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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제6대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Jan II Kazimierz Waza | |||
이름 | 얀 카지미에시 바사 (Jan Kazimierz Waza) | ||
출생 | 1609년 3월 22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크라쿠프 | |||
사망 | 1672년 12월 16일 (향년 63세) | ||
프랑스 왕국 느베르 | |||
재위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 | ||
1648년 11월 20일~ 1668년 9월 16일 | |||
배우자 | 마리 루이즈 곤차가(1646년 결혼 / 1667년 사망) 클로댕 프랑수아 미뇨(1672년 결혼 / 1711년 사망) | ||
자녀 | 마리아 안나 테레사 바주프나, 얀 지그문트 바사 | ||
아버지 | 지그문트 3세 바사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차 | ||
형제 | 안나 마리아,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올브라흐트, 카롤 페르디난트, 알렉산데르 카롤, 안나 카타지나 콘스탄치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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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제6대 국왕. 그의 치세에 중유럽 최강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몰락시킨 대홍수가 벌어졌다.2. 생애
2.1. 초기 생애
1609년 3월 22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옛 수도 크라쿠프의 바벨 성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와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1]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차의 2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우르슐라 기엔게르(Urszula Gienger)의 보살핌 아래 바르샤바 왕궁의 검소한 환경에서 자랐고, 예수회 수도사들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1611년 이복형인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루스 차르국의 차르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러시아인의 대대적인 봉기로 인해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모스크바에서 밀려난 후에도 콘스탄차 왕비는 어떻게든 자신의 아들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후보자로 만들기를 원했다. 1626년, 그녀는 토룬에서 열린 세임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얀을 왕위 계승자 후보로 제안했다. 그러나 16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대격돌이 벌어졌던 호침 전투 당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였던 브와디스와프 왕자에 대한 귀족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며, 지그문트 3세 역시 브와디스와프를 후계자로 낙점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1년 어머니 콘스탄차가 사망하고 1632년 아버지 지그문트 3세가 뒤따라 사망한 뒤, 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등극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그는 친구를 거의 사귀지 않고 신앙 생활에 몰두했으며,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대신 군대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일찍부터 군대 장교로 복무했으며, 브와디스와프 4세 치세 동안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 참여한 뒤 르부프에 주둔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다가 천연두에 걸렸고, 그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 자국이 생겼다.
1635년 초, 얀은 빈에서 거행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딸 마리아 안나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스웨덴군과 전쟁을 치르는 제국군을 돕겠다고 제안해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흉갑기병 연대와 폴란드 자원병들을 이끌고 30년 전쟁에 참전해 알자스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그러다가 1635년 9월 12일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간의 슈툼스도르프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형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귀환했다.
1636년 굴덴테른 남작 부인과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갈망했지만, 브와디스와프 4세가 그녀의 신분이 낮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쿠를란트 공국 공작으로 봉하려고 했지만, 세임이 거부하면서 이것 역시 실패했다. 1638년, 그는 포르투갈 총독의 고용 제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로 향하다가 도중에 프랑스에 들렀는데 당시 스페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의 실권자 리슐리외 추기경이 그가 스페인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체포했다. 그후 1638년 5월 10일부터 1640년 2월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스몰렌스크의 주지사(Wojewoda)이자 주프랑스대사인 크시슈토프 코르빈 고시에프스키의 간절한 설득 끝에 리슐리외가 석방을 결정하면서 겨우 풀려났다.
1643년, 얀은 브와디스와프 4세의 거센 반대를 뿌리치고 이탈리아로 가서 로레토의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 활동했다. 이후 아직 사제 서품을 받지도 않았던 1646년 5월 28일,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로부터 부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문장에 왕자의 칭호와 왕관을 사용할 권리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여기까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1647년 외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시 바사가 7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어진 브와디스와프 4세로부터 귀국 요청을 받자, 환속한 뒤 폴란드로 돌아갔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추기경 직을 반납했다.
