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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이항복 호성공신상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1] | |
출생 | 1556년 11월 26일[2] (음력 명종 11년 10월 15일) |
경기 포천현 (現 경기도 포천시) | |
사망 | 1618년 7월 4일 (향년 61세) (음력 광해군 10년 5월 13일) |
함경도 북청도호부 (現 함경남도 북청군) | |
재임기간 | 제89대 영의정 |
1600년 7월 26일 ~ 1602년 3월 24일 (음력 선조 33년 6월 17일 ~ 선조 35년 2월 1일) | |
제91대 영의정 | |
1604년 5월 16일 ~ 6월 13일 (음력 선조 37년 4월 18일 ~ 5월 16일) |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
봉호 |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경주 이씨 |
자 | 자상(子常) |
호 |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靑華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
붕당 | 서인 |
부모 | 부친 - 이몽량(李夢亮, 1499 ~ 1564) 모친 - 전주 최씨 최륜(崔崙)의 딸 |
부인 | 초취(初娶) 안동 권씨 - 권율의 딸 재취(再娶) 나주 오씨 - 오언후의 딸 |
자녀 | 장남 - 이성남(李星男)[3] 차남 - 이정남(李井男)[4] 장녀 - 윤인옥의 처 3남(서자) - 이규남(李奎男) 측실 오씨 소생 4남(서자) - 이기남(李箕男) 측실 오씨 소생 차녀(서녀) - 안동 권씨 권칙(權侙)[5]의 처 측실 오씨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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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학자. 흔히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조선 최고의 개그 콤비이자 아랫쪽 해학의 시조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오성(鰲城)'은 실제로 이덕형의 호인 한음(漢陰)과 달리 이항복의 호가 아니라 이항복이 임진왜란 후 호성공신 1등으로 녹훈되면서 받은 봉호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6]에서 온 것이다. 실제로 이항복이 사용한 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사(白沙)이며, 젊은 시절에는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고, 그 외에는 청화진인(靑華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등의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또한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자 권철[7]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며, 처갓집 노비였던 정충신을 발굴하고 가르쳐 임진왜란 등 국난을 극복해냈고, 정충신을 무과에 급제토록 공부시켜 자신의 사후에도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하는 등 조선의 종묘 사직을 지켰다. 이항복은 인간의 출신보다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을 볼 줄 아는 인간적 깊이도 가진 인물이었다.
2. 생애
이항복은 명종 때 의정부 우참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아버지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이 58세 때 본 늦둥이 막내이다. 태어났을 때는 몸이 매우 약해서 집안의 근심거리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최씨 부인도 몸이 약해서 젖이 없어 큰 누이가 젖을 물렸다고 할 정도다. 이항복이 아주 어린 시절 유모가 우물 근처에 아이를 놓아두고는 졸고 있었는데 그 사이 아이가 우물로 기어가 빠질 위험에 처하자 웬 노인이 꿈에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아이를 돌보지 않느냐고 꾸짖는 바람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이항복을 구했는데, 그 노인이 바로 이항복의 방계 조상이자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대유학자 익재(益齋) 이제현이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8] 또한 이항복이 9세 때 부친이 사망해서 집안이 크게 기울어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몽량이 형조 판서와 우참찬 등 고위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권세와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 어린 시절에는 민담에서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말썽꾸러기로 백사집에서 이항복 본인이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마치 짐승과 같아서 아무도 나를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지경. 아버지에 이어 16세 때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는데, 상을 치르고는 철이 들어 성균관에 청강생 신분으로 들어가 과거 급제에 성공했을 만큼 열심히 학업에 정진했다고 한다.권율의 사위이기도 하다.[9] 어릴 적 그의 재능을 알아본 옆집에 살던 권율의 아버지 권철이 그를 손녀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19세에 권율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 권철의 나이 72세, 권율의 나이 38세였다. 위인전에서 이항복 집에서 기르던 감나무의 감을 따먹으려 하는데 옆집이던 권철 집으로 가지가 넘어가 감이 열리자 권철의 하인들이 저 감은 우리 집으로 넘어왔으니 못 먹는다며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이항복이 당돌하게도 권철의 방에 주먹으로 구멍을 내 "대감, 이 팔이 누구의 팔이옵니까?" 하며 따진 일화가 언급된다.
