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11:53

역사교육


1. 개요2. 의미3. 역사교육의 목적4. 역사교육의 역사5. 역사교육의 특성6. 역사교육과 이해관계
6.1. 역사교육과 국가6.2. 역사교육과 이익집단6.3. 역사교육과 교과서
7. 역사교육계
7.1. 국내 역사교육학자
8. 관련 문서

1. 개요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 전공으로 보면 역사교사 준비생들이 배우는 역사교육론의 주체이다. 즉 해당 교과교육학을 통해 습득 해야 하는 정보.

2. 의미

역사교육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보면 역사교육하는 것이다. 이를 풀어쓰면 역사교육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며, 역사를 통해 과거의 인간활동을 이해하고, 역사적 기능과 태도와 가치관을 함양한 인간으로 변화시키려는 의도적인 활동이다. 즉 역사교육은 과거, 현재, 미래를 서로 연결시켜 배우는 교육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1]

3. 역사교육의 목적

역사를 왜 교육하는가? 학교에서 옛날 왕들의 업적과 사건들을 외우게 하여 시험으로 성적을 산출해 등수를 뽑아낸 후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서인가, 역사를 알아야 여행 간 경주에서 멍청한 거 티내지 않고 더 알차게 놀 수 있어서인가, 역사를 배워야 중국인 친구가 왜 천안문 소리만 해도 귀를 막는지 이해할 수 있어서인가. 이러한 이유들은 현실의 일면들에 불과하며 진실로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2]

일반적으로 이러한 목적들이 역사교육의 목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적론은 다양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목적들은 일반론적인 분류로 파악하면 되고, 그 외에 상황이나 주체에 따라 다양한 목적이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위의 목적에 포함될 수도 있고, 또는 새로운 형태의 목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역사교육 담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역사교육으로, 공공선을 위한 역사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교육이 시민교육은 아니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으며, 민족과 국가의 담론도 여전히 역사교육의 목적론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는 교수자나 학습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역사교육의 특성상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역사교육에 참여하는 다양한 주체들은 역사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목록화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목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

4. 역사교육의 역사

역사교육은 동서를 막론하고 통치자들의 교양과 정치에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위에서 언급한 바 같이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근대적인 역사학의 성립 이전에도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역사교육학이 본격적으로 부각을 드러내기 전까지 사학의 분야와 이론 정립이 역사를 교육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헤로도토스투키디데스가 각각 쓴 《역사》, 공자의 《춘추》, 사마천의 《사기》 등 고대부터 역사를 저술한 책은 있었고 이런 저술들을 통해 역사이론이 체계화되고 심화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내러티브적 서술, 투키디데스는 실증에 입각한 서술로 유명하며, 한대 역사학은 경사일체의 유교적 경전에서 사학을 독립시키는데 이르렀다. 특히 사기는 기전체 사서의 효시가 되어 후대의 역사서 편찬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15]

역사서의 편찬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삼국에서도 있어서 고구려는 《유기》와 《신집》, 백제는 《서기》, 신라는 《국사》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이 역사서들은 안타깝게도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대에 이르러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역사 이론서라고 할 수 있는 유지기의 《사통》이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는 역사가가 갖춰야 할 기본 재질을 재능, 지식, 의식의 3가지로 보았으며 특히 의식, 즉 역사의식의 역할을 중시해서 사관폭군간신을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가의 임무는 직필에 있으며 사실에 근거한 직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지기는 이미 이 때부터 관찬 사서를 멀리하고 사찬 사서를 쓸 것을 주장했다. 당 중기에는 두우가 《통전》이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정치사 일색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제도와 문물을 유형별로 분류한 제도사의 정석을 마련한 의의가 있다.[16]

통일신라김대문은 《계림잡전》, 《고승전》, 《화랑세기》, 《한산기》 등을 저술하여 한민족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꾸밈없이 기록하는 것에 초점을 뒀다. 최치원은 《계원필경》, 《제왕연대력》을 저술하였고 최치원 삼한설을 주창하여 삼한과 삼국의 연결을 연구하였다.[17]

