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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음반 | ||||
이적 <나무로 만든 노래> (2008년) | → |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2009년) | → | 서울전자음악단 <Life is Strange> (2010년)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f> 언니네 이발관 Sister's Barbershop | }}} | ||
<colbgcolor=#fff><colcolor=#000> 데뷔 | 1996년 11월 1일 정규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 | |||
결성 | 1993년 | |||
해체 | 2017년 8월 7일[1] | |||
멤버 | 이석원(보컬, 기타) 이능룡(기타) 전대정(드럼) | |||
장르 | 모던 록, 인디 록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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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6년부터 2017년까지 활동한 대한민국의 인디 음악 록 밴드.한국 모던 록 계열 인디밴드의 모태이자 영미권의 얼터너티브 록을 한국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독창적인 음악성을 가진 밴드이다. 대표적인 명반으로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 2집 후일담, 5집 가장 보통의 존재가 있으며, 특히 5집의 나이 40을 넘긴 음악활동의 후반기에 전성기 시절의 작품을 비평적, 상업적으로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다.[2]
참고로 언니네이발관이라는 밴드명은 1980년대에 나온 동명의 일본 로망 포르노 영화의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그 영화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의 한국에서 야한 비디오를 틀어주는 만화방에서 인기가 있었던 일본 에로 영화이다. 학창 시절 만화방에서 인상깊게 본 그 영화의 제목을 그대로 밴드명으로 삼은 것이다. 에로 영화에서 밴드명을 따온 케이스로는 플레이밍 립스가 있다.
2. 역사
2.1. 결성 초기 (1993 ~ 1995)
유철상 | 류기덕 | 정대욱 | 이석원 |
1990년대 초반 당시 하이텔 음악 동호회에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음악인들이 많았는데[3] 음반가게 사장 이석원은 이러한 음악인들을 엄청나게 까는 네티즌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던 이석원은 활동하던 PC통신의 메탈 동호회 '메탈동'에서 하이텔 동호회 시샵인 류기덕과 함께 '모던 락 소모임'이라는 모임을 만드는데[4] 실제 모임이라도 열리면 자신이 음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게시판에 자신도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리더라고 구라를 쳤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런 구라가 먹혀들었다. 참고로 밴드명은 이석원이 어렸을 때 전파상 아저씨가 이석원 모르게 끼워준 성인영화 비디오의 제목에서 따왔다.[5] 내용보다는 이름이 예뻐서라고 한다. [6]
이후 꾸준히 구라를 치던 이석원은 KBS 라디오 방송인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출연해서 공식적인 구라를 쳤고, 류한길이 키보드로, 류기덕이 베이스로 합류하면서 가상의 밴드에 멤버까지 두게 된다. 참고로 이들 모두 악기 연주에는 문외한이었다. 재밌는 점은 이석원만 밴드 리더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실제로는 악기 연주를 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연주자라고 이석원에게 구라를 쳐서 밴드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즉, 멤버 전원이 서로를 속인 것. (진중권의 문화다방 47회에서 이석원 본인이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이렇게 단순한 해프닝에 끝날 뻔 했던 이 사건은 이석원과 윤병주의 인연으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1993년 이석원의 레코드 가게에서 만난 윤병주와 이석원은 친구가 되고, 윤병주가 속한 노이즈가든이 1994년 가을 제1회 톰보이 록 콘테스트에서 <Rain Of Compromise>로 우승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석원이 진짜 음악인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이다.
결국 윤병주와 주위의 권유로 이석원은 음악을 시작하게 되고 이즈음 팔이 길다는 이유로 유철상[7]을 드럼으로 영입해서 4인조 밴드를 완성한다.
당연히 출발은 쉽지 않았다. 윤병주가 이석원에게 기타를 가르쳐준다고 나섰을 때 이석원은 코드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노이즈가든의 이상문은 이들을 처음 접했을 때 악기 실력을 보고 혀를 찼다고 한다. 그들의 첫 합주는 후에 너바나 트리뷰트 앨범에 수록하기도 한 너바나의 'Come As You Are'였는데, 이석원이 기타 인트로를 연주할 실력이 못 되어서 베이스를 맡은 류기덕이 대신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어느 펜션에 갇히듯 합숙 훈련을 거쳐 그나마 들을 만한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합주를 하던 중 이석원은 다시 전영혁의 음악 세계에 나갈 기회를 잡는다. 윤병주는 이석원에게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연주를 할 것을 권유했고, 이석원도 당시 실력으로는 밴드가 타 밴드의 커버라는 기준이 있는 음악을 하기엔 어려웠고, 애초부터 홍대거리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이 연주력과 원곡의 재현도에만 중시한다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8] 'FUNNY AFTERNOON'[9]과 '로랜드 고릴라'라는 노래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나간 전영혁의 음악 세계에 이 노래를 틀었다.