한음 이덕형과는 과거 시험장[10]에서 처음 만나 바로 친해졌다.[11] 1580년(경진년) 이항복은 알성시[12]에, 이덕형과 이정립(李廷立)[13]은 별시[14]에 합격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 3명을 가리켜 경진삼이(庚辰三李)라고 하였다. 이후 이덕형과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고 짓궂은 장난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오성과 한음 일화를 만들었다. 둘은 나이 들어서도 이런저런 장난질을 하고 다녀 부인들이 꽤 고생한 적이 있다. 이덕형과는 5살 차로, 이덕형이 오성에게 보낸 편지에 형이라고 부르며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와는 달리 유달리 찌질거린 걸 보면 망년지교 그 자체에 해당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장유유서 때문에 오히려 친형제간에는 그렇게까지 허울없이 지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벼슬길에 올라서도 워낙 조크를 즐겨서 붙은 별명이 '농담 정승'. 실록에서 그에 대해 대놓고 '해학이 지나쳤다'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다.[15] 그렇다고 이분이 벼슬자리에서 장난질 혹은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코믹 에피소드만 남겼다고 생각하면 오산. 농담 따먹기 이상으로 관리 생활을 하면서 훌륭한 수완을 발휘한 명신(名臣)이기도 했다. 그리 멀리 갈 거 없이 해학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영의정까지 올라갔으니 실력이 좋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리고 저 '해학이 지나쳤다'라는 표현은 이항복 본인이 직접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저 표현은 선조실록에만 등장하는데, 광해군 시절 이 선조실록 편찬을 총감독하는 실록청 총재관이 바로 이항복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피난간 선조를 호종했으며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을 청원할 때 보낸 사신이 바로 그다. 그리고 명나라에 파견되어 지원군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전란 중에 군무를 관장하는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하며 국방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왜란 당시엔 가족들에게 재앙이 연속해서 발생해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이항복의 큰 형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사고로 물에 빠져 익사해 3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장례를 치렀고, 조카 부부도 각각 산고와 도적 떼로 인해 숨졌다. 이항복 본인의 딸도 어린 나이에 병으로 위독할 때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세 번 말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600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1602년 사직했고, 1604년 영의정으로 재임명되었지만 한 달을 채우지 않고 도로 사직했다. 그 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름을 받고 좌의정으로 출사하였다 임해군 옥사 사건이 일어나자 만약 임해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자신이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히 진압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친구 이덕형과 함께 임해군을 살려주자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해군이 신원되는 것을 볼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
1617년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북파의 모함을 받아 실각, 60세가 넘은 고령에 중풍까지 앓고 있던 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함경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를 떠난 뒤 혹독한 추위에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5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친구 이덕형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삭탈 관직 당한 후 고향집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보면 참 애석하기도 하다.[16] 북청으로 유배 갈 때 지은 시조가 유명하다.[17]
사망 후 고향인 포천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항복의 묘는 현재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3. 여담
- 평소 당색이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정여립의 난에 위관으로 송강 정철과 참여해 욕을 먹었고 그래도 정철에 비해서 사건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다는 평을 받는다. 사실 당색을 굳이 따지라면 서인 쪽에 가까웠던 편.[20] 실제로 이항복의 제자 중에 서인으로 조정의 대신이 된 인물들이 많았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는 이항복과 친밀했고 야사에는 이항복의 조언으로 훗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정충신도 이항복의 제자이기도 했고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중추로 유명한 지천 최명길, 이귀의 아들이자 그 역시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시백 역시 그의 문하였다. 또한 그의 자손들인 영의정 이광좌, 좌의정 이태좌, 영의정 이종성, 좌의정 이경일도 서인에서 분파된 소론에 속했다. 한편 그의 절친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도 근본적으로는 무당파적 인물이었으나, 굳이 당색을 따지면 이항복과 반대인 동인, 그것도 약간 남인 쪽[21]에 가까웠다.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과도 친했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지금 조정의 대신들 중 말솜씨 좋고 능력있으며 경우가 바르기로는 서애 대감만한 분이 없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도 높이 평가했으니 서인이라서 혹은 장인이라서 권율의 공신 책봉에 관여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주장이다. 이는 주로 정기룡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 저서로는 <백사집>이 있는데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저서다. 장인인 권율은 이항복과 결혼한 외동딸 외에는 자식이 없어서 후손들이 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지 못해 관련 기록이 많지 않다. 대신 절친한 사이였던 사위 이항복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겨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사집>과 다른 민담을 보면 권율과 이항복의 관계는 사극 시트콤을 찍어도 될 정도로 유쾌한 이야기들이 많다.