고려에는 초기에 역사서로 《구삼국사》, 《편년통재》, 《속편년통재》가 있었으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국의 최고()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기전체 사서이며 유교사관으로 쓰여져 도덕주의와 합리주의를 내포하고 있었다.[18]

송대에는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해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자치통감은 제왕이 정치를 함에 있어 거울처럼 들여다볼 내용이라는 뜻으로 편년체 사서의 명저로 꼽히고 있다.[19]

한편 일한국 때의 라시드웃딘 파둘라는 《연대기총찬집사[20]를 써서 진정한 의미의 인류 최초의 세계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선 몽골과 인도, 투르크, 유럽 등 유라시아 어러 민족의 역사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21]

조선에서는 17세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서당 교재로 《동몽선습》이 사용됐다. 동몽선습의 내용은 중국사와 한국사를 같이 가르쳤고 성리학적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했지만 전통 초등교육기관에서도 체계적인 교재로 역사교육을 했다는 의의가 있다.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한 고로 역사학에서도 고증사학이 발달했다. 그 중 특기할 만한 학자로는 조익과 장학성이 있는데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5백여 중요항목을 제시해 정사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중국사 일반론 및 각 시대별 특수한 역사 성격을 해설했으며, 장학성은 《문사통의》를 지어 유지기의 사통에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사통의는 역사학의 방법과 이론을 서술한 역사평론서로 장학성은 역사 속에 잠겨있는 원동력과 원칙을 추구하는데 사학의 근본이 있음을 강조했다.[22]

조선 후기가 되어 실학이 흥함에 따라 수많은 국학 발달이 나타났는데 역사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한백겸은 17세기 초기 실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동국지리지》를 편찬하여 실증적인 역사지리학 서술을 창시했다. 그는 위치, 강역, 종족, 형세를 고증해 한강을 경계로 북쪽에 (고)조선, 남쪽에 삼한이 위치했다는 것과 고구려의 기원이 평안도 성천이 아니라 만주지방이라는 걸 처음으로 고증하였다. 이익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을 시세 > 행불행 > 시비 순서로 보아 도덕중심사관을 비판했으며 중국과 오랑캐의 차별도 부정하여 당시 조선에 있었던 중화사상을 탈피했다고 평가받는다. 정약용은 이익의 시세보다 한층 더 과학적인 기준을 추구하여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기준을 이용후생과 부국강병에 두었다. 정약용은 조선에 만연하던 삼한정통론을 문헌고증학적 입장에서 부정했으며 《아방강역고》를 통해 백제의 첫 수도가 한성이었다는 것과 발해의 중심지가 백두산 동쪽이었다고 해명하여 역사지리를 새롭게 고증했다. 한치윤은 540여종의 중국과 일본 서적을 참고해 《해동역사》를 저술하여 대등한 입장에서의 동아시아적 역사 서술을 마련했다.[23]

서양에서는 19c 근대에 접어들면서 랑케를 중심으로 한 랑케 사학이 대두되었다. 랑케는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 오직 역사적 사실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 그 자체를 연구해야 했으므로 남아있는 기록인 '사료'에 대한 연구, 특히 해석이나 견해가 최소한으로 반영된 공적인 문헌사료가 랑케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공적 문헌사료에서 다루는 주제는 정치사, 외교사, 제도사 같은 것이었으므로 랑케 사학은 사료중심의 사실 파악에는 유용했으나, 역사적 의미에는 소홀하기 됐으며 사건과 정치를 암기하는 역사교육에 치중된다는 단점이 부각됐다.[24]

한편 관념론적인 입장에서 역사에 접근하고자 하는 학자들은 딜타이,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콜링우드(R. G. Collingwood)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역사 본질과 연구 방법이 자연과학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봤으므로 역사적 행위의 동기와 목적 등 사상과 사고방식에 초점을 뒀다. 딜타이는 정신과학에 맞게 '추체험'으로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역사가의 사유를 통해 현재에서 재구성되는 사실이라고 봤다. 콜링우드도 '모든 역사는 사상의 역사'라고 규정 지었는데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현재의 사상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25]