2.2.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648년 5월 20일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사망한 후, 6개월간 지속된 선거 끝에 1648년 11월 20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649년 1월 17일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추기경인 마치에이 우비엔스키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그해 5월에 형 브와디스와프 4세의 미망인인 마리 루이즈 곤차가와 결혼했다.얀 2세는 즉위 직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주도한 카자크 대봉기에 직면했다. 카자크 반란군이 리투아니아 헤트만 미코와이 포토츠키의 군대를 궤멸시킨 뒤 우크라니아 일대를 휩쓸고 르부프를 공략하고, 벨라루스 일대에서도 정교회를 신봉하는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는 대재상 예지 오솔린스키(Jerzy Ossoliński)의 의견을 받아들여 흐멜니츠키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수장으로서 반격에 착수하기로 한 그는 1649년 여름 반란군에 포위된 즈보리우[2] 요새를 구하고자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격해 그 해 8월 15~16일 즈보리우 전투에서 크림 칸국과 연합한 카자크 반란군을 상대로 맞붙어 적병 10,000명을 사살하고 10,000명을 부상입히는 대승을 거두었다. 즈보리우 전투에서 참패한 크림 칸 이슬람 기라이 3세는 오솔린스키로부터 60만 플로린을 지불받는 조건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화해하기로 약속하고, 흐멜니츠키에게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강요했다.
1649년 8월 18일,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카자크 반란군 간의 즈보리우 조약이 체결되었다. 카자크인들은 자체적으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고, 키유프, 체르니후프, 브라츠와프 3개 주에 폴란드군의 주둔 및 유대인의 거주가 금지되었으며, 모든 반란군은 사면받았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카자크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우크라이나 일대의 자기들 영지가 떨어져나가는 걸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왕을 거세게 압박했다. 여기에 흐멜니츠키에게 체포되어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리투아니아 야전원수 마르친 칼리노프스키가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 일대를 습격해 카자크인들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양측은 새로운 전쟁의 필연성을 느끼고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1651년 2월 즈보리우 조약 폐기를 선언한 얀 2세는 기병 17,000명, 보병 16,000명, 독일 용병 16,000명, 징집병(pospolite ruszenie) 30,000명으로 구성된 8만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는 카자크 반란군은 33,000명이었고, 여기에 크림 칸국에서 30,000명 가량의 원군이 파견되었으며, 수천 명의 튀르크인과 루마니아인, 그리고 수천 명의 농민과 2,000명의 돈 카자크인이 가담했다. 양측은 1651년 6월 28일부터 7월 10일까지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700명 가량의 병력만 상실하면서 적병 30,000~40,000명을 사상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은 키유프를 탈환했고, 왕은 이에 만족해 그해 7월 17일에 전군 지휘를 미코와이 포토츠키에게 맡긴 뒤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흐멜니츠키는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규합하고 6,000명의 크림 타타르인과 합세한 후 반격에 착수해 1651년 9월 23~25일 폴란드-리투아니아군 22,000명을 상대로 빌라체르크바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낼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9월 26일 폭우가 내리면서 전투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포토츠키와 흐멜니츠키는 더 이상의 살육전은 무의미하다는 데 동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9월 28일, 양자는 빌라체르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자크의 자치정부는 키유프주 1개만 다스릴 수 있었고, 등록된 카자크군의 숫자는 2만 명으로 감축되었으며, 조약을 비준할 세임에 대표를 파견해 국왕이 자비를 베푼 것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그러나 세임은 등록된 카자크군의 숫자가 아직도 너무 많다며 리베룸 베토를 선언해 조약이 비준되지 못했고, 흐멜니츠키 또한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루스 차르국의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얻는 조건으로 신종하겠다고 맹세했다. 1651년 3월, 루스 차르국의 의회인 젬스키 소보르는 카자크를 편입시키기로 결의했다. 이후 2년간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대규모 전쟁을 준비한 루스 차르국은 1653년 11월 자국에 신종한 카자크와 정교회 신자들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했다. 여기에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인들도 1654년 1월 정식으로 루스 차르국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한 페레야슬라우 조약을 선포했다.