- 이항복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상서공파에서 분적된 백사공파는 인구 순으로는 작지만 벼슬 열력으로는 경주 이씨의 최정점에 섰던 가계를 일궜다.)의 파시조로서 백사공파에서 그를 포함 영의정 4명[22], 좌의정 2명[23] 등 상신(相臣)[24]이 6명이나 나왔다. 또한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승의 장남 이건영, 차남 이석영, 3남 이철영, 4남 우당 이회영, 5남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7남 이호영 등 6형제는 조선 최고 명문가 자제들이었음에도 가산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안타깝게도 광복 후 다시 이 땅을 밟은 이는 이시영뿐이었다.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과 국회의원 이종걸은 이항복의 12대손으로 이회영의 손자들이다. 한편 이항복의 후손 중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있다.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외부·법부대신을 지낸 이하영은 을사오적에 버금간다고 하여 을사삼흉으로 불리기도 하며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하영의 손자로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종찬은 일본제국 육군 경력 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자작 습작을 거부하고 친일 행위를 공개적으로 반성했으며,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여 참군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항복의 10대손이며 봉사손인 이주영은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고, 장남 이규환, 증손 이경우가 차례로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다.
- 1808년(순조 8) 11월 보문각(寶文閣)에서 야대(夜對)하여 역대 군감(歷代君鑑)에 대해 강(講)하던 중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명신(名臣) 가운데 총명과 재식으로 한나라 장량·진평에게 견주어 논할 만한 자는 누구인가?"하니, 각신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갑자기 생각하여 감히 질언(質言)할 수는 없지만, 오성부원군 이항복을 사업(事業)·재서(才諝)·문학(文學)·견식(見識)에 있어서 제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음 이덕형과 서애 류성룡은 모두 재서로 일컬을 만하고, 최석정 같은 자도 또한 허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어린 시절 이항복이 살던 동네에 좀 모자라는 대장장이가 1명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항복이 글방에서 집으로 갈 때 늘어놓은 말굽징 위에 앉았다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것이었다.(엉덩이 부위가 뚫린 '개구멍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식의 내용이 적힌 경우도 있다. 다만 양반들은 최소 옷감으로 좀 가린 풍차바지 같은 것들을 입어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장장이가 자세히 살펴보니 이항복은 앉을 때마다 엉덩이에 징을 하나씩 끼워 훔쳐갔다. 양반댁 아들을 혼낼 수도 없고 해서 대장장이는 이항복이 올 시간에 불에서 막 꺼내 식지 않은 징을 하나 널어놓았으며 이항복은 멋모르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이항복이 다 나은 후 화해의 의미로 떡을 가져왔는데 떡소는 닭똥이었다고 한다. 일화에 따라 살구를 먹을 때 대장장이에게 눈을 감으면 살구를 주겠다고 하면서 똥을 먹인다거나 미리 씨를 빼고 모래로 속을 채운 살구를 건네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후에도 그의 절도 행각은 그치지 않아 대장장이는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후 대장장이의 아내가 전재산을 들고 야반도주해버렸다. 이에 굶어죽을 수 밖에 없게 된 대장장이가 시장 바닥에서 울고 있는데 이항복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징이 가득찬 항아리를 하나 보여준다. 대장장이 부인이 바람을 피고 도망갈 것을 눈치챈 이항복이 이런 작전으로 대장장이를 도우려 한 것. 덕분에 대장장이는 재기할 밑천을 마련하게 되었다. 나중에 적이 쳐들어올 때 말에게 말굽징을 박으려 했는데 말굽징이 부족할 때 그 때 가져온 말굽징을 사용하게 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일화는 MBC의 한 개그 프로그램('소문만복래'로 추정)에서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항복의 엉덩이에 말굽 도장이 크게 찍힌채 어기적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시청자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
- 이항복이 계속 놀기만 하자 아버지가 그 날 멍석에 있는 콩을 세라고 한 다음 해가 질 때까지 못 세면 벌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알겠다고 대답을 한 다음 애들과 계속해서 놀기만 했다. 걱정된 하인이 이러다가 아버지에게 혼나면 어쩔거냐고 하자 그는 걱정말라고 한 다음 아버지께 콩을 다 셌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셌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한 되에 있는 콩을 센 다음 한 섬은 열 말이고 열 말은 백 되로 세어서 알아냈다고 대답했고, 아버지는 조금 어이없어하면서도 '아 그놈, 내 아들이지만 보통내기가 아니구나'라며 칭찬했다고 한다.[25]
- 이 에피소드 때문에 만화로 보는 현대과학의 세계 7권 "우리 은하" 편 한정으로 레귤러 캐릭터로도 등장한다. 왜 뜬금없이 이항복 선생이 등장하느냐 하면 허셜이 우리 은하 내의 천체 갯수를 세는 방법을 설명할 때 이항복이 됫박으로 좁쌀 한 포대의 좁쌀 갯수를 세는 방법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문원의 일화지만 여기서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대로 이항복이 나왔다. 실제로는 허셜은 밤하늘을 200여 개의 관측 구역으로 나누고 그 안의 천체 갯수를 세었고, 이것이 우리 은하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첫걸음이 되었다.[26] 여튼 7권 갓 쓰고 도포 입은 채로 작중 내내 블랙홀도 갔다가 중성자별도 갔다가 하며 도사 패밀리와 어울린다.
