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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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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8월 1일 선조에 의해 책록
추충분의병기협책평난공신 (1등)
박충간 이축 한응인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 (2등)
김귀영1 남절 류전 민인백
유홍 이산해 이수 이준
정철2 조구 한준 홍성민
추충분의평남공신 (3등)
강신 김명원 이정립 이증
이항복 이헌국 최황
1 1593년 임해군, 순화군을 보호하지 못한 혐의로 인한 제명, 1664년 현종 때 복권
2 1594년 탄핵으로 인한 제명, 1624년 인조 때 복권, 1691년 정무서 등의 상소로 인한 제명, 1694년 숙종 때 복권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호성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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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 6월 25일 선조에 의해 책록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공신 (1등)
이항복 정곤수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
구성 김응남 류근 류성룡
류영경1 박동량2 박숭원 신잡
심대 심우승 심충겸 안황
윤근수 윤두수 윤자신 이경검3
이경온 이광정 이괵 이기
이부 이산부 이원익 이유징
이충원 이호민 이후 정희번
최흥원 한연 홍진
충근정량호성공신 (3등)
강인 경종지 고희 기효복
김계한 김기문 김봉 김새신
김수원 김양보 김예정 김응수
김응창4 김준영 류조생 류희림
민희건 박몽주 박춘성 박충경
백응범 송강 신대용 신응서
안언봉 양순민 양자검 여정방
오연 오치운 이공기 이사공
이수곤 이연록 이유중 이응순
이춘국 이헌국 이희령 임발영
임우 전용 정대길 정탁
정한기 조귀수 최빈 최세준
최언순 최윤영 최응숙 허준
홍택
1 1608년 탄핵으로 인한 제명, 1623년 인조 때 복권
2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고도 시인한 혐의로 인한 제명, 1635년 인조 때 복권
3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혐의로 인한 제명
4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제명
}}}}}}}}}
<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조선 영의정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이항복
李恒福
<nopad> 파일:이항복 초상화.jpg이항복 호성공신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1]
출생 1556년 11월 26일[2]
(음력 명종 11년 10월 15일)
경기 포천현
(現 경기도 포천시)
사망 1618년 7월 4일 (향년 61세)
(음력 광해군 10년 5월 13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現 함경남도 북청군)
재임기간 제89대 영의정
1600년 7월 26일 ~ 1602년 3월 24일
(음력 선조 33년 6월 17일 ~ 선조 35년 2월 1일)
제91대 영의정
1604년 5월 16일 ~ 6월 13일
(음력 선조 37년 4월 18일 ~ 5월 16일)
묘소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봉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본관 경주 이씨
자상(子常)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靑華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붕당 서인
부모 부친 - 이몽량(李夢亮, 1499 ~ 1564)
모친 - 전주 최씨 최륜(崔崙)의 딸
부인 초취(初娶) 안동 권씨 - 권율의 딸
재취(再娶) 나주 오씨 - 오언후의 딸
자녀 장남 - 이성남(李星男)[3]
차남 - 이정남(李井男)[4]
장녀 - 윤인옥의 처
3남(서자) - 이규남(李奎男) 측실 오씨 소생
4남(서자) - 이기남(李箕男) 측실 오씨 소생
차녀(서녀) - 안동 권씨 권칙(權侙)[5]의 처 측실 오씨 소생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학자. 흔히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조선 최고의 개그 콤비이자 아랫쪽 해학의 시조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오성(鰲城)'은 실제로 이덕형의 인 한음(漢陰)과 달리 이항복의 호가 아니라 이항복이 임진왜란호성공신 1등으로 녹훈되면서 받은 봉호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6]에서 온 것이다. 실제로 이항복이 사용한 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사(白沙)이며, 젊은 시절에는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고, 그 외에는 청화진인(靑華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등의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자 권철[7]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며, 처갓집 노비였던 정충신을 발굴하고 가르쳐 임진왜란 등 국난을 극복해냈고, 정충신을 무과에 급제토록 공부시켜 자신의 사후에도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하는 등 조선의 종묘 사직을 지켰다. 이항복은 인간의 출신보다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을 볼 줄 아는 인간적 깊이도 가진 인물이었다.