특이한 이름과 그 유명한 악플러 이석원이 이끄는 밴드로 관심 받던 언니네 이발관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자 음악인들의 관심은 폭발하였고, 기타리스트 정대욱도 이 라디오를 듣고 감동하여 밴드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한낱 가상의 밴드였던 언니네 이발관은 무려 5명의 멤버들과 함께 1995년 7월 29일 홍대 클럽 드럭에서 데뷔 무대를 갖게 된다.
2.2. 언니네 이발관 1기 & 2기 (1996 ~ 1999)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는 홍대씬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온다. 당시만해도 홍대씬에는 너바나와 메탈리카를 필두로 한 커버곡들로 가득했지만, 언니네 이발관은 최초로 셋 리스트를 자작곡으로 채우며 떠오르는 루키이자 다른 밴드들의 견제 대상이 된다.1996년 2월 밴드는 첫 데모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발매하고, 이 데모는 대형 기획사의 손으로 들어가 밴드는 금전적 지원을 등에 업게 된다. 그들은 영국까지 날아가 런던의 메트로폴리스 스튜디오에서 유명 엔지니어 이안 쿠퍼에게 마스터링을 받아 1996년 10월 데모와 동명의 정규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발매한다. 동시대의 얼터너티브 록을 한국에 도입하는 등 음악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결과물을 담고 있었고,[10] 이후 수많은 인디밴드에 영향을 주면서 한국 인디신을 형성한 모태가 되었다. 같은 1세대인 크라잉넛, 노브레인, 델리스파이스부터 언니네이발관에 자극을 받아 작곡을 시작했고, 이후 이발관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갔다.
1집의 성공 이후 원래의 직장으로 돌아간 류기덕, 흑인 음악에 너무 심취한 유철상[11], 데이트리퍼라는 테크노 뮤지션으로 따로 독립한 류한길[12] 그리고 고3 신분으로 수능을 치러간 정대욱이 모두 팀을 떠나고 이석원 혼자만이 남게 되지만, 노이즈가든에서 이상문과 김태윤이 합류하였고 정대욱이 연세대학교에 합격하면서 금의환향해 밴드는 다시 진열을 갖추고 1998년 2집 <후일담>을 발매한다.
하지만 '가요의 형식과 사운드를 지니고 있다.'라는 이유로 스노비즘이 만연했던 당대 평론가들은 이 음반을 외면했고 상업적으로도 완전히 실패하면서 밴드는 무너지게 된다. 결국, 또 다시 정대욱을 비롯해 멤버 전원이 탈퇴하면서 이석원은 혼자 남게 된다.[13]
2.3. 언니네 이발관 3기 (2002 ~ 2006)
정무진 | 전대정 |
이능룡 | 이석원 |
2집의 큰 실패 이후 이석원은 결혼 및 취직[14] 을 하고 밴드는 공백기이자 사실상의 해체 수순에 들어간다.
한편, 음악계에서는 뒤늦게나마 <후일담>을 주목하는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1집의 참신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듣기 쉽게 정제된 이석원의 멜로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재적소에 배치된 정대욱의 기타 편곡의 조화가 뒤늦게 재평가받은 것이다.[15]
그렇게 이전과 다른 높은 재평가를 받으며 이석원은 인디의 대들보로서, 당시 유일한 국내 인디락 페스티벌이던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2001에 밴드 존 도우의 기타리스트 이호준[16], 절친한 친구인 2기 멤버였던 이상문, 김태윤과 함께 초대되어 3년만의 컴백을 하게 된다. <유리>, <동경+보여줄 순 없겠지>, <어제 만난 슈팅스타> 총 3곡을 연주했으며 <동경+보여줄 순 없겠지>는 라이브 녹음 음원이 존재한다.