- 군마용 건초를 가득 쌓아놓은 곳에 친구와 같이 놀러간 적이 있었다. 산처럼 쌓인 건초를 보고 한 친구가 "한 마리 말을 먹여 저 건초를 다 쓰려면 얼마나 걸릴까?"라고 농담을 하자 다른 친구도 "저 건초를 베게에 넣어 다 쓰면 갈아넣을 때 다 쓰려면 얼마나 걸릴까?"라고 농담을 받자 이항복은 "내가 발이 저릴 때마다 저 건초를 손톱만큼 베어 침에 묻혀 바를 때 다 쓰려면 얼마나 걸릴까?"라고 하자 친구들이 모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오성과 한음이 어릴 때에 밭에 거름을 주지 않은채 수박이 맛없다고 투덜대는 구두쇠 노인의 수박 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좋은 수박이 열리자 사실을 털어놓고 수박 대접을 받았다. 다만 이 이야기는 엔딩이 좋게 났기에 망정이지, 수박밭에 말뚝은 하나라도 절대 박으면 안된다. 말뚝은커녕 줄기 하나만 잘못 밟아도 그 고랑을 망쳐버리는게 수박밭이다. 놀부의 악행 목록 중에 수박 혹은 호박밭에 말뚝 박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 떡 하나 놓고 말을 먼저 하는 쪽이 지는 내기를 한 적도 있는데 이 때도 이덕형이 하인을 구워삶아 강도 행세를 하게 하고 이항복의 물건들을 훔쳐가자 버럭 호통치며 도둑을 내치니 이덕형이 웃으면서 이 떡은 내꺼라며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일화는 등장 인물이 부부, 형제 등 다양하게 바뀌며 실제 도둑이 온 것으로 각색된게 많다.
- 어릴 때 이덕형과 담력 내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무덤에 떡을 하나씩 돌리면 이기는 내기였다. 물론 무서워서 포기하면 끝. 이덕형은 이항복을 먼저 보내고 하인에게 무덤에 숨어 그를 놀래키라 했는데 떡 하나 더 주라며 무덤 근처에서 손을 불쑥 내밀자 이항복이 손을 치면서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 죽은 놈이 뭔 욕심이냐"며 호통쳤다는 일화도 있지만, 이항복과 이덕형은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이 일화는 명백한 허구이다. 이 일화는 원래 고려말 문신인 한종유에 얽힌 용재총화 속 일화가 이항복의 일화로 대체되어 잘못 구전된 것으로 보인다.
- 이항복과 이덕형이 소과에 급제한 후 대과에 최종 합격하기 위해 절에서 함께 공부할 때 불알에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이항복은 뒷간에 갔다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이항복은 이덕형에게 뒷간에서 불알을 잡아당기는 귀신을 만나 정승이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며 뒷간에 보낸 뒤 몰래 노끈으로 이덕형의 불알을 매어 잡아당겼다.[27] 이덕형도 아픔을 참고 정승까지 할 것이라고 하고서야 풀려나왔는데 이항복이 뒷간에서의 일을 말하자 그제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다른 버전에서는 이항복이 뒤를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손이 뻗어나오더니 자신의 불알을 슬슬 만졌다. 이항복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어느 놈이 남의 불알을 함부로 만지냐"고 호통을 치자 "어허, 장차 정승이 될 인물이로다"라며 손이 사라졌다. 이항복이 이 말을 이덕형에게 하자 이덕형은 뒤가 마렵지 않은데도 뒷간에 가서 바지를 까고 앉았다. 역시나 불알에 손이 닿자 이덕형도 큰 소리로 꾸짖었는데 손은 "장차 영의정이 될 인물의 불알을 만졌노라"하고 사라졌다. 이항복과 이덕형이 공부하던 절의 주지가 한 장난이었다. 실제로는 1598년 4월 이덕형이 38세의 나이로 먼저 우의정에 올랐고, 동년 10월 이항복이 43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됨으로써 정승 반열에 올랐다.[28] 영의정의 경우는 1600년 이항복이 45세의 나이로 먼저 올랐고, 1602년 이덕형이 42세의 나이로 역시 영의정이 되었다.