2. 생애

이항복은 명종 때 의정부 우참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아버지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이 58세 때 본 늦둥이 막내이다. 태어났을 때는 몸이 매우 약해서 집안의 근심거리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최씨 부인도 몸이 약해서 젖이 없어 큰 누이가 젖을 물렸다고 할 정도다. 이항복이 아주 어린 시절 유모가 우물 근처에 아이를 놓아두고는 졸고 있었는데 그 사이 아이가 우물로 기어가 빠질 위험에 처하자 웬 노인이 꿈에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아이를 돌보지 않느냐고 꾸짖는 바람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이항복을 구했는데, 그 노인이 바로 이항복의 방계 조상이자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대유학자 익재(益齋) 이제현이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8] 또한 이항복이 9세 때 부친이 사망해서 집안이 크게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몽량이 형조 판서와 우참찬 등 고위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권세와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 어린 시절에는 민담에서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말썽꾸러기로 백사집에서 이항복 본인이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마치 짐승과 같아서 아무도 나를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지경. 아버지에 이어 16세 때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는데, 상을 치르고는 철이 들어 성균관에 청강생 신분으로 들어가 과거 급제에 성공했을 만큼 열심히 학업에 정진했다고 한다.

권율의 사위이기도 하다.[9] 어릴 적 그의 재능을 알아본 옆집에 살던 권율의 아버지 권철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19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 권철의 나이 72세, 권율의 나이 38세였다. 위인전에서 이항복 집에서 기르던 감나무의 감을 따먹으려 하는데 옆집이던 권철 집으로 가지가 넘어가 감이 열리자 권철의 하인들이 저 감은 우리 집으로 넘어왔으니 못 먹는다며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이항복이 당돌하게도 권철의 방에 주먹으로 구멍을 내 "대감, 이 팔이 누구의 팔이옵니까?" 하며 따진 일화가 언급된다.

한음 이덕형과는 과거 시험장[10]에서 처음 만나 바로 친해졌다.[11] 1580년(경진년) 이항복은 알성시[12]에, 이덕형과 이정립(李廷立)[13]은 별시[14]에 합격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 3명을 가리켜 경진삼이(庚辰三李)라고 하였다. 이후 이덕형과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고 짓궂은 장난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오성과 한음 일화를 만들었다. 둘은 나이 들어서도 이런저런 장난질을 하고 다녀 부인들이 꽤 고생한 적이 있다. 이덕형과는 5살 차로, 이덕형이 오성에게 보낸 편지에 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와는 달리 유달리 찌질거린 걸 보면 망년지교 그 자체에 해당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장유유서 때문에 오히려 친형제간에는 그렇게까지 허울없이 지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벼슬길에 올라서도 워낙 조크를 즐겨서 붙은 별명이 '농담 정승'. 실록에서 그에 대해 대놓고 '해학이 지나쳤다'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다.[15] 그렇다고 이분이 벼슬자리에서 장난질 혹은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코믹 에피소드만 남겼다고 생각하면 오산. 농담 따먹기 이상으로 관리 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수완을 발휘한 명신(名臣)이기도 했다. 그리 멀리 갈 거 없이 해학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영의정까지 올라갔으니 실력이 좋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리고 저 '해학이 지나쳤다'라는 표현은 이항복 본인이 직접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저 표현은 선조실록에만 등장하는데, 광해군 시절 이 선조실록 편찬을 총감독하는 실록청 총재관이 바로 이항복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피난간 선조를 호종했으며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을 청원할 때 보낸 사신이 바로 그다. 