. 로마 제국기에도 도시는 이사우리아 반란 진압 거점이었고, 4세기 들어서는 시데 대주교구 산하의 주교구가 되었다. 7세기 이슬람 제국의 습격 후, 성벽이 강화되었다.
2.1. 중세
룸셀주크 시기의 조선소 유적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가 1120년 동로마 제국이 수복하였다. 중세 시기 코라케시온은 칼로노로스로 개칭되었다. 4차 십자군 후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일대를 지배했다가, 1221년 카이쿠바드 1세가 점령하여 룸 셀주크령이 되었다. 술탄의 장인이기도 했던 아르메니아인 영주 키르 파르드에게는 대신 아크셰히르 영주 자리가 주어졌다.
카이쿠바드는 도시를 알라이예 (علائیه)라 명명하고 동계 수도로 활용하였다. 그의 치세에 쌍둥이 성채, 성벽, 무기고, 크즐 쿨레 (붉은 성탑) 등이 세워졌다. 성밖에는 여러 정원과 누각이 세워졌고, 일련의 건축들은 시리아계 건축가 아부 알리 알-카타니 알-할라비가 주도하였다. 카리쿠바드의 후계자인 케이휘스레브 2세 역시 1240년 새 저수조를 더하였다. 13세기 중반 알라이예는 지중해의 주요 항구 중 하나가 되어 아이유브 왕조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활발히 왕래하였다.
2.2. 알라이예 후국
알라이예 후국의 왕실인 아프샤르 부족의 깃발
기독교 세력의 침공을 막기 위해 2중으로 보강된 해안 성벽
1243년 쾨세다으 전투 후 룸 셀주크가 쇠퇴하자 카라만 부족 (카라만오을루)이 알라이예를 종종 습격했고, 룸 술탄들은 이를 막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그러던 1276년, 카라만 왕조의 창건자 케리뮛틴 카라만 베이의 아들 메흐메드 베이가 알라이예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그가 사망하자 룸 술탄 케이휘스레브 3세가 수복하였다. 1291년, 키프로스로 철수한 십자군의 앙리 2세가 도시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결국 1292년 (혹은 1293년) 카라만 조의 베드렛틴 마하무드 베이가 점령한 후, 친척 메즈뒷틴 마흐무드를 베이에 봉하며 알라이예는 카라만 조에 복속한 채로 자치를 누리는 도시 국가가 되었다.[역대군주] 1300년경에는 룸 술탄 케이쿠바트 3세가 (사실상 카라만 조가 장악한 콘야 대신) 알라이예에 조정을 두기도 하였다.
1361년 안탈리아를 장악한 키프로스 왕국의 피에르 2세는 1366년 알라이예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371년 키프로스 군이 재침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카라만 조의 바드렛딘 마르무드 베이는 1373-74년 알라이예에 모스크와 마드라사 건립하였다. 1427년 카라만 조의 이브리힘 2세는 금화 5천닢의 값으로 알라이예를 지중해 건너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르스베이에게 매각하였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후 16세기만에 일대는 이집트 지배 하에 놓였다. 다만 알라이예의 총독 혹은 베이들은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고, 15세기 중반에는 사실상 자립했다.
2.3. 중근세
1471년, 오스만 제국의 장군 게딕 아흐메트 파샤는 알라이예에서 카라만의 카심 베이를 격파하고 일대를 정복하였다. 이후 지명은 알라니예로 바뀌었고 이첼 에얄레트에 편성되었다. 이후 1477년, 오스만 조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점하던 목재 등의 해운업을 국유화시켜 알라니야의 중요성을 높혔다. 하지만 대항해시대 들어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며 알라니야도 경제적으로 쇠락했고, 16세기 말에 이르면 세수에 있어 도시 (셰히르) 지위를 잃게 되었다.
1571년, 셀림 2세의 키프로스 정복 후 알라니야는 키프로스 산작으로 이관되었다. 다만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와의 교역항이던 알라니야의 중요성은 더욱 하락하였다. 1608년 9월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성 스테파노 기사단이 도시를 공격하였다. 1672년 알라니야를 방문한 여행가 엘리야 첼레비는 장엄한 성벽과 쇠퇴한 교외 지역에 대해 묘사하였다.
2.4. 근대
해안 성벽과 옛 오스만 별장들
계속 이첼 산작에 속하던 알라니야는 1864년 콘야 산작을 거쳐 1868년 안탈리아 산작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19세기 중반 기준 알라니야의 3만 8천 인구 중에는 1천여 기독교도가 있었다. 3세기 가량 침체되었던 알라이나는 19세기 말 오스만 고위층의 빌라들이 세워지며 휴양 도시로 부활했다. 1917년 생장드모리엔 협정과 세브르 조약에 의거하여 1919년 이탈리아 군이 진주했다가 1922년 철수하였다. 이듬해 터키-그리스 인구 교환으로 현지 기독교도들은 아테네 외곽의 네아 이오니아로 이주되었다.
2.5. 현대
1960년대에는 인근 담라타쉬 동굴 치유 효과 소문에 터키인들이 줄지어 방문하며 휴양 도시 이미지가 강화되었고, 90년대에 인구가 급증하였다. 그리고 1998년 공항 건설 후 알라니야는 국제적인 휴양지로 부상하여 현재에 이른다.
3. 갤러리
조선소 유적
[역대군주] 메즈뒷딘 마흐무드 1293~? / 유수프 1330-37 / 솀숫딘 메흐메드 1337-52 / 휘사멧딘 마흐무드 ? / 사바즈 베이 ?~1423 / 카라만베이 / 뤼프티 ?~1455 / 클르츠 아르슬란 145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