20세기에 들면서 서구사학계는 랑케사학에서 빠르게 탈피하며 신사학 혹은 현재주의 사학으로 불리는 사조로 넘어가게 됐다. 랑케 사학의 한계점이 분명했기에 이들 사조는 정치사에서 벗어나 사회•경제•문화 등 전체와 과정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의 신사학과 영국의 내미어 사학, 프랑스의 아날 사학, 독일의 사회구조사학이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사조는 사회구조를 파악하기 쉽고 전체 관점에서 민중사가 부각됐으며 자료활용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점은 좋았으나,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봤으므로 개인의 인간적 요소를 경시하고 사회 전체의 흐름에 따라 역사가 결정된다는 위험한 생각이 퍼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26]

한국 국내에서도 개화기를 맞이함에 따라 사학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 중 한 흐름은 '신사체'로, 교과서 편찬을 위한 것이었으며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서양식 역사서술체제에 맞춰 축약하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 역시 학부에서 소학교에서 쓸 최초의 근대적 국사교과서인 《조선역사》를 편찬했다(1895). 현채는 1906년 신사체로 쓰여진 중등용 교과서인《동국사략》을 저술했다. 동국사략은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근세사의 각 시대를 정치 제도 교법 문학•기예 산업 풍속 등 6개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그러나 개화파 역사가들은 일본의 왜곡된 《조선사》[27]의 서술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에 반발해 민족주의 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인 신채호는 각종 위인전을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사신론》을 통해 만주 중심의 역사를 강조했다.[28]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한국 최초로 최근세사를 다루었으며 민족정신인 '혼'을 관념사관을 제시하여 정신문화적 요소와 물질문화적 요소로 나누었다.[29]

5. 역사교육의 특성

역사 자체가 문학, 철학과 함께 인문학의 3대장인데 이런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특성이 더해져 사회과학도 포함한다. 역사의 문학성으로는 내러티브, 설명과 서술과 감정이입이 있고, 철학적 특성으로는 역사철학이 따로 있다. 그러므로 역사교육은 문학적 특성, 철학적 특성, 심리학과 사회학 및 교육학 등 사회과학적 특성까지 망라하고 있다.

역사를 교육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학자와 학파, 연구자에 따라 이론과 가설이 수도 없이 많다.

그 중 몇가지를 얘기하자면 관념론에 따라 이해를 해야 하는가, 실증론에 따라 설명을 해야 하는가로 나뉠 수 있다. 관념론에 따르면 추체험, 감정이입, 직관적 사고, 상상적 재연 등을 역사연구방법으로 쓸 수 있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상상을 중시하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상을 통해 가설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실증론에 따르면 역사 연구 방법은 기본적으로 과학적 방법과 같이 역사 현상에 일반법칙을 사용해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이 두 이론은 인간의 의도와 정신, 사건의 방식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즉, 인과와 관련되어 있다.

크게 보면 역사교육 이론에는 역사서술, 역사이해, 역사적 상상, 행위설명, 역사적 사고, 역사담론, 역사교사의 인지적 특성, 역사수업의 도구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서는 유럽에 한정해서 사회과학적 역사, 포스트모던 사학으로 구분 지을 수도 있다.

역사 분야로 보자면 전통적으로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로 나뉘는데 교과서들의 일반적인 구성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이렇게 가르칠 경우 진도에 따라 정치 사회사에 치중하게 되고 문화사가 소홀해질 경향이 높으므로 현대 역사교사들은 다양하게 융합해서 가르치는 것을 요구 받는다. 평가에서도 난도를 높이기 위해 시험 문제에 연대와 함께 정치사 문화사 요소를 한 문제에 섞어서 내는 경향이 증가하는 추세다.