그리고 명나라에 파견되어 지원군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전란 중에 군무를 관장하는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하며 국방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왜란 당시엔 가족들에게 재앙이 연속해서 발생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이항복의 큰 형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사고로 물에 빠져 익사해 3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장례를 치렀고, 조카 부부도 각각 산고와 도적 떼로 인해 숨졌다. 이항복 본인의 딸도 어린 나이에 병으로 위독할 때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세 번 말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600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1602년 사직했고, 1604년 영의정으로 재임명되었지만 한 달을 채우지 않고 도로 사직했다. 그 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름을 받고 좌의정으로 출사하였다 임해군 옥사 사건이 일어나자 만약 임해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자신이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히 진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친구 이덕형과 함께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해군이 신원되는 것을 볼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

1617년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북파의 모함을 받아 실각, 60세가 넘은 고령에 중풍까지 앓고 있던 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함경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를 떠난 뒤 혹독한 추위에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5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친구 이덕형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삭탈 관직 당한 후 고향집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보면 참 애석하기도 하다.[16] 북청으로 유배 갈 때 지은 시조가 유명하다.[17]
철령(鐵嶺) 노픈 재예
자고 가는 뎌 구름아
고신(孤臣)[18] 원루(寃淚)을
비 삼아 띄여다가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의
쁘려본들 엇더하리
출전: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19]
사망 후 고향인 포천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항복의 묘는 현재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3. 여담

4. 대중매체



[1] 18세기에 제작된 후모본이다.[2] 율리우스력 11월 16일[3] 영조 때 영의정 이광좌의 증조부. 순조 때 좌의정 이경일의 5대조.[4] 영조 때 좌의정 이태좌의 증조부. 영조 때 영의정 이종성의 고조부. 고종 때 영의정 이유원의 8대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9대조.[5] 성종의 왕자 영산군의 서외고손자[6] 오성은 본관인 경주의 별칭이다.[7] 권율의 부친이자 인종 시대의 권신. 사실 권철 생전에는 막내아들 권율이 과거시험을 본 적도 없는 사실상의 백수라 권율이 활약하는 것을 본 일이 없고 오히려 권철의 골칫거리였다. 권율은 부친이 사망하고 4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과거시험(권율은 장군 이미지와 다르게 원래 문신이다)에 합격하고 50대에 임진왜란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던 대기만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25살에 합격한 사위 이항복보다 벼슬도 훨씬 늦게 했다.[8] 이항복은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이핵(李翮)의 3남 검교정승 이세기(李世基)의 3남 상서공 이과(李薖; 상서공파 파조)의 8대손이고, 이제현(李齊賢; 익재공파 파조)은 이핵의 차남 검교정승 이진(李瑱)의 차남이다. 즉 이제현은 이항복의 8대조 이과와 사촌지간이다.[9] 신립과 정충신도 권율의 사위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야사의 오류다. 공식적으로 권율의 정실 소생 자녀는 이항복의 부인 한 명이고 아들조차 없었다.(친형의 아들인 친조카를 양아들로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신립의 정실 부인은 이씨와 최씨이며 정충신의 정실 부인은 양씨다. 