- 이덕형은 아버지인 이민성이 한가로이 지내도록 별장을 지어 드렸는데 이민성이 별장에 앉아 있는데 이항복이 찾아왔다. 이민성은 이항복에게 누각의 이름을 지어 휘호로 써 달라고 청하였고 이항복은 '맑고 맑은 집'이라는 뜻의 '청청당(淸淸堂)'이라는 글자를 써서 현판을 만들어 걸어 주었다. 그날 퇴청한 이덕형은 현판을 보자 '그 친구가 장난을 쳤다'라며 황당해했는데 의아해진 이민성이 이유를 묻자 이덕형은 청(淸)에는 '맑을 청'이라는 뜻 이외에도 궁중에서 쓰는 '꿀 청'이라는 의미가 있다며(석청이 이 '꿀 청'자를 쓴다) '꿀꿀이집'이라는 뜻이 되었다고 어이없어했다. 일화에 따라서는 이덕형을 샘낸 벼슬아치들이 앞다투어 별장을 지으려 하자 이항복이 일부러 이런 당호를 지어주었다든가 꿀꿀이집이라는 당호를 본 이덕형이 즉시 별장을 헐어 버리면서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분 별장 투기 바람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 권율의 아버지인 권철이 혼인 적령에 이른 손녀의 사윗감을 알아보는데 워낙 미인이라 권세 높고 재산 많은 내로라하는 집안들에서 혼담을 많이 청해 왔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중 하루는 이항복과 만났다. 이 때 이항복은 권철에게 "사람의 겉만 보시려고 합니까, 아니면 겉과 속을 모두 보시려고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권철은 "사람의 속 또한 보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가?"라고 대답하자 이항복이 바지를 벗고 그 곳을 보여 주면서 "사람의 속이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29] 이에 권철은 이항복의 대담함에 감탄하고 혼인을 결정했다는 야사. 장인 권율이 아닌 장조 권철이 등장하는 이유는 당시 백수로 허송세월하던 막내아들 권율은 가문의 골칫거리였는지라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약했고 결과적으로 사위를 정하는 가문의 중대행사에서 최종 결정권자는 권철일수밖에 없었다.
- 바로 위에 나온 권철과 관련해서 위인전에 곧잘 실리는 일화로, 혼인 맺기 전 이항복이 아직 소년이던 어느 가을날 하인이 마당의 감을 따고 있자 이항복은 이쪽에 있는 것만 따지 말고 옆집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을 따라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옆집 하인들이 자신을 잡아 경을 칠 것이라고 하자 이항복은 대체 왜냐고 물었는데, 자기들 주인 댁 땅으로 넘어온 가지의 감은 자기들 것이라고 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옆집인 권철 집에 찾아가 권철이 있던 사랑채의 문에 발린 종이를 뚫고 주먹을 찔러넣었다. 깜짝 놀란 권철이 누구냐고 묻자 이항복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권철이 이 무슨 불경한 짓이냐고 화를 냈지만 이항복은 그 상태 그대로 "대감, 이 손이 누구의 손이옵니까?" 하고 태연하게 물었다. 네 팔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라는 권철에게 "대감님의 방 안에 있으니 대감 댁 손은 아닙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은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했지만 이항복은 "그렇다면 대감 댁으로 가지가 넘어온 저희 집 감나무의 감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물론 너희 집 감이라고 했다. 그러자 비로소 이항복은 권철의 하인들이 자신의 하인들과 빚고 있는 갈등을 말했고, 오히려 그를 대견하게 여긴 권철은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을 몰랐으며 다시는 함부로 너희 집 감을 따지 못하게 할 테니 이만 물러가라고 하면서 해결되었다.
- 어느날 이항복의 부인 권씨가 마루에 홀로 앉아 있는데 갑자기 행색이 지저분한 노비가 권씨에게 달려들어서 입맞춤을 하는 등 희롱을 하고는 비녀를 뽑아 도망갔다. 권씨 부인은 사대부의 부인으로서 치욕을 당했지만 체면상 남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화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는데 남편인 이항복이 이유를 물어도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답답해 하던 이항복이 이야기 도중 갑자기 집 밖에서 주워온게 있다며 권씨에게 뭔가를 내밀었는데 노비가 가져갔던 비녀였다. 사실 노비의 정체는 변장한 이항복이었던 것.