역사교육은 인류 전체의 역사이므로 시대사와 지역사로 보면 엄청난 범위를 자랑한다. 요즘은 기존의 한국사와 세계사는 물론이고 교육과정 개정으로 동아시아사 등 지역사의 구분이 세분화 되고 있다. 기존 역사교육에 비판이 들어가 서구 중심의 역사교육에서 차츰 다원화된 나라들의 입장이 반영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설명식 수업과 암기식 교육에 가려져서 그렇지, 역사를 가르치는 방법과 교육도구는 다른 주요 교과와 비교해서도 무궁무진한 편이다. 현장 학습, 동영상 감상 및 제작, 역사 신문 만들기, 역사 인터뷰하기, 역사 일기 쓰기, 주제 토론과 토의, 보고서 쓰기, 보드게임 형식 등 역사교육론 교재에 소개된 것 뿐만 아니라 각 지방교육청 우수수업 사례와 교사가 머리를 굴리면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역사를 실감나고 가치있게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역사 소재를 다룬 영화와 예능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 미디어 공급이 원활한 것도 역사교육에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다수의 교사들이 진도의 압박 때문에 이런 이점을 잘 살리지 못하여 역사를 암기하는 과목으로 만들고 있다.

6. 역사교육과 이해관계

6.1. 역사교육과 국가

국가는 역사교육에서 진리만을 말하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따라 국내와 국외의 목적을 이루려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역사는 한 민족과 국가의 과정이자, 인간과 같이 희노애락이 겹쳐진 사건들의 총체이므로 대단히 민감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가 국가와 연결되면 역사의 내재적 가치보단 외재적 가치, 즉 위에서의 역사교육의 참된 목적이 아닌, 도구로서의 가치에 치중하게 되는 사례가 많다. 정치적으로 역사와 교육을 통해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라나는 세대에게 제도화된 역사교육내용을 통해 국가의 의도된 '공적 기억'을 심는다. 여기서 공적 기억이란 집단기억의 일부로, 집단구성원들이 정치적 편의에 따라 다 함께 알고 있어야 공적인 기억인 것이다. 이 공적기억이 아닌 감춰진 역사들(반기억(counter-memory) 또는 대항기억)에 의해 자신의 소신을 말하면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된다.[30]

예컨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는 제주 4.3 사건을 빨갱이들에 의한 폭동과 국군의 정의로운 진압 같이 왜곡된 정보로만 알고 있어야 했고, 4.3 사건의 유가족들이 진실(대항기억)을 입뻥긋하기라도 하면 당국에게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만이 비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수정, 감추기, 편집을 통한 역사왜곡과 이를 가르치는 '교육이라 부르기 어려운 교육'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했거나 존재 중이다. 중화민족론에 입각해 흑역사는 가르치지 않으며 소수민족 이탈을 방지하려고 자국의 최대 팽창 영토내의 모든 역사는 자신의 역사[31]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거나,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며 교과서에 다케시마라고 명기하고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진출로 포장하며 각종 전쟁 박물관에서 자신들이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라고 헛소리하는 일본 역사교육의 현실을 봐도 역사교육이 얼마나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오염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북아시아 3국의 정부가 각자 자기네 교과서에 자기 잘났다고 적어서 교육하는 것에 지친 3국의 뜻있는 학자들이 모여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아직 가시적이고 성공적으로 교육계에 실현되진 않고 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문제를 겪은 바, 역사적으로 깊은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공동으로 역사교과서를 집필해서 사용하고 있다.

