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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스 프로젝트의 제안자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Victor Mikhailovich Glushk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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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Обще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автоматизированная система учёта и обработки информации
자동화된 정보 처리 및 회계 네트워크 시스템
자동화된 정보 처리 및 회계 네트워크 시스템
오가스(ОГАС, OGAS)는 1962년 소련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글루시코프(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Глушко́в, Victor Mikhailovich Glushkov)가 계획했던 프로젝트로, 전국적 단위의 컴퓨터 네트워크 통신망을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행정망과 기업망 등을 모두 통합한 전자정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2. 상세
완성된 네트워크망을 이용하려는 목적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국적 네트워크 조성이라는 점에서는 1969년 미국 국방부의 국방 고등 연구 기획청(DARPA)에서 진행한 아파넷과 비슷한 입지의 프로젝트였다. 다만 군사적 이용/연구에 중점을 둔 아파넷과는 달리 오가스 시스템은 아파넷처럼 소련 전역의 데이터센터를 서로 연결하는 데이터링크 역할도 하였지만, 주된 목적은 소련의 계획경제 시스템의 보조였다. 즉, 컴퓨터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구상하려 했던 것.1950년대에 소련에서도 컴퓨터가 하나, 둘 주요 정부기관에 설치되기 시작했고, 초보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망도 만들어졌는데, 이 네트워크망은 주로 군사행정 용도로 쓰여졌다. 소련의 과학자 아나톨리 키토프는 이러한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경제운용에도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전국의 네트워크화를 통한 진보한 계획경제 사회를 목표로 앞서 1959년에 구상했던 기획안인 ЕГСВЦ(Единой централизованной автоматизированной системы управления народным хозяйством страны, 국가경제관리용 중앙통제식 통합자동화 시스템)를 내놓았고, 이것이 오가스의 프로토타입에 해당되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키토프의 계획안은 실행은커녕 입안 단계에서 사장되었는데, 이 계획안을 글루시코프가 개선한 것이 바로 오가스 시스템이다.
글루시코프가 제안한 오가스는 세 겹의 계층으로 구성된 네트워크들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컴퓨터 센터, 소련 전역에 있는 주요 도시에 위치한 약 200개의 중급 센터,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에 배치할 2만 개에 달하는 지역 터미널과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선 네트워크를 통합해서 서로 실시간으로 통신이 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컨셉이었다. 나아가 글루시코프는 이 오가스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용한 전자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현물 화폐 없이 돌아가는 무현금 경제를 구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1980년대 이후에나 실현이 가능해졌고, 2000년대가 넘어서도 기술 선진국에서나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960년대라는 시점에서 기계에 의한 자동화 경제체계라는 것은 너무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계획이었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설득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련은 1965년까지도 장거리 직통전화가 없었고, 시외전화보다 전보를 보내는 횟수가 더 많았으며[1], 이제 막 전화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였다.[2] 당시 소련은 상용화된[3] 전자공학 기술이 뒤떨어져있었기도 했고, 근본적으로 이 당시에는 컴퓨터와 컴퓨터를 활용한 통신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미국의 슈퍼컴퓨터로도 동영상 하나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했었고,[4] 아파넷 같은 컴퓨터 통신망을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속도가 위낙에 느려서 사진 한 장 보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이런 수준의 통신망을 설치해서 기본적인 전산화나 현황 파악 정도를 한다면 모를까 경제 자체를 통제하기에는 성능이 너무 후달렸다.
또한 이 계획은 기존 공산당 정치가들[5], 특히 공산당 재무부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오가스 시스템을 완전히 구현하는 데에는 200억 루블의 예산과 30만 명의 인력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오가스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찬성하는 쪽도 있었지만, 제작에 대한 자금 지원안은 취소 수준으로 대부분 기각됐다. 결국 시스템 전체는커녕 국지적인 일부를 제작할 정도의 적은 자금밖에 지원받지 못했고, 실제로 오가스는 제작되지 않은 채 무산되고 만다. 사회가 불확실한 미래의 가치보다는 현재의 비용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기도 했다. 신기술이 적용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각종 문제점이 드러나면 이를 해결하느라 개발 비용이 원래 예상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데, 하물며 이렇게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신기술들이 잔뜩 적용되어 이미 계획 단계에서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고 예측된 물건이라면 그야말로 끝없이 비용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도의 프로젝트는 국가의 명운이 여기에 걸려 있다는 확신 정도가 없다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어렵다.