- 어느날 이항복이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이덕형의 아내인 한산 이씨를 보게 된다. 꿈 속에서 본 이씨 부인의 배꼽 아래에 검은 점이 있자 이항복은 이덕형과 술자리를 갖자 하여 자신이 NTR을 했노라고 거짓말을 하고 증거로 배꼽의 점을 댄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이항복이 퇴청한 이후 이덕형의 집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한산 이씨의 옷이 풀어져 배꼽이 드러난 것을 보게 되었다고도 한다. NTR을 한 것이 아니고 이씨 부인의 배꼽 옆에 큰 점이 있더라며 소문을 퍼뜨리는 야사도 있다. 이덕형은 몰래 잠자는 이씨 부인의 배꼽 옆을 확인하다가 무안을 당하고[30] 이씨 부인은 이항복을 초청해 술자리를 마련한다. 이항복에게는 특별히 만두국을 대접하였는데 만두소는 똥이었다.
- 서로 상대의 아내를 엿먹인 일화도 있다. 먼저 이덕형의 아내가 볼거리(이하선염)를 앓자 이항복은 이걸 고쳐준답시고 "남편(이덕형)의 낡은 짚신을 삶아서 얼굴에 붙이고 있으면 나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후 이항복의 아내가 코에 동상을 입자 이덕형은 복수를 한다며 "코에 물을 발라 얼려버리면 동상이 나을겁니다."라고 말했고 이항복의 아내는 그걸 따라하다가 더 크게 동상을 입어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 전승에 따라서는 완전히 얼어붙으면 뜨거운 아랫목에서 코를 지지라고 해서 코가 퉁퉁 부어올라 주먹만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행하면 코 부분의 피부가 괴사해 떨어질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처방이다.
- 박동량이 지은 <기재잡사>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전란을 불렀으니 가슴 아픈 일이오"라고 탄식하자 이항복은 "동서의 사람들은 싸움에 익숙하거늘 어찌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왜적을 막으라 하지 않는가?"라고 대답했다.
- 임진왜란 당시 어의였던 양예수는 전쟁이 터지기 전에 하도 여기저기서 많은 사례를 한다며 불러댔지만 항상 '다리에 병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자 북쪽으로 몽진을 가게 되었고 양예수 역시 걸어다니면서 어가를 호종하게 되었다. 이를 본 도승지 이항복은 양예수에게 "매번 다리가 편찮으시다더만 다리병에는 난리탕이 최고로군!"이라고 일침을 날렸다. 다리 핑계를 댄 양예수가 걸어다니는걸 보고 전쟁을 탕약에 비유한 농담.
- 임진왜란 중 선조가 피난한 곳에 열매가 무르익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선조가 이를 보고 무심코 "오동나무 열매가 동실하기도 하구나."하였는데 이에 이항복이 곁에 와 말하기를 "보리 뿌리는 맥근하옵지요."했다. 하여 선조가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31]
- 권율이 어느날 사위인 신립과 이항복을 보니 복상이던 신립의 얼굴에 요기가 돌고 반면 이항복의 얼굴에는 복이 도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겨 요새 있었던 일을 물었더니 신립은 산 속에서 가족을 잃고 산적 혹은 괴물에게 핍박받던 여자를 구해줬는데 첩이라도 되겠다고 매달리는 것을 뿌리치고 나왔더니 여자가 통곡하다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이항복은 추하고 몸집이 커 시집을 가지 못하던 여성이 있어 하룻밤을 함께 했는데 여성이 크게 웃더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권율은 탄식하며 신립은 여자의 한을 샀으니 오래 살지 못할 것이나 이항복은 여자의 평생 한을 풀어주었으니 영달할 것이라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신립이 권율의 사위라는 것부터가 허구이므로 신빙성은 낮으며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32]
- 이순신을 기리는 글에 "술과 여색을 탐하듯 열심히 하였다"는 표현을 남긴 적이 있다. 정확히는 이순신을 배향한 사당인 <충민사기>의 기록으로 이순신이 군사를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 이 표현은 이항복의 독창적인 표현은 아니고 <논어>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논어>에는 "나(공자)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자한편 제17장), "어진 사람을 어질게 대할 때는 여색을 즐기듯이 해야 한다"(학이편 7장)라는 구절이 있다.