즉 권씨는 없다.[10] 한음문고에 따르면 1578년이라고 한다.[11] 세간에는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장성해서 만났는데 친우가 된 것이다.[12] 경진(庚辰) 2월 25일 알성방(謁聖榜).[13] 이덕형과 같은 광주 이씨(廣州 李氏)이다. 이정립은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장남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의 5대손이고, 이덕형은 이인손의 4남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5대손이다.[14] 경진(庚辰) 3월 18일 별시방(別試榜). 인순왕후(仁順王后)를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한 일을 기념한 시험.[1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죄민수로 패러디했다.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실록의 이 표현을 "그 대감 진짜 웃겨"라는 말로 풀었다.[16] 귀양이라고 다 똑같은 귀양이 아니다. 한양에서 먼 귀양일수록 무거운 처벌인데 과천, 수원 정도로 귀양을 보내는 건 가벼운 벌이고 제일 심한 귀양은 함경도 추운 고장으로 보내는 귀양으로 이건 얼어 죽으라고 보내는 귀양이다. 한양에서 멀리 보내도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보내면 살만한 편으로 귀양을 어디로 보내는가를 보면 조정 분위기를 알 수가 있다. 또 한 가지는 절도, 그러니까 섬으로 보내는 귀양으로, 이건 죽일 생각은 없는데 한양하고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고 싶을 때 보내는 것이다. 어쨌든 이항복 귀양지는 함경도 이곳 저곳으로 바뀌다가 마지막에 북청도호부로 정해지는데, 이항복의 건강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북청에 가서 얼어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이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해주었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증오하게 되고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17] 1618년(광해 10) 1월 18일 철령(鐵嶺)을 오르며 지은 노래(歌)이다.[18] 이항복 본인을 지칭함.[19] 원문의 옛한글을 최대한 그대로 옮겼으나 입력의 한계로 다소 차이가 있음. 한문으로 된 곳은 괄호 안에 한문을 표기함.[20] 근데 막상 처가는 동인쪽 집안이다. 장인어른 권율이야 관직에 늦게 오르고 핵심적인 공무원 생활을 죄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시기에만 활동하여 동인서인 둘 다 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 조상대로 가면 동인 쪽으로 보아야 한다. 그 후손들은 동인 중에서도 남인이 되었다.[21] 근데 막상 이덕형의 처가는 완벽한 북인이다. 이덕형의 장인은 북인 중에서도 시조이자 대지도자인 영의정 이산해 정승이다. 이산해는 정철 문제로 류성룡과 완전히 갈라서서 거의 철천지원수가 되며 북인의 영원한 시조가 사람이다.[22] 이항복, 이광좌, 이종성, 이유원.[23] 이태좌, 이경일.[24]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을 가리킴.[25] 사실 이 이야기의 원조는 영조 대의 인물 장난 대감 이문원이다. 이문원의 일화에서는 한층 악랄하게 혹은 좁쌀을 세라는 것으로 나온다. 그냥 '옛날 옛날 어느 댁 도령이...'라거나 옛날이야기에 흔히 나올 법한 아무 이름을 넣은 이야기도 있다. 어떤 버전이든 간에 이 이야기의 핵심 전개는 '꾀돌이 도령이 한 되만 세어 놓고 곱하기로 어림을 잡아서 회초리를 면했다'는 것이라 그 부분은 동일하다. 위기철의 논리 시리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벼루를 깬 벌로 콩을 세라는 벌을 받았고, 결말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이놈 머리를 좀 썼구나, 허나 그것은 대충 맞다고는 해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예 아버지, 아마 오백 개쯤은 틀렸을 것입니다."-"그럼 백 개에 한 대씩 해서 종아리 다섯 대만 맞으면 용서해주마"라고 해서 다섯 대만 맞고 끝이 난다.[26] 밤만 되면 나타나는 천체인 만큼 당연히 고대인들도 은하수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허셜이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를 천문학적으로 해석하려 한 시도이며,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 외우주 관련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27]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상투를 잡아당겼다는 것으로 순화되기도 한다.[28] 이때 우의정 이덕형이 좌의정이 되었고, 이항복이 이덕형의 우의정 자리를 이어받았다.