이렇듯 루스 차르국과 카자크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한 상황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내의 상황은 얀 2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얀 2세가 가톨릭을 정식으로 국교로 확정하고 개신교와 정교회를 금지하려 하자, 세임은 2번째로 리베룸 베토를 선언하고 해산해 버렸다. 이로 인해 정부는 마비되었고, 적의 침략에 맞서 방어군을 조직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리투아니아 야전원수 야누시 라지비우는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고 자기가 리투아니아의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에르데이 공국의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 준비를 했다.
1654년 여름, 7만에 달하는 루스군이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진두지휘 하에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쓴 뒤 베레지나 강과 드비나 강을 도하한 뒤 폴로츠크, 스몰렌스크, 비텝스크, 마힐료우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그러다가 모스크바 전체를 강타한 전염병 창궐로 인해, 루스군의 공세가 수그러들었다. 루스군을 상대할 책임이 있던 야누시 라지비우는 자신이 연전연패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제부터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루스 차르국과 연합해 자신들을 밀어붙이는 카자크를 견제하기 위해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655년 1월 29일, 폴란드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가 이끄는 폴란드군 20,000명과 타타르군 15,000~20,000명이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바실리 보리소비치 셰레메테프가 지휘하는 카자크 35,000 ~ 40,000명과 루스군 6,000명을 상대로 오흐마투프[3]에서 격돌했다. 쌍방 1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전투에서, 폴란드-타타르군은 한때 적군을 포위해 섬멸시킬 뻔했지만, 흐멜니츠키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포위망이 돌파되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크림 타타르인은 수십 개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1655년 봄, 전염병이 수그러들면서 전력을 재정비한 알렉세이 1세가 공세를 재개했다. 루스-카자크 연합군은 리투아니아 대원수 야누시 라지비우의 소극적인 대응에 힘입어 여러 요충지를 빠르게 공략한 끝에 그 해 7월 31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뉴스를 점령했다. 알렉세이 1세는 빌뉴스에 입성한 뒤 자신을 리투아니아와 볼린 및 포돌레의 대공이라고 선언했다. 루스군은 여세를 이어가 8월에 카우나스와 가르디나스를 점령했으며, 카자크는 갈리치야로 쳐들어가서 9월 브레스트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한 뒤 루블린에 입성하고 르부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이렇듯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스-카자크 연합군의 맹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여전히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1655년 7월 21일에 전격적으로 침략했다. 14,000명의 병력과 대포 72문을 앞세운 스웨덴군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기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려 한 얀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대폴란드 지방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폴란드 전역과 리투아니아 일부를 장악했고, 1655년 10월 얀 2세는 가족 및 얼마 안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떠나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의 그워구베크 성으로 피신, 2달 동안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1월 20일, 그는 백성들에게 스웨덴군에 무장 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오폴레 칙령을 선포했다.
1655년 11월 18일 ~ 12월 27일,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 요새에 주둔한 폴란드 군인 160명, 포수 50명, 귀족 20명, 그리고 수도사 20명이 3,200명의 병력과 대포 17문을 앞세워 쳐들어온 스웨덴군을 상대로 악착같이 싸운 끝에 격퇴했다. 이 소식은 스웨덴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 각지에 빠르게 퍼졌고, 이에 용기를 얻은 폴란드 주민들은 얀 2세의 오폴레 칙령에 호응해 스웨덴군을 상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여기에 스웨덴으로부터 조국을 사수하기로 결의한 폴란드 귀족들은 티쇼프체 연맹을 결성해 반격에 착수했다. 봉기군은 곧 폴란드 야전원수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원수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다.