6.2. 역사교육과 이익집단

6.3. 역사교육과 교과서

교과서는 그 자체가 정답이 아니라 많은 교재들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이는 역사교육 뿐만 아니라 모든 교과교육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유독 역사교육에서는 '교과서가 마치 바이블'인 것처럼 행세를 해왔다. 이를 '성전적 교과서관'이라고 하며 성전적 교과서관과 대비되는 개념이 '학습도구관'이다. 성전적 교과서관은 역사교육을 교과서 내용을 달달달달 외우면 되는 전형적인 암기 과목교육으로 만들어왔다. 학자들은 이러한 행태를 일명 '태정태세문단세식의 역사교육'이라는 표현을 쓴다. 역사 문서를 보거나 역사에 대한 기본 교양이 있다면 알겠지만 역사에서 객관적인 서술 • 정보란 없다. 역사는 기록이나 흔적을 통해 역사가가 재구성한 설득력 있는 하나의 해석이며 이를 교육적으로 모아놓은 역사교과서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역사교과서에는 수학이나 과학 교과 같은 객관적 내용을 넣을 수 없으며 교과서 저자의 관점과 내용 선별이 들어가므로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도 이를 고려하여 학습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로 여기고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까지의 성전적 교과서관에 입각한 한국 역사교육은 역사교과서를 장악하면 역사교육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했고 이는 사실이었다. 정부는 교육과정 문서에 단원마다 가르쳐야 하는 '학습요소'를 명시하고 있으며 교과서는 이를 충실히 이행하여 나온 결과물이므로 교사들은 교과서를 1차 자료로 활용할 수밖에 없고 따로 프린트물을 재구성한다고 해도 교과서 내용이 기반이 되는 구조다.

역대 정부는 교육과정에 따라 역사교과서에 검정 혹은 국정 교과서 체제를 부여해 국가중심의 역사교육을 확립했다. 해방 후 2차 교육과정(1963~1973)까지는 국정과 검정제를 병행했으며, 3차 교육과정(1974~1981)때부터 국정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2, 3차 교육과정의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박정희 집권기 때이다. 3차 교육과정에서 중고등학교 국사와 중학교 세계사 교과서는 국정이었고 고등학교 세계사는 검정이었지만 1종만 발행됐으므로 사실상 국정교과서였다. 국정교과서는 다양하지 못하므로 내용의 수준 저하와 학생들의 사고력 증진에 지장을 준다는 비판이 따르자 1978년에 국정과 검정제 도서를 각각 1종 2종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고 1종 도서는 '연구개발형 도서'라는 거창한 명목을 달았다. 현실적으로 1종 교과서는 국정교과서였고 그 이후로도 1종 2종 교과서 명칭이 이용되다가 7차 교육과정에 들어서야 국정과 검정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후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중고등학교 모든 역사교과서를 검정제로 간행하게 되어 교사들의 선택권에 자율이 늘어나게 되었다.[32]

2010년대가 되어 정부는 다시금 역사교과서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교학사 한국사 교과용도서 뉴라이트 논란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이다. 결과적으로 두 교과서 사태 모두 역사교육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간 것이었으며, 21세기에 역사교육을 북한처럼 하려고 한다는 비판과'국정교과서 쓰는 나라가 어떻게 우릴 비난하냐'[33]는 일본 학계와 일본 정부의 비웃음 속에 국제적인 망신만 당한 채 종결되었다.

7. 역사교육계

역사를 교육하는 곳은 중등교육 이하의 학교들과 대학교와 학원이므로 역사교육계의 대부분은 역사교사와 교수, 그 외 강사들과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예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교육계는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해 해박한 인물들인데다 거기에 더해 교육이라는 사명감까지 덧붙여지다보니 보통 사회 전반에서 도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크며 옳지 않은 점이 있으면 수업 중에도 해당 사안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성향은 비판적이고 정치적으로는 진보 쪽 인사가 많으며 우파 인사라고 해도 소수의 뉴라이트 계열이 아닌 이상 중도와 상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을 보여주는 일례가 위에서 언급한 박근혜 정부 측의 국정화로 인해 보수측 역사교육계 인사들조차 정도를 넘는 일에 개입하길 반대했으며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사실상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될 정도로 역사교육계는 당시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던 셈이다.
파일:external/img.khan.co.kr/2015101901002496400222194.jpg

이들 역사교육계 인사들의 야망(?)은 일단 역사가 사회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교육과정에서 다뤄지는 것으로, 사회과와 통틀어서 다뤄지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역사교육의 발전과정을 보면 사학계 • 역사교육계 Vs 사회과학계 • 사회과학이론에 동조하는 역사학자들과의 양상이 곧 역사교육학의 과정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치열하게 독립적인 위치를 구축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전공 서적에도 그런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화이트(John White)와 리(Peter Lee)의 학교교육에서의 역사의 목적에 대한 논쟁이라던지, 아직 학자였던 시절의 정현백 교수와 이인호 교수가 주장한 의견의 차이가 실려있다.[34]