이후 일본의 아카사카 블리츠에서 공연까지 하게 되며 음악인으로서 재기의 기회를 맞이하나, 왠지 모를 미묘한 위화감에 이석원은 새로이 모였던 멤버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모 닷컴기업의 회사원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석원은 3집을 작업할 마음이 없었지만 아픈 강아지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음악계로 돌아오고, 인터뷰 도중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던 모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3집을 낼 준비를 하게 된다. 3집을 내기 위해 이석원은 탈퇴했던 키보디스트 류한길과 2집 때 만들다 그만둔 전자음악을 다시 작업하면서, 새 베이시스트 정무진과 오디션을 보며 블랙메탈 밴드 출신의 드러머 전대정을 멤버로 맞게 되며, 날고 긴다는 홍대 인디씬의 멜로디 메이커들 중에서도 기타리스트를 오랫동안 뽑지 못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극적으로 이능룡을 멤버로 맞게 된다.[17]
마침내 언니네 이발관은 2002년 3집 <꿈의 팝송>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인디 씬 역사상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으며, 평 역시 냉담했던 2집에 비해 따스했다.
하지만 이석원과 언니네 이발관은 2003년 8월 18일, 밴드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문이 윌슨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초 이석원이 이혼을 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2004년 그들은 4집 <순간을 믿어요>를 이상문 헌정반으로 발매한다. 이 작품은 이석원이 자신들에 대한 팬들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형성을 띤 앨범이었으나 전작보다 부족하다는 엇갈리는 평을 받았다.
4집 발매 후, 정무진이 자신의 밴드를 위해 떠나고 이석원은 인사동에 카페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18]을 개업하게 된다. 결국, 밴드 활동에 비중을 두지 않는 이석원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이능룡이 팀을 탈퇴하고, 전대정과 이석원의 사이 역시 멀어지게 된다. 당초 이석원은 2006년 초 5집의 발매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19] 이 사건으로 음반 제작은 휴지기에 들어간다.
이능룡이 탈퇴한 후 일부 공연에서는 정대욱이 언니네이발관의 기타 세션으로 대신 활동하기도 했으며,당시 방송 출연분 이능룡은 재주소년의 박경환과 함께 공연을 한적도 있다.
2.4. 언니네 이발관 4기 (2007 ~ 2017)
그러던 어느 날 이석원에게 '자신이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란 섬뜩한 자각'을 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다행히 이들은 다시 뭉쳐서 5집인 가장 보통의 존재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석원의 광기에 가까운 편집증으로 인해 발매 연기가 계속되었다. 밴드는 2007년 12월에는 꼭 5집을 발매한다며 앨범 발매 기념공연을 위해 공연장까지 대관해놨는데, 앨범 발매는 다시 연기되었고 공연장 대관은 취소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사상 초유의 나오지도 않은 앨범의 발매기념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밴드는 '아름다운 것', '산들산들', '가장 보통의 존재', '인생은 금물' 등의 곡을 선보였는데 앨범에 수록된 버전과는 가사가 상당히 달랐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발매일이 나왔다가 또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5집은 2008년 8월 8일 드디어 발매 되었다.[20]5집은 발매되자마자 2008년 최고의 한국 앨범으로 꼽혔으며 역시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비롯해, '올해의 모던록 음반', '올해의 모던록 노래'부분에서 3관왕을 달성했다. 현재도 1집, 2집에 버금가는 밴드의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느리게 진행된 5집 작업에 지친 이석원은 당초 6집 음반을 2년 내에 빠르게 제작할 것으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상 이러한 계획은 계속 뒤집혔고, 6집의 제작 기간은 계획 외로 상당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2010년 쯤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던 음반은 마지막 정규 음반이라는 선언하에 2017년 6월 1일 <홀로 있는 사람들>들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2.5. 활동 마감 (2017.08.07)
소식이 늦었습니다.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예전에 써 둔 편지를 올립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미안해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그만 두길 바래왔어요.
하지만 어딘가에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털어놓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한번만
이번 한장만 하다가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그간 실천하지 못한 계획들도 있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서 인사드리고 떠나면 좋겠지만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음악이 일이 되어버린 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벗어나고 싶어했기에
음악을 할때면
늘 나 자신과 팬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더이상은 그런 기분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음을..
이렇게밖에 맺음을 할 수 없는
제 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음악을 그만 두고
더이상 뮤지션으로 살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23년동안 음악을 했던 기억이
모두 다
즐겁고 행복했었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여러분에 대한 고마운 기억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훗날 언젠가
세월이 정말 오래 흘러서
내가 더이상 이 일이 고통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죄를 짓는 기분으로
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시 찾아 뵐게요.