한편, 알렉세이 1세는 스웨덴이 폴란드 전역과 리투아니아 일부를 삽시간에 휩쓰는 걸 보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대로 멸망하고 스웨덴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면 자국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655년 가을에 네만 강을 건너지 않고 공세를 중단한 뒤 리투아니아 야전원수 빈첸티 알렉산데르 고시에프스키와 평화 협상을 논의한 끝에, 스몰렌스크, 체르니후프, 키유프, 브라츨라프 등 연방의 동부 영토 상당수를 헌납하는 조건으로 대(對)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을 중지하고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지만, 상황이 극도로 좋지 않은 터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656년 4월, 양국은 니에미에자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중단했다. 그 후 알렉세이 1세는 5월 27일부로 스웨덴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1656년 4월 1일, 조국으로 돌아온 얀 2세는 르부프 대성당에서 성모 마리아를 폴란드 왕관의 여왕으로 치켜세우고, 침략자들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킨 뒤 농민들과 하층민들의 처지를 개선하겠다고 서약했다. 그 후 1656년 5월 30일부터 7월 1일까지 바르샤바 공방전을 친히 이끌어 바르샤바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뒤이은 7월 28일 ~ 7월 30일 바르샤바 전투에서 기병 및 용기병 20,000명과 보병 4,000명, 크림 타타르인 2,000명, 민병대 10,000명을 이끌고 칼 10세 구스타브가 지휘하는 7,500명의 스웨덴 기병 및 용기병, 스웨덴 보병 3,000명, 독일 기병 및 용기병 5,000명, 독일 보병대 3,500명과 격전을 벌인 끝에 패퇴했고, 바르샤바를 도로 스웨덴군에게 넘겨주었다. 폴란드 민중의 잇따른 봉기에 격분해 있었던 칼 10세 구스타브는 힘겨운 전투를 치른 뒤 비스와 강 오른쪽 강둑에 몰려있던 폴란드인들을 어린이들을 포함해 전원 학살했다.
하지만 칼 10세는 스웨덴군의 전력 손실이 심한 데다 본인도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침공이 감지되자 바르샤바에서 철수하였고, 얀 2세는 그 틈에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그 후 1657년 6월 24일부터 8월 23일까지 크라쿠프 공방전을 지휘해 크라쿠프 탈환에 성공했고, 9월 26일부터 12월 23일까지 토룬 공방전을 진두지휘해 토룬까지 탈환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덴마크-노르웨이군과 폴란드-리투아니아군, 루스군을 상대로 삼면 전선을 치르면서 지속적으로 소모되었다. 결국 칼 10세 사후 즉위한 어린 칼 11세의 섭정단은 평화 협정을 제의하였고, 역시 양면 전선으로 병력이 많이 소모된 얀 2세는 이에 응했다. 1660년 5월 3윌,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올리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리보니아를 포기하고 리보니아의 남동부인 라트갈레만 점유한다.
2.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공국의 주권을 인정한다.[4]
3. 얀 2세는 자신과 후계자들을 대표하여 스웨덴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
4. 스웨덴은 발트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역 거래를 보장한다.
5. 스웨덴은 약탈한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 사료들을 반환한다.
6.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공국의 개신교도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2.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공국의 주권을 인정한다.[4]
3. 얀 2세는 자신과 후계자들을 대표하여 스웨덴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
4. 스웨덴은 발트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무역 거래를 보장한다.
5. 스웨덴은 약탈한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 사료들을 반환한다.
6.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프로이센 공국의 개신교도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1661년 세임에서, 얀 2세는 비벤테 레게(Vivente rege: 왕의 생전 동안) 선거를 실시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차기 국왕을 일찌감치 정함으로써 전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또다시 혼란스러워질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그는 훗날 '얀 카지미에시의 예언'으로 알려지게 될 발언을 했다.[5]
"모스크바와 루스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며, 리투아니아를 스스로 할당할 것이오. 대폴란드의 국경은 브란덴부르크에게 개방될 것이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전체의 지배권을 주장할 것이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 가문은 크라쿠프를 굶주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편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렇게 할 것이오. 국가가 전반적으로 파괴되기 전에 나라를 통합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되오."
