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클라인 Allen Klein | |
<colcolor=#fff><colbgcolor=#444> 출생 | 1931년 12월 18일 |
미국 뉴저지 뉴어크 | |
사망 | 2009년 7월 4일 (향년 77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국적 | 미국 |
직업 | 매니저, 사업가 |
학력 | 웁살라 대학교[1] |
소속사 | ABKCO[2] |
활동 기간 | 1956년 - 2009년 |
주요 고객 | 롤링 스톤스, 비틀즈, 샘 쿡, 필 스펙터, 킹크스, 애니멀스, 존 레논, 조지 해리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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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음반 매니저이자 사업가이다.
2. 특징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밴드를 꼽을때 빠지지 않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의 매니저를 역임한 그야말로 엄청난 인물이다. 그 외에 애니멀스, 킹크스, 샘 쿡 등 웬만한 1960년대의 메이저급 아티스트와는 계약을 채결한 경력이 존재한다. 또한 메이저 레이블중 하나인 ABKCO를 설립한 사업가이기도 하다.그러나 정작 비틀즈, 롤링 스톤스의 팬들에게서 평가는 좋지 않다. 처음에는 파격적인 대우와 저작권에 관련해 아티스트들을 대변해 레이블사와 다툰 것 때문에 "대중 음악계의 로빈후드"로 불렸지만, 이내 자신들의 고객들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고 저작권도 가로챘다. 비틀즈의 해체를 조장한 인물중 하나로 꼽히며, 롤링 스톤스에게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고 탈세를 부추겨, 결국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구속까지 당한 비양심적 사업가이다. 이 당시 폴 매카트니가 앨런 클라인의 매니징에 불만을 품고 쓴 곡이 애비로드 메들리의 첫번째 곡인 You Never Give Me Your Money다.
3. 생애
3.1. 유년기
앨런 클라인은 1931년 유대인 이민자의 4번째 자녀이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을 일찍 잃었기 때문에 고아원에서 자랐고 학창 시절에는 친구도 얼마 없었다고 한다. 뉴저지의 지역 대학교인 웁살라 대학교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이후, 1957년 회계 사무소에 취직했지만 얼마 안가 태업을 이유로 해고당한다. 그러나 대학교 시절 친구의 도움으로 음악 관련한 회계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적성을 찾아 순식간에 명성을 얻었다.3.2. 샘 쿡과 함께
그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63년 샘 쿡과 계약을 따내면서다. 유명 가수였던 샘 쿡과 계약을 맺은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샘 쿡이 앨런 클라인을 자신의 재산을 지켜주는 사람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다녀 앨런 클라인은 더욱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1965년, 그는 롤링 스톤스의 매니저로 선임되었다.3.3.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 악행들
비틀즈의 해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사람들은 오노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나, 비틀즈의 팬들은 입을 모아 앨런 클라인을 가장 큰 이유라고 언급한다.[3] 기존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 이후, 돈을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던 멤버들이 너무나도 많은 돈을 잃자, 새로 매니저를 선임해 재산 관리를 하게 하자고 합의했다. 그런데 폴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앨런 클라인을, 폴 매카트니가 리 이스트먼[4]을 새 매니저로 지지하면서 곪아있던 밴드 멤버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 밴드 해체 이후, 폴 매카트니는 리 이스트먼의 조언에 따라 비틀즈 멤버들과 앨런 클라인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영국 법정은 폴에 조금 더 유리하게 손을 들어줬다.그러나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솔로 활동을 하면서 앨런 클라인의 실체를 알고 경악하게 된다. 