감사합니다.
23년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것
잊지 못할 순간들을 만들어 주신것
모두 감사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2017년 8월 6일 저녁 이석원 올림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예전에 써 둔 편지를 올립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미안해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그만 두길 바래왔어요.
하지만 어딘가에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털어놓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한번만
이번 한장만 하다가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그간 실천하지 못한 계획들도 있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서 인사드리고 떠나면 좋겠지만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음악이 일이 되어버린 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벗어나고 싶어했기에
음악을 할때면
늘 나 자신과 팬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더이상은 그런 기분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음을..
이렇게밖에 맺음을 할 수 없는
제 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음악을 그만 두고
더이상 뮤지션으로 살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23년동안 음악을 했던 기억이
모두 다
즐겁고 행복했었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여러분에 대한 고마운 기억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훗날 언젠가
세월이 정말 오래 흘러서
내가 더이상 이 일이 고통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죄를 짓는 기분으로
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시 찾아 뵐게요.
감사합니다.
23년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것
잊지 못할 순간들을 만들어 주신것
모두 감사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2017년 8월 6일 저녁 이석원 올림
머지 않아 언니네 이발관이 마지막 정규 음반을 내놓을 것이란 건 알려진 사실이었다. 지금은 백지화된 6집 <서울의 달>, 7집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 연작 프로젝트 당시 이석원은 7집이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정규 음반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싱글이나 공연 활동은 계속 할 예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당시에도 "이후에 라이브 앨범도 계획 중"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멀리 갈 것도 없이 '혼자 추는 춤' 싱글을 내놓을 때만 해도 입장에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집을 작업하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언니네 이발관은 6집을 발매할 때가 다가오자 아예 음악 활동을 마감할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다.
리더 이석원이 지니뮤직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보면 '능룡이는 계속 음악을 할 거라 상관없지만 나는 녹음때만 쓸 스튜디오를 구해야 했다'라고 언급해 본인은 더 이상 음악 활동 계획이 없다는 듯이 말하는가 하면, 밴드 언니네이발관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이석원의 네이버 블로그[21]에서도 "이제 내 자신이 음악을 한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 "이것이 마지막 앨범이기 때문이다" , "저의 마지막 목소리를 잘 들어 주십시오"라는 언급을 남겨 음악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는 분위기를 보였다. 당연히 팬들은 멘붕했다. 정규 앨범만 마지막이라는 입장을 믿고 새 앨범으로 꾸밀 공연을 기다려온 팬들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다.
동료 음악인들이나 평론가들의 트윗에서도 언니네이발관의 음악 커리어가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22]이 보였으며 더군다나 6집의 발매 이후 6월 2일에 공연이나 여타 다른 홍보활동에 대한 계획이 전무하다고 알려짐으로써, 정규 앨범으로서의 마지막이 아닌, 언니네이발관 커리어의 정말 마지막 앨범임이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석원은 8월 7일 공식 홈페이지에 해체 선언문을 올리면서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을 통보한다. 이 글에서 그는 즐거워서 시작했던 음악이 직업으로 바뀌면서 스트레스를 받은데다 팬들의 기대에 대해 의무감이 더해져 중압감이 심했고,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음을 밝혔다.[23] 그러면서도 언젠가 덜 고통스러워지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재결성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었다.
3. 멤버
24년간 총 11명의 멤버가 정식으로 언니네 이발관에 참여했다.3명의 베이시스트와 3명의 드러머 그리고 4명의 기타리스트와 1명의 키보디스트가 있었으며, 1집의 <로랜드 고릴라>의 류기덕과 객원 보컬을 제외하면 전 곡의 보컬은 이석원이 담당하였다.
3.1. 이석원
자세한 내용은 이석원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이능룡
자세한 내용은 이능룡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전대정
자세한 내용은 전대정 문서 참고하십시오.3.4. 전 멤버
3집 활동 이전까지는 멤버 변동이 잦았다.- 류기덕 aka Jade Key(Bass) - 데모테잎부터 함께한 언니네 이발관의 1집 활동 베이시스트였다가 창천 온라인, 미르의 전설 등으로 유명한 게임회사 위메이드의 개발이사 자리에 앉았으며 부사장이 되었다. 1집에서 유일하게 이석원 작곡이 아닌 곡 상업 그런지는 류기덕이 작곡했다. 아이돌, EDM 등 다양한 곡을 작업하는 모습도 보여진다. 현재는 하드스타일 DJ로 전향하여 활동하고 있다.