- 전란이 끝난 후 1604년 선조를 호종한 호성 공신이 결정되고 그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게 되었다. 이항복은 초상화를 그릴 화공의 그림 도구를 살피더니 "주홍색이 너무 적구먼. 어떻게 그리려고?"라며 참견을 했다. 화공은 "원래 주홍색은 많이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항복은 "그러면 홍진(洪進)의 코는 어떻게 칠할 셈인가?"라고 물었다. 홍진(1541~1616)도 당시 호성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유별나게 코가 붉은 딸기코였다고 해서 이항복이 이런 농담을 한 것이다.[33]#
- 이항복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이항복에게 그 지역의 반역의 낌새를 잘 찾아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항복은 "역적은 날짐승, 들짐승이나 물고기처럼 특산품이 아니라서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34]
- 이항복이 의금부에서 역모 조사에 참여할 때 이춘복이라는 역적을 잡아오라고 시켰는데 이춘복이 없어 이원복이라는 이름이 비슷한 근처 사람을 잡아왔다. 그 놈이 그 놈이니 벌을 줘야겠다고 결론이 나려는 듯 했는데 이항복이 내 이름도 이항복으로 비슷하니 나부터 글을 써 변명을 해야 죄를 면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자 좌중에는 폭소가 터졌고 이원복은 무죄 방면되었다. 이 일화에는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대북파를 풍자했다는 해석이 있다.
- 하루는 선조가 이항복을 불러들였는데 그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눈을 감고 조는 척을 했다.[35] 이항복은 자신이 왔다고 절을 올리면 당연히 선조가 눈을 뜰 줄 알았으나 선조가 그대로 자는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1번 더 절을 했다. 그러자 자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선조가 눈을 번쩍 뜨고 "방금 절을 2번 하지 않았소?"하여 호통을 쳤다. 절을 2번 하는 것은 고인의 장례와 제사에서만이다. 선조를 죽은 사람 취급한 것이니 자칫하면 임금을 안전에서 능멸했다고 역적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이 경우는 선조의 장난질이기는 했지만 당하는 신하 입장에서는 아찔한 상황이다. 이 말에 이항복이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처음 절은 찾아뵙는 인사였고 2번째는 그만 물러간다는 절이옵니다."라고 받아넘기자 선조가 재치에 감탄했다고 한다.[36] 흥선 대원군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선조 포지션.
- 어느 날 선조가 재치 넘치는 이항복을 엿먹여 보려고 적당한 구실로 이항복만 잠시 어전에서 내보내고는 그가 없는 동안 다른 신하들에게 내일 조회 때까지 계란을 1개씩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다음 날 다른 신하들은 모두 계란을 꺼내 선조에게 바치는데 당연히 이항복만은 웬 계란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선조가 "경은 왜 계란을 꺼내지 않는 것이오?"라고 다그치자 갑자기 이항복이 "꼬끼오!"하고 울었다. 선조가 이유를 묻자 이항복은 자기는 수탉이라 알을 낳지 못해 계란을 바칠 수 없다고 대답해[37] 선조를 탄복시켰다.
- 이항복이 재상으로 있을 때 비변사 회의에 지각했다.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일찍 집을 나섰는데 오다가 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싸우고 있지 않겠나.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 환관이 스님의 머리털을 잡고 스님은 환관의 양물을 잡고 싸우고 있지 뭔가. 그래서 구경하고 오다보니 늦었네.”라 했다.[38] 이걸 듣고 재상들이 모두 웃었다[39] 하는데 그냥 농담이 아니라 당쟁으로 상대 당파를 숙청하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내는 세태를 꼬집기 위해 한 말이라고도 전한다.
- 류성룡, 정철 등과 함께 가장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른 사람들이 '선비가 글 읽는 소리', '달 밝은 밤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 등을 말하자 '화촉 밝힌 방에서 신부가 치마끈 푸는 소리가 제일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 훗날 신립과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한 김여물을 살려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김여물의 증조부에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귀신이 그의 손자인 김여물을 데려가려 했는데 이항복이 그 앞을 막아서자 "장차 국난을 극복할 천기를 타고난 인간을 죽일 수는 없다"고 저승사자와 귀신이 두려워하며 떠났고 이항복이 있으면 그 손자를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점쟁이를 대신 데려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본래 점쟁이는 자신이 죽을 것까지 내다보았기에 살릴 방도를 알려주지 않으려 했으나 당시 신혼이었던 김여물의 부인이 칼을 들이대고 방도를 말하든 여기서 죽든 선택하라고 윽박질러서 대답을 얻어낸 것이었다.