그런데 역사교육계가 마냥 사학계와 친한 것만은 아니다. 한 대학교에 사학과역사교육과가 둘 다 있으면 이들의 신경전을 관찰할 수 있다. 교수들끼리는 물론이고 같은 역사 수업을 듣는 학부생들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문대학에 없어서는 안될 사학과에 비해 역사교육과는 사범대학이고 사범대학이 설치되어 있어도 역사교육과가 없는 학교도 많으므로 수가 극히 적기 때문에 역사교육과는 역사교육 분야에서 사학과가 점유한 교직을 빠르게 치고 올라오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학원 강사들의 경우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입시 학원가와 교사 임용을 준비하는 학원가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으며 스타 강사의 경우 대개 이미 교사를 겪어본 사람들이거나 적어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연락을 하는 교수들을 인맥으로 거느리는 대학가 출신들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이런 스타 강사들은 학계의 주요 인사들을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배, 동료로 모시고 있으면서 올해 시험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출제 경향), 누가 평가원에 문제를 내러 가서 어떤 곳에서 문제가 나올 것인지(출제 범위) 제법 확률 높게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21세기 미디어의 발달과 역사 컨텐츠에 대한 대중문화의 수요로 방송에 출연하는 역사학자, 교사, 강사가 많아졌다.

7.1. 국내 역사교육학자

8. 관련 문서


[1]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1판 20쇄 19~20쪽 참고[2] 최상훈 외,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책과 함께, 1판 9쇄 15~25쪽 참고[3] 학자들에 따라서 하단에 나올 역사의식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4]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1판 20쇄 34~35쪽 참고[5] 역사는 무엇인가[6]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7] 나는 어떠한 현실에 처해있는가[8] 조선시대와 지금의 차이[9] 자본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까[10] 빈부격차를 어떻게 역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가[11] 로마 제국신라가 같은 시기에 있었다[12] 순장을 한 것을 보니 고대인들은 사후세상을 믿었구나[13] 정약용은 유배를 간 동안 시간을 죽이기 싫었을 것이고 학문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대량으로 저술활동을 했을 것이다[14] 의자왕의 왕권강화와 활발한 정복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삼천궁녀 같은 소리가 나온 것은 의자왕이 패한 망국의 왕이어서다[15]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3판 12쇄 215쪽 참고[16]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3판 12쇄 377쪽 참고[17]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4판 36쇄 131~132쪽 참고[18]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4판 36쇄 245~246쪽 참고[19]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3판 12쇄 469쪽 참고[20] 줄여서 집사라고 부르기도 한다.[21] 두산백과 참고[22]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3판 12쇄 650~652쪽 참고[23]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제2전면개정판 6쇄 382, 385, 390,414쪽 참고[24]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1판 20쇄 55~56쪽 참고[25]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1판 20쇄 52쪽 참고[26] 정선영 외, <역사교육의 이해>, 삼지원, 1판 20쇄 56~57쪽 참고[27] 동경제국대학의 사학과 하야시 다이스케가 저술.[28]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제2전면개정판 6쇄 477쪽 참고[29]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4판 36쇄 461쪽 참고[30] 양호환 외, <역사교육의 이론>, 책과 함께, 1판 3쇄 58쪽 참고[31] 이를 역사영역론이라고 한다.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개정신판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쇄 27쪽 참고[32] 최상훈 외,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책과 함께, 1판 9쇄 134~139쪽 참고[33] 일본은 검정제 기반인 가운데 차츰 내용을 정부 위주로 바꾸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에 아예 국정제로 전환하려던 당시 박근혜 정부의 교과서 개편과 차이가 있었다.[34] 양호환 외, <역사교육의 이론>, 책과 함께, 1판 3쇄 33~34쪽 참고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