- 류한길 aka Daytripper(Keyboard) - 언니네 이발관 키보디스트 겸 데이트리퍼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한국 테크노 1세대 중 한명. 테크노 9단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 뮤지션 겸 사운드 아티스트로서 노이즈 위주의 사운드 미디어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1집 발매 이전 공식적으로 탈퇴[24]했지만 임주연이 세션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내외로 언니네이발관의 작업에 많이 참여했다. 특히 3집의 뉴웨이브 느낌 나는 신스 사운드들은 전부 류한길의 테크노 뮤지션 시절 어시스트가 들어간 작품들이다. 델리스파이스 멤버 윤준호와도 친했는지, 윤준호의 꿈에 나타나 금방 울듯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4집의 '한길'은 이 꿈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
- 유철상 aka 김반장(Drum) - 데모 테잎부터 1집 활동까지 함께했으며, 언니네를 떠난 뒤 음악 스타일을 완전히 바뀌어 김반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흑인 음악으로 전향했다.[25]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아소토 유니온과 윈디 시티가 있다. 이석원하고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듯 하다. 요약하자면 김반장이 백인음악을 상당히 경멸하기 때문이라고[26]. 이석원은 음악적 센스만은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처음에 언니네 이발관의 드러머가 된 이유가 "팔이 길어서"라고 한다. 2016년에는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다.
- 정무진 (Bass) - 2002년 초에 들어와서 3, 4집 제작에 참여했으며, 2004년까지 함께한 베이시스트. 더캔바스라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어 탈퇴하게 된다. 이석원은 3기 멤버를 구할 당시 당시 세션으로 들어온 정무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27] 둘이서 나머지 멤버를 모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활동기간동안 작곡란에도 이석원 다음으로 이름을 많이 올렸다. 음악적 공헌이 큰 멤버. 2017년 현재, 옐로우 몬스터즈의 이용원이 만든 밴드 '소닉 스톤즈'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한다.
- 이상문 (Bass) - 이석원의 최고 절친이자 노이즈가든과 공유한 멤버 1. 이름만 있던 가짜 밴드였던 언니네 이발관이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는 데 윤병주와 함께 큰 도움을 준 팀의 정신적 지주이며, 류기덕의 공백을 채워 2집 제작 시점부터 베이시스트로 활동하였다. 2002년 초에 1기 활동을 완전히 종료할 때 밴드에서 탈퇴하지만, 3기의 2002년~2003년 초기 공연에서는 함께 베이스를 맡기도 하는 등 사실상 밴드 일원처럼 활동했다. 1970년 12월 30일생으로 이석원(1971년생)보다는 한 살 많지만 같이 알던 윤병주(1971년생)[28]가 빠른 년생이었던 탓에 친구를 먹었다. 팀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안타깝게도 지병인 윌슨병으로 2003년 8월 18일 숨을 거두었다. 4집 <순간을 믿어요>는 그에 대한 일종의 헌정 앨범이다.
- 이호준 (Guitar) - 2001년 쌈싸페 컴백공연부터 도쿄 아카사카 블리츠, 2002년 초까지 잠시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후에 존 도우(John Doe)[29]라는 밴드를 재결성한다.
- 정대욱 aka 정바비(Guitar) - 줄리아하트와 바비빌, 그리고 가을방학으로 활동한다. 데모테잎부터 1집, 2집 시절의 공연들까지 함께했던 멤버. 라디오에서 나온 언니네이발관의 초기데모를 듣고 뿅가서 밴드에 들어온 매니아로, 스웨이드의 리처드 오크스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이별 과정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기에, 이석원은 이후 인터뷰에서 그를 이혼한 전 부인이라고 묘사했다. 같이 살 수 없지만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는 의미. 그렇다고 사이가 나빠진 건 또 아니라서 이석원은 줄리아 하트 3집에 피처링을 해주었고 한두 차례 1, 2집 시절 이야기를 주제로 같이 인터뷰하기도 했다. 2006년 경에 이능룡이 잠시 이발관을 탈퇴했을 때는 정바비가 아예 세션 기타리스트로 공연에 참여하기까지 했다.[30] 본격적으로 프로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언니네이발관이기도 하다.