오가스 제작은 무산되었지만 제안자인 글루시코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가스를 계속 개선시킨 EGSVT, SOFE를 비롯한 네트워크 계획을 시도하였으며, 당의 지원을 받기 위해 오가스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소련의 완전 무인화 지구 최후의 날 기계인 ‘죽음의 손’(Dead hand)을 만드는데 기술적인 조력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컴퓨터 통신망의 확장안 자체는 동의받아서, 1978년부터 아카데미넷이라는 명칭으로 소련 각 연구기관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개설되었고, 이외에도 행정용으로 여러 통신망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기존 오가스 계획보다는 훨씬 축소된 규모였고, 글루시코프는 1982년에 사망한다. 글루시코프가 사망할 무렵에는 소련에서 미국에서 Apple과 IBM이 민간용으로 판매되어 업무용으로 쓰이는 것에 자극받아 민수용 개인용 컴퓨터가 판매되기 시작했지만, 이들 개인용 컴퓨터는 주로 업무용, 교육용 정도로 썼었고, 그나마도 보급이 원할하지 못한데다가, 상술한 네트워크망은 행정, 학술용으로 제한적으로 썼던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서 소련이 망할 때까지 민간인들도 쓸 수 있는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갖추지 못했다. 물론 이 당시에는 미니텔이 어느 정도 보급된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사정이 비슷했다.
동시기, 혹은 약간 후대에 계획된 다른 네트워크 프로젝트들[6]은 현실적인 기술을 이용한 소소한 목표를 잡았고, 이것들이 기반이 되어 현대의 인터넷으로 이어져 2010년대가 되어서야 1960년대 오가스의 설계사상을 최첨단 기업들이나 전자정부가 차기 미래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당시 현실 기준으로 너무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잡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렇지만 스푸트니크, 소유즈 등의 우주 개발 프로젝트, MD 체계 등의 거대 기술계획은 실행에 성공한 사례를 보면 기술 수준의 문제도 있지만 개발 측에서 소련의 인민과 정치가들에게 이 시스템의 필요성을 알리는데도 소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가스는 시대를 초월한 발상이나 기술도 오피니언 리더나 사회 구성원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투자를 받지 못한 채로 무의미하게 떠내려가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만 칠레에서는 아옌데가 오가스 계획을 받아들여서 사이버신 계획을 세웠고, 실제 칠레 전역에 컴퓨터 통신망을 깔면서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다. 다만 통신속도가 현져히 느리고 컴퓨터 용량도 작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에서 볼때는 초보적인 시스템이었고 실험도 몇년 못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 실현까지는 아니고 행정 전산화 정도의 의미가 있는 수준이다.
참고: 키베르(사이버) 사회주의
[1] 참고로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 시외통화 횟수가 전보를 앞질렀다고 한다.[2] 1960년대 초반의 소련에서는 아직 전화기가 기업이나 행정기관 같은 데서나 소유하는 업무용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1960년대에 가정용 전화를 설치했을 때 사람들이 전화기를 집에서 쓸 수 있다는것에 대해 생소하게 여겨서 반강제로 설치했다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3] 이론적인 면에서는 소련 또한 서방 세계에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안드레이 콜모고로프와 같은 수학자는 서방 세계와는 별개로 당시로서는 미개척지였던 정보 이론의 최첨단을 탐구하여 여러 중요한 성과들을 남겼는데, 이 성과들이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잘 생각해보면, 미국보다 앞서서 국가적 규모의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한 이 계획의 존재 자체가 당대 소련의 관련 이론 수준이 서방 세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4] 소련 최초의 CPU인 옐브루스 프로세서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1980년대에도 옐브루스 프로세서는 대부분 국방이나 우주개발에 사용되고 일반 소련 국민들은 미제 인텔 8086을 복제 생산해서 겨우 쓰고 있었다.[5] 이들은 이런 계획을 “전자적 파시즘”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인간 대신 컴퓨터 시스템이 사회적 자원 배분에 관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자신들의 권력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정치의 본질이 ‘자원의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임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6] 아파넷, 미니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