그는 그러면서 프랑스 귀족인 콩데 공작 앙리 쥘 드 부르봉[6]을 차기 국왕으로 추천했다. 이는 서유럽 최강국인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서,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후대의 많은 폴란드 학자들은 그가 폴란드 분할을 예견했다고 본다.
한편,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고 자기가 리투아니아 군주가 되려 했던 야누시 리자비우는 1657년에 사망했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루스군의 횡포에 견디지 못해 연방을 복원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는 카자크 봉기를 이끌었던 흐멜니츠키가 1657년에 사망한 뒤 자포로제 코사크 헤트만 이반 비호프스키와 카자크 원로들이 이끄는 하댜치 연합이 1658년에 결성되었다. 그들은 일전에 루스 차르국의 속국이 되기를 자처했던 걸 후회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밀사를 보내 기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루테니아로 개편하고 정교회를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에 부여한다면, 앞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1659년, 얀 2세와 세임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반 비호프스키가 정변으로 축출되고 반 폴란드 성향의 카자크인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루스-폴란드 전쟁이 재개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660년 본격적으로 동방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을 재개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의 지휘하에 공세를 개시해 루스군을 드네프르 강으로 몰아내고 1661년 빌뉴스를 탈환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의 여러 도시들도 하나둘씩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해방되었다. 얀 2세는 내친김에 모스크바를 공격하기로 하고 1663년 드네프르 강을 건너 좌안 우크라이나 일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진군은 1664년 1월 흘루키우 공방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막혀버렸고, 그 과정에서 큰 전력 손실을 입으면서 노보그루트시에비에르스키[7]로 철수했다.
이후 우안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성향의 카자크 헤트만 이반 시르코가 알렉세이 1세의 사주를 받고 봉기를 일으키자,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모스크바 진군을 포기하고 진압에 착수해 크림 칸국의 지원에 힘입어 우안 우크라이나 각지를 파괴했다. 1664년 여름 수보티우에 도착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원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멸망으로 몰고 갈 뻔한 사태의 원흉인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훼손시켰다. 그해 7월에 스타비시체를 점령한 뒤 4주 동안 리샨카를 포위해 함락시켰다.
이후 보야르카를 거쳐 빌라체르크바로 이동하던 중, 스타비시체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를 돌려 스타비시체를 4개월간 포위 공격한 끝에 10월 7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1665년 1월 스타비시체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차르니에츠키는 도시를 즉시 함락시킨 뒤 모든 주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리하여 우안 우크라이나 전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완전히 귀속되었지만, 좌안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루스 차르국의 통제하에 남았다. 한편, 미하우 카지미에시 파츠(Michał Kazimierz Pac)가 이끄는 리투아니아군은 1664년 6월 16일 비텝스크 인근에서 루스군을 격파했지만 1664년 8월 2일 시클로프에서 패배했다.
1664년 12월, 세임은 예지 루보미르스키가 외국과 음모를 꾸민 정황이 드러났다며 모든 명예와 존엄성을 박탈하고 추방형을 선고했다.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루보미르스키를 대신해 야전원수가 되었고, 얀 소비에스키는 왕실 총사령관이 되었다. 루보미르스키는 해외로 망명한 뒤 국내에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결집해 반기를 들 준비에 착수했다. 1665년 1월, 얀 2세는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를 바르샤바로 소환한 뒤 앙리 쥘 드 부르봉의 차기 국왕 선임을 위한 비벤테 레게 선거를 치를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홍수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는 외국인을 매우 불신했기에, 외국인 군주가 자기들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얀 2세는 선거를 강행하려 했고, 이로 인해 겨우 복원된 국가에서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1665년 2월 16일, 차르니에츠키가 르부프 인근 소코우프카[8]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얀 2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연방군의 사기가 꺾였다. 그해 4월 30일, 예지 루보미르스키가 800명의 독일인 용병을 이끌고 폴란드에 돌아왔다. 