3.5. 세션
고정 멤버는 보컬,기타,드럼 3인인 관계로 나머지 파트의 경우 세션 멤버와 함께 활동한다.- 유정균 (Bass) - 베이스 세션. 세렝게티의 베이시스트. 4집 활동 중간에 정무진 탈퇴 이후로 계속 세션으로 활동중이다. 5집에선 녹음에도 참여했고, 거의 반 멤버로 봐도 될지도. 물론 공연에서 멘트를 하거나 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세션인 만큼 노래를 다 외우는 건 아니라 월요병처럼 잘 안하는 곡 연주할 때는 곡 바뀔 때 마다 악보 넘기는 것이 인상적. 사실 월요병에선 이석원 본인도 가사 보고 할 때가 많다. 16년 2월 4일 이석원의 일기에 따르면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잠시 여행을 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리를 잡으려는 생각으로 갔다는 듯. 이발관 활동도 활동이지만 세렝게티 활동은 어떻게 되는건지...[31] 아무튼 이석원은 이에 대해 음악 활동의 일단이 뭔가 매듭이 지어지는 것 같다고 표현을 했다. 이석원의 추후 일기를 보면 6집 녹음을 위해 7월에 잠깐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 폐인 (Keyboard) - 윤병주, 이상문과 매우 친한 친구로, 블랙메탈 밴드인 칼파에서 활동했다. 메틀 계열과 아방가르드 계열의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언니네이발관을 싫어했지만, 이석원의 세션 요구(...)에 3집 첫 공연부터 세션을 뛰게 되었으며, 이후 이석원과 상당히 가까운 관계가 되어 친해진다. 활동 중 안타깝게도 친구인 이상문의 죽음과 음악적 후원자였던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언니네이발관에 상당히 큰 감정적 유대를 느꼈고, 빚을 진 기분이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4집 중간부터 고딕메탈 밴드인 A doom을 만들어 활동하게 되며 세션을 그만두었다. 전대정과는 상당히 괴상망측한 관계인데, 칼파를 배반하고 언니네이발관으로 떠난 전대정을 연습실에서 내쫓았다가 언니네이발관 세션활동을 하며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 잘해보자'며 상당히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 임주연 (Keyboard) - 키보드 세션. 폐인의 빈 자리를 비고정적인 세션으로 채우다가[32] 5집 이후로는 임주연이 추가, 거의 고정 세션으로 참여중이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으로, 그녀 개인으로서도 솔로로 활동하는 뮤지션이다. 현재 쌍둥이를 출산했다.
- 이지형 (Guitar/Vocal)- 예전 위퍼 보컬로 데뷔하여 토이 6집 등을 활동했던 그 이지형 맞다. 객원보컬 및 기타로 3-4집에 참여했었다. 이후 서울전자음악단 세션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현재 솔로활동을 하고 있다.
- 정순용 (Vocal) - 마이언트메리의 보컬이자 토마스 쿡으로 활동하던 사람. 4집 <키다리 아저씨> 라는 곡의 객원보컬로 참여했었다.
- 박민우 (Keyboard) - 네이버 온스테이지 촬영 및 언니네이발관의 마지막 라이브인 GMF 2016 공연 시에 세션 키보드로 참여했다. 임주연의 출산 이후에는 박민우가 대부분 세션을 맡은 것으로 추정.
4.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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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음반 | |||||
비둘기는 하늘의 쥐 | 후일담 | 꿈의 팝송 | 순간을 믿어요 | 가장 보통의 존재 | 홀로 있는 사람들 |
1996.11.01 | 1998.12.01 | 2002.10.17 | 2004.07.12 | 2008.08.08 | 2017.06.01 |
싱글 / 리마스터 / 참여 | |||||
혼자 추는 춤 | 후일담 (REMASTERD) | 너바나 트리뷰트 / Smells Like Nirvana | Indie Power 1999 |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음반 | A Tribute To 들국화 (헌정앨범) |
2015.12.17 | 2017.06.27 | 1997.09.23 | 1999.07.01 | 2004.12.01 | 2001.02.13 |
5. 평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까지 이만한 멜로디와 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이석원 밖에 없다.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일부 리스너들은 국내 최고의 록 밴드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들국화 헌정 앨범에 '솔직할 수 있도록'을 트리뷰트 했는데 평론가 박모씨 왈 “나머진 다 폐기물 수준이고 들을 만한건 언니네 이발관 밖에 없네.” 자기들은 이건 100%가 아니라고 낙담하며 제작사에 곡을 갖다줬는데 뜻밖에도 잘했다고 칭찬받아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정규앨범 중에는 1,2,5집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33]아직 우리나라 음악을 대상으로 한 리스트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 몇 안되는 리스트에서 이 세 앨범은 빠지지 않고 선정되는 편이다. 2007년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서 1집이 34위, 2집이 68위에 선정되었으며 1998년 동 리스트에서도 1집이 3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2011년에 백비트에서 선정한 1990년대 베스트 앨범 100 국내 순위에서는 2집이 10위, 1집이 14위에 올랐으며 2000년대 베스트에서는 5집이 무려 2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2018년에 다시 선정한 판본에서는 5집, 1집, 2집이 각각 50-84-90위로 선정됐다.