조지 해리슨은 All Things Must Pass로 초대박을 친 이후, 1971년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라비 샹카르 등 그의 친구들과 함께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및 허리케인으로 인해 발생한 수백만의 난민들[5]을 돕기 위해 뉴욕에서 사상 최초의 자선 콘서트라고 불리는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앨런 클라인이 50%의 로열티를 이유로 수익금의 대다수를 빼돌리려고하자, 조지 해리슨은 이에 대해 경악하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시타르를 알려준 스승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기 위해 큰 맘 먹고 준비한 행사인데 그와중에도 앨런 클라인이 돈을 슬쩍 빼돌리자 더욱 화가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롤링 스톤스와도 법정 분쟁을 길게 했는데 롤링 스톤스의 멤버들이 앨런 클라인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내는 일을 감행했다. 롤링 스톤스의 멤버들은 본인들이 클라인의 회사에 있을때 그가 세금 회피를 부추겼다는 점, 곡의 저작권을 강탈했다는 점, 로열티 빼돌렸다는 점 등으로 앨런 클라인과 법정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롤링 스톤스가 패소해 Let It Bleed와 Beggars Banquet의 모든 곡의 배급권을 그에게 넘겨주어야했다. 이에 재거-리처즈는 체념했는지 더이상 그를 언급하는거 조차 싫어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도 전부 자신들이 앨런 클라인을 매니저로 선임하려 한 것을 후회하고 폴 매카트니와 화해하게 되었다. 롤링 스톤스 역시 Sticky Fingers부터 앨런 클라인의 손아귀를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6] 한편 존 레논은 이런 앨런 클라인의 비도덕적 행태를 비난하는 곡인 Steel and Glass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90년대에는 더 버브의 노래이자, 브릿팝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Bitter Sweet Symphony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 앨런 클라인의 집요한 공격 끝에 진짜 저작자인 더 버브는 롤링 스톤스의 곡을 샘플링했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한 곡을 잃었다. 롤링 스톤스의 멤버들도 이에 대해 죄책감이 컸는지, ABKCO로부터 Bitter Sweet Symphony의 저작권 권한을 넘겨받자마자 지체 없이 곡을 더 버브측으로 되돌려주었다.
3.4. 법의 심판을 받다
1972년, 미국 국세청의 집요한 추적 끝에 미국 정부는 그에게 탈세 혐의를 적용하였다. 그의 회사 ABKCO의 몇몇 핵심 인물도 재판을 받게 되었다. 비록 중범죄 혐의는 비껴나갔지만, 5,000달러의 벌금과 2개월의 징역형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3.5. 사망
그는 40세의 나이에 당뇨병을 진단받았다. 여러차례 심장 마비의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견뎌냈다. 그러나 2004년 발목 부상으로 건강검진을 받던 도중, 알츠하이머를 진단받았다.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2009년 숨지게 된다. 클라인의 장례식에는 오노 요코, 션 레논, 앤드루 올덤[8] 등이 참석하였다. 앤드루 올덤은 클라인이 롤링 스톤스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추도문을 읊기도 했다.4. 여담
- 위에서 상술하듯이 그의 회사인 ABKCO는 여전히 롤링 스톤스에 대한 곡들의 배급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후반 들어, ABKCO의 공식 유튜브 계정으로 롤링 스톤스의 미발표 라이브 영상, 더티 맥 관련 영상, 가사 영상 등이 올라오고 있다.[9] 롤링 스톤스 측도 별말 없는 것을 보면 요즘은 그나마 사이가 원만해진듯하다. 사실, 1980년대 롤링 스톤스 앨범들의 CD 발매가 이뤄질때쯤 롤링 스톤스와 앨런 클라인이 화해를 했다고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스트리밍 서비스에 있어서도 앨런 클라인과 롤링 스톤스가 손발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ABKCO를 안 좋게 보는 롤링 스톤스 팬들이 훨씬 많다. 앨런 클라인과 비틀즈의 악연이 워낙에 강력한지라 은근히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앨런 클라인과 롤링 스톤스의 법적 공방 같은 악연도 워낙에 질긴다. 또한 let It Bleed 전까지의 곡들을 발표할 권리를 롤링 스톤스가 아니라 abkco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의 미발매곡들을 묵혀두는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이다.