[29] 어린이용 이야기책에서는 이야기를 순화해서 '이항복이 윗옷을 벗어서 맨몸을 보여줬다'로 표현하기도 한다.[30] 당시에는 여성이 배꼽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젖먹이 아이가 있으면 밖에서도 젖을 먹이려 가슴을 불쑥 꺼내기도 했지만 배꼽은 아니었다고 한다.[31] 무슨 뜻인고 하니 선조는 별 생각없이 오동나무 열매의 동그스름함을 형용하였으나 우연찮게도 거기에 사용된 형용사 '동실하다'의 어근은 오동나무 열매를 한자로 쓴 동실(桐實)과 발음이 같았다. 이항복이 이를 포착하고 보리 뿌리를 거론한 뒤 그 반드러움을 형용함에 그 어근이 보리 뿌리를 한자로 쓴 맥근(麥根)과 발음이 같은 '매끈하다'을 사용함으로써 우연스레 만들어진 선조의 언어 유희와 동종인 언어 유희를 제시한 것이다. 선조가 이를 눈치채고 크게 웃은 것. 정조와 윤행임도 이런 설화가 전해온다.[32] 신립이 임진왜란 초반에 왜군을 막고자 남하한 뒤 조령에 진을 치려 할 때 여인의 혼령이 나타나 탄금대에 진을 치라고 했다고 한다. 신립은 여인이 자신을 괴물로부터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 생각하여 여인의 말을 믿고 탄금대에 진을 쳤고 결과는 깔끔한 패배+신립의 전사. 여인은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간 복수를 한 것이다. 이 설화는 당대 최고의 명장 신립이 누가 봐도 패배가 뻔한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원혼에 홀려 그랬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합리화로 만들어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고 본문의 이항복 설화는 이 설화와 만나 전해지는 야사인 듯 하다.[33] 홍진의 초상화는 지금도 전해지는데 코 위치에 징그러울 정도로 큰 혹이 있다. 현대 의학적으로 해석하면 '비류'라고 하는 병으로 병이 생기면 코가 뻘겋게 부어올라 흔히 딸기코종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초상화를 그릴 때도 홍진의 병은 심각하게 진행이 된 상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2년 뒤 홍진이 사퇴를 청하면서 밝히기를 병이 뿌리째 깊어 백약이 무효하다고 밝히고 있다. 사관 또한 홍진이 병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런 것치고는 80에 가깝게 장수했다. 재밌는건 화공의 말대로 홍진의 혹 부분에 붉은 색이 아예 없이 그려져 있다.[34] 이항복으로부터 먼 시간대인 숙종 시기 김석주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무릇 역적은 물고기나 자라처럼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항복이 한 말과 같은 바가 있다고 나온다.[35] 일화에 따라서는 누워 있는 선조에게 절을 했다고도 하나 예법상 누운 사람에게는 절대 절을 하지 않는다. 누운 사람에게 절하는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조문하는 경우뿐이기 때문. 만일 그랬다면 절하자마자 선조가 잔뜩 분노해서는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사대부인 이항복이 누운 사람에게 절하지 않는 예법을 몰랐을리 없다.[36] 즉 절을 2번 하긴 했으나 2번의 의미가 각각 다르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 어쨌든 죽은 사람으로 하는 절 2번은 같은 의미로 할 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7] 우는 닭은 수탉뿐이다.[38]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환관의 수염으로 순화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환관의 특징 중 하나를 적절하게 고른 것인데 환관의 양물은 잘렸으니 당연히 양물의 영향으로 자라야 할 수염도 없다.[39] 뭐가 웃긴지 이해가 안간다면 환관에게 머리채를 잡힌 스님과 스님에게 그 곳(혹은 수염)을 잡힌 환관을 생각해보면 된다. 스님은 삭발해서 머리가 없고 환관은 거세해서 양물(수염)이 없다.[40]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박상충을 연기했는데 이 배역도 개그 캐릭터면서도 불의를 용납 안하는 성격이라 이항복과 유사하다. 그런 면에서 <화정>의 캐스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41] 정확히는 먼저 왔던 퇴마사가 귀신을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면서 목덜미에 점이 있는 남자만이 귀신을 물리칠 거라고 둘러댔다. 그후 때마침 지나가던 이항복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기에 휘말려든 것.[42]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던지라 성급히 약을 지어서 뛰어가던 도중 술에 취한 김여울의 할아버지와 충돌했다. 술에 취했던 김여울의 할아버지는 홧김에 이 남자를 때려죽여 시신을 유기, 결국 아들은 약도 쓰지 못한 채 죽었고 아내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