6. 주요 수상
한국 대중 음악상 | ||||
올 해의 음반 | ||||
<nopad> | → | <nopad> | → | <nopad> 파일:external/image.bugsm.co.kr/179938.jpg |
나무로 만든 노래 <2007> |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 Life is Strange <2009> |
7. 여담
- 4집은 라이브를 고려해 작곡하고, 5집은 스튜디오 앨범으로 생각하고 작업했는데 되려 라이브에선 5집 곡을 더 많이했다고 한다.
- 밴드 공식 홈페이지의 도메인이 꽤나 아스트랄하다. # 일명 쉐쿄바레 무뵤바레. 이는 후에 만들어진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의 움직여>의 일종의 모태가 된다. 당초엔 도메인 그대로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몸'을 움직여'가 될 뻔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가 됐다는 듯하다.
- 2008년엔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출연. 원래 타임테이블에는 꽤 이른 순서에 나오기로 되어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 뒤로 밀려났고 결국 한참 나중에 공연 시작. 이석원은 심히 빡쳤는지 딱 두 곡만 부르고 곧바로 퇴장. 이 모습을 본 이능룡이 급히 따라 나갔고 무대에 혼자 남은 드러머 전대정이 즉흥적으로 드럼을 치며 팬서비스 겸 지원 요청을 날렸지만 결국 그대로 공연이 끝났다. 당시 공연이 올림픽공원이었는데, 허가받은 공연시간은 11시였다. 올림픽공원 근처는 주거 지역이라 허가 시간을 넘기면 구청으로 컴플레인이 엄청나게 쏟아져서 해당 기획사(당연히 쌈싸페는 쌈지에서 주최, 주관)가 불이익을 받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11시까지 시간을 맞춰야 하는데, 언니네 이발관 전에 공연한 밴드들이 대부분 조금씩 시간을 더 썼고, 결국, 그 딜레이 타임의 폭탄을 언니네 이발관이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스탭들이 하루종일 노심초사하며 공연 시간을 맞춰보려 했지만 실패. 심지어 스케줄 문제로 스키조와 함께 합동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던 히든 게스트는 무대도 못서고 집으로 돌아갔다. 쌈싸페 측은 공연 세팅 시간을 줄이려고 회전식 무대 도입, 올림픽공원 입성 등 많은 준비를 했으나 생각보다 성공적이지 못하여서 아쉬웠었다고 한다.
- 유희열의 스케치북 1회에 출연한 밴드이다.
- 아이유가 '가장 보통의 존재'를 커버했다. 이후 마지막 앨범에도 아이유가 함께 참여했다. 아이유는 앨범 참여를 두고 영광이라고 밝혔다.