- 돈을 벌기 위해 샘 쿡을 청부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이는 샘 쿡의 사망 과정이 정말 뜬금이 없을정도로 이상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낮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샘 쿡에게 다소 심하게 굴었던 것은 사실이며, 샘 쿡의 뒤에서 야금 야금 돈을 훔쳐간것은 물론, 샘 쿡이 모르도록 교묘하게 조정된 계약 때문에 샘 쿡의 가족들은 현재까지도 샘 쿡의 히트곡으로 돈을 벌 수 없다고 한다. 샘 쿡이 실질적으로 클라인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샘 쿡 팬덤에서도 싫어한다.
- 영화 사업도 했는데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개봉 관련해 흥행이 안 된다고 판권 철수해버리고[10] 막상 2008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재개봉하려고 했을때 판권 갑질을 해서 이걸로도 까였다. 다행히 합의봤다고. 이런 문제 때문에 조도로프스키도 한동안 감정이 상했다고 한다.[11]
- 버브의 Bitter Sweet Symphony의 저작권을 오랫동안 가지고있던 것도 이 앨런 클라인이 저지른 짓이다. 재거-리처즈는 이 일과 관련이 없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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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lling Stones 1964 | The Rolling Stones No. 2 1965 | Out of Our Heads 1965 | Aftermath 1966 | Between the Buttons 1967 | |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 Beggars Banquet 1968 | Let It Bleed 1969 | Sticky Fingers 1971 | Exile on Main St. 1972 | |
Goats Head Soup 1973 | It's Only Rock 'n Roll 1974 | Black and Blue 1976 | Some Girls 1978 | Emotional Rescue 1980 | |
Tattoo You 1981 | Undercover 1983 | Dirty Work 1986 | Steel Wheels 1989 | Voodoo Lounge 1994 | |
Bridges to Babylon 1997 | A Bigger Bang 2005 | Blue & Lonesome 2016 | Hackney Diamonds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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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웨덴의 명문 사립 대학교와는 다르다. 이쪽은 Upsala. 뉴저지에 위치해있다.[2] Allen & Betty Klein Company의 약자이며, 즉 회사의 창립자이다.[3] 오노 요코는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정도 갈등이 있긴 했지만 핵심까지는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 겟 백 세션때도 딱히 갑질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존 이외의 멤버들도 그녀가 해체 원인은 아니었다고 못 박기도 했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폴 매카트니의 독재, 밴드 내 싸움으로 지친 링고 스타, 레논-매카트니에 밀려 자기 곡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던 조지, 점점 달라졌던 존과 폴의 음악 세계, 헤로인 중독에 빠진 존과 요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원인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과 그로 인한 후임 매니저 선임 과정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팬들이 부정하지 않는다.[4] 폴의 아내인 린다 매카트니의 아버지, 즉 폴 매카트니의 장인이다.[5] 이는 그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라비 샹카르가 벵골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비 샹카르가 조지 해리슨에게 이런 안타까운 사실을 전해주고, 조지가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대규모 자선 콘서트를 열자고 결심한 것이다.[6] Let It Bleed와 Sticky Fingers 사이에 1970년 밴드의 활동이 비어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7] 필 스펙터가 후일 살인범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끼리끼리 논다는 조롱이 있었다.[8] 롤링 스톤스의 초대 매니저이다.[9] 물론 이는 Let It Bleed까지만 한정된다. Sticky Fingers 이후로는 롤링 스톤스의 공식 영상 채널에 올라온다.[10] O 이야기라는 에로 영화 프로젝트를 제안했으나 조도로프스키가 거절했고, 그 뒤로는 사이가 안 좋았던 모양. 때문에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은 꽤 오랫동안 보기 힘든 영화로 꼽혔다. 한국 개봉도 2008년 재개봉에 맞춰서 이뤄졌다.[11] 말년에는 그래도 응어리가 풀어진 모양. 2008년 내한 당시 30년 싸우다 보니 적이 친구가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