이에 폴란드군 다수가 그를 추종하면서, 루보미르스키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얀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전선에 파견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후 내전은 1년여 간 지속되다가 1666년 7월 13일 몽트비(Mątwy) 전투에서 루보미르스키가 이끄는 반란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수천 명의 포로가 학살당하여 전세가 반란군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1666년 7월 31일, 얀 2세는 웽고니체 마을에서 비벤테 레게 선거를 도입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고 자신이 추진하려고 했던 개혁 역시 포기하며,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내전은 막을 내렸고, 그 후 얀 2세는 더 이상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함께 루스 차르국 및 카자크와 맞서 싸웠던 크림 칸 메흐메드 기라이가 우안 우크라이나를 크림 칸국의 영역으로 삼게 하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카자크는 크림 칸국과 동맹을 다시 맺고 우크라이나 일대에 남아있던 야전원수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를 격파했다. 이렇게 새로운 위협이 닥치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67년 루스 차르국은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결했다. 이에 따라 카자크를 공동으로 통제하는 것과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반환하는 등의 조건으로 키유프와 스몰렌스크, 좌안 우크라이나가 공식적으로 할양되었다.[9] 그 후 폴란드군 사령관 얀 소비에스키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타타르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큰 타격을 입혔고, 카자크인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려 드는 오스만 제국의 의도를 눈치채고 크림 칸국을 침공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 측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중지했다.
2.3. 퇴위와 말년
1668년 9월 16일, 얀 2세는 예지 루보미르스키의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더 이상 왕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귀족들로부터 경원시되는 상황에 깊은 환멸을 느낀 나머지 퇴위를 선언했다. 차기 국왕으로는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선출되었다. 그 후 1669년 4월 30일에 프랑스로 떠났고, 루이 14세의 배려로 파리에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에 자리를 잡고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이후 3년간 수도 생활을 하던 그는 1672년 8월 26일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의 요새가 오스만 제국군의 침략으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몹시 고통스러워한 끝에 1672년 12월 16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676년 1월 31일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 수도원에 안치되었다.3. 가족
- 마리 루이즈 곤차가(1611 ~ 1667): 만토바 공국 공작 카를로 1세 곤차가의 딸. 1645년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와 결혼한 뒤 1648년 브와디스와프 4세가 사망하자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재혼했다.
- 마리아 안나 테레사 바주프나(1650 ~ 1651): 요절.
- 얀 지그문트 바사(1652년 1월 6일 ~ 2월 20일): 요절.
- 클로댕 프랑수아 미뇨(1624 ~ 1711): 그르노블 출신의 재봉사로,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다. 도피네 의회 의원인 피에르 드 포르테와 처음으로 결혼했고, 1653년 이전에 피에르가 사망한 뒤 1653년 8월 25일에 프랑스 원수 프랑수아 드 로피털과 재혼해 성명 미상의 요절한 아들을 낳았다. 1660년 프랑수아가 사망한 뒤, 1669년 프랑스로 망명한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7세기 서신을 바탕으로 1759년에 출판된 <Curiosités historiques(역사적 호기심)>에 따르면, 두 사람은 1672년 12월 14일 파리에서 비밀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672년 12월 12일에 작성된 얀 2세의 유언장에서 그녀에게 상당한 유증을 한 것을 볼 때 친밀한 관계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유언장에는 마리아 카타르지나라는 소녀에게 15,000리브르를 물려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소녀가 두 사람 사이의 딸일 거라고 추정한다.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3남으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버지.[2] Зборів. 폴란드어로는 즈보루프(Zborów).[3] 현재 우크라이나 오흐마티우(Охматів).[4]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동군연합으로 차지하고있던 프로이센 공국의 독립은 이미 1657년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으로 승인되었다.[5]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폴란드 분할과 거의 비슷하다. 사실 폴란드 분할의 원조는 칼 10세 구스타브가 1656년 체결한 라드노트 조약에서 처음 제기되었다.[6] 대 콩데 루이의 아버지.[7] 현 우크라이나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Новгород-Сіверський).[8] 현 우크라이나 소콜리우카(Соколівка).[9] 물론 이 영토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반환될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