8. 관련 문서
[1] 언니네 이발관 공식 홈페이지의 8월 7일자 마지막 일기에 쓰여져 있다.[2] 언니네이발관 5집은 15만 장이 팔렸는데 한국의 인디밴드가 현재 15만 장을 팔았다는 건 한국에서 자칭 '음악 좀 듣는 사람들'은 다 샀다고 봐도 무방한 수치이다.[3] 신해철, 정석원, 이적, 이승환, 유희열 등.[4] 여기서 델리스파이스도 나왔다. 이석원처럼 똑같이 멤버를 모집했는데, 이 쪽은 진짜 음악 하는 사람들이 왔다.[5] '우노 고이치로의 자매 이발소'로 추정.#[6] 이에 대해 영화가 아닌 포르노라고 이야기되는 등 오해와 루머가 생겨나서 슬음대에 출연해 정정하기도 했다. 아무 생각없이 이름이 재미있어서 사용한 것이고, 그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 제작 방식과 같은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새로운 음악팬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이야기 했다.[7]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던 윈디시티 김반장의 본명[8] 1집의 '로랜드 고릴라'라는 노래는 이러한 밴드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노래다.[9] 훗날 우스운 오후로 이름이 바뀌어 1집에 수록된다.[10] 이 문서의 이전 버전까지만 해도 신해철보다 먼저 메트로폴리스에서 마스터링을 받았다고 써 있었지만, 실제로는 예상대로 신해철이 먼저 메트로폴리스에서 작업을 했다. 언니네이발관의 1집은 96년 11월에 발매됐으나 신해철이 작업했던 영화 정글 스토리의 OST 앨범은 96년 5월에 발매됐다. 신해철은 이미 메트로폴리스에서 마스터링을 받았다. 또한 공교롭게도 언니네이발관과 신해철의 마스터링을 진행한 엔지니어는 둘 다 이안 쿠퍼다.[11] 유철상은 후일 김반장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아소토 유니온과 윈디 시티라는 밴드를 결성한다.[12] 테크노를 접은 이후에는 특이하게도 아방가르드 계열로 전향했다. 이쪽에서는 나름 세계적으로 꽤 알려진 듯.[13] 이상문과 김태윤, 그리고 짧게 활동한 이호준은 2001년에 탈퇴했다.[14] 2000년대 초 벤쳐기업 붐이 일었을 때, 2~3년간 IT계열 벤쳐기업에서 근무했다.[15] 현재, <후일담>은 앨범의 완성도만으로 한국 인디의 시작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1집과 맞먹는 평가를 받았고, 나아가 현재까지도 언니네 이발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16] 정대욱은 이석원과 스타일이 달라 갈라섰고, 이미 자신의 밴드인 줄리아 하트를 준비하던 과정이었기에 재결성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17] 이능룡이 없었다면 완전히 신스팝으로 음악을 만들어, 스튜디오 밴드로서 활동하려는 생각을 했다고.[18] 2015년 폐업.[19] 2005년 월요병 콘서트에서 작업중인 신곡이라며 '인생은 금물과 알리바이'를 부른 적이 있는데, '인생은 금물'의 경우 '지금의 인생은 금물'과는 전혀 달랐다. 가사도, 멜로디도.[20] 그런데 그나마 그것도 급하게 작업한건지 초판에는 부클릿 가사에 틀린 부분이 여럿 보였다.[21] 이곳은 작가 이석원의 공간으로 봐야 한다.[22] 2017년 8월 7일, 언니네이발관의 해체 및 은퇴 선언 후 윤종신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힘이 조금 빠진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23]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이석원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음악 활동을 끝내고 싶다는 바램을 말하고 있었으며, 후에 이석원은 일기를 통해 음악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어떤 다른 일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24] 원인은 발매 이전 실력 부족에 따른 회의와 갈등.[25] 정확히는 랩한다고 밴드를 탈퇴. 이후 클럽 마스터플랜 중심으로 활동하다, 어반한 느낌의 훵크/소울 음악으로 밴드를 꾸려 컴백한다. 몇년 후 다시 레게로 장르를 변경..[26] 김반장이 흑인 음악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백인 음악을 굉장히 배척했고 이런 부분에서 일방적으로 이석원과의 연락을 끊은 것이라고. 이석원은 흑인 음악도 존중한다고 밝혔다.[27]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절친 이상문이 베이시스트를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이 계속 맡겠다고 한 것까지 괜찮다고 말하고 영입했다고 한다.[28] 역시 노이즈가든 소속. 이후 로다운30에서 활동한다.[29] 90년대 중후반 활동하다 1차 해체를 했으며 로다운30의 김락건도 이 밴드 출신이다.[30] 이 시기의 공연이 김동률의 To You 방송분에 남아있다. 하필 정바비가 참여한 적도 없는 3집 곡들의 라이브다.[31] 당시에는 이소라의 세션까지 겸하고 있었다. 이석원이 소개해 줬다는 듯.[32] 언플러그드 공연 등은 폐인과 함께하기도 했다.[33] 그렇다고 3집과 4집의 평가가 낮은것도 아니다. 3집 '꿈의 팝송'과 4집 '순간을 믿어요' 두 앨범 모두 대중과 평단에게 아직까지도 고평가를 받고있는 명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