자세히 설명을 하면 김여물의 증조부가 생전에 트집을 잡아 밑에 부리던 하인(또는 아전)을 매질해 죽였다. 그 하인이 원귀가 되어 저승에 하소연을 해 업보로 김여물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가 모두 제 명에 못살고 죽었다. 그래서 김여물의 집안에는 김여물을 제외하면 일찍이 과부가 된 증조모, 조모, 모친, 갓 시집온 김여물의 아내가 있었다. 김여물의 부친까지는 후사를 남기고 죽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김여물은 갓 혼인한 새신랑에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 대가 끊길 처지가 되자 집안의 근심이 가득했고 몰래 용한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았다. 점쟁이가 천기누설을 두려워해 말을 아끼자 증조모부터 김여물의 부인까지 여인들이 서로 나서 자기가 대신 죽을테니 집안의 대를 이을 김여물을 살려달라 하소연했다. 그 모습에 흔들린 점쟁이가 자신의 가족들을 보살펴달라 단단히 약조하고 대신 죽었다. 훗날 김여물의 아들이자 이항복의 문인 김류가 인조반정을 일으킬 때 점쟁이의 후손을 찾아내 합류시켰고 그 공로로 벼슬을 받아 후손들이 모두 영달했다고 한다.
- 복성군의 혼령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벼슬을 하기 전, 자신을 찾아 온 무당 소녀가 복성군의 혼령이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들여 혼령과 만나게 된다. 작서의 변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 저승에서도 원통하다는 말을 한 복성군은 제사를 받으며 자신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세간에서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 이항복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말에 이항복은 모든 사람들이 복성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모두 다 알고 이를 얼마나 비통하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자 복성군이 그 말에 만족하며 모든 한이 풀렸다는 말과 함께 이항복에게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을 선물로 주며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 깡이 대단했다. 감히 선조를 상대로, 그것도 장인어른 권율을 이용해서 장난을 쳤다. 전근대 이전 시절의 왕이란 인간과 하느님의 중간인 무언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 같은 대우를 하면 불경하다는 이유로 삼족이 멸족당하기가 일쑤였다. 장인어른인 권율에게 더우니까 속옷 입지 말고 관복만 입고 조정에 출근하라고 했고 그 때 하필 이항복이 선조에게 너무 더우니 관복만 탈의하는 게 어떠냐고 건의했다. 이러니 권율은 완전히 웃퉁깐 모습이 되었다.
4. 대중매체
- 1962년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장훈이 연기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박병선이 연기했다. 조연이니 주인공에 밀리는 건 그렇다쳐도 진지한 모습으로만 나와 실제 인물의 유머러스한 모습은 그려지지 못했으며 까칠하게 그려지는데 권율이나 이덕형을 상대할 때 그나마 누그러진다. 호가 '오성'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 호는 '백사'였고 오성은 부원군으로서의 호칭이었다.
-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김승욱[40]이 연기했다. 고증은 다른 드라마보다 떨어지지만 이항복의 묘사만큼은 이 쪽이 실제 인물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 2020년 방영된 천일야사에서는 이항복이 귀신에게 시달리던 김여물을 살려줬다는 일화를 각색해서 방영했다. 말 그대로 각색인지라 사서에 남은 기록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이항복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김여물의 집에 오게 돼서[41] 얼떨결에 퇴마를 맡게 됐는데 귀신을 꾸짖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벌벌 떨며 마늘과 콩을 집어던진다. 하지만 자기와 처자식을 죽인 김씨 가문의 후손 말고는 해칠 생각이 없던 귀신으로부터 진실[42]을 전해 듣고는 이쯤하면 되지 않았냐고 설득해서 김여울을 지켜낸다.
[1] 18세기에 제작된 후모본이다.[2] 율리우스력 11월 16일[3] 영조 때 영의정 이광좌의 증조부. 순조 때 좌의정 이경일의 5대조.[4] 영조 때 좌의정 이태좌의 증조부. 영조 때 영의정 이종성의 고조부. 고종 때 영의정 이유원의 8대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9대조.[5] 성종의 왕자 영산군의 서외고손자[6] 오성은 본관인 경주의 별칭이다.[7] 권율의 부친이자 인종 시대의 권신. 사실 권철 생전에는 막내아들 권율이 과거시험을 본 적도 없는 사실상의 백수라 권율이 활약하는 것을 본 일이 없고 오히려 권철의 골칫거리였다. 권율은 부친이 사망하고 4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과거시험(권율은 장군 이미지와 다르게 원래 문신이다)에 합격하고 50대에 임진왜란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던 대기만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25살에 합격한 사위 이항복보다 벼슬도 훨씬 늦게 했다.[8] 이항복은 문하평리 증 상서좌복야 이핵(李翮)의 3남 검교정승 이세기(李世基)의 3남 상서공 이과(李薖; 상서공파 파조)의 8대손이고, 이제현(李齊賢; 익재공파 파조)은 이핵의 차남 검교정승 이진(李瑱)의 차남이다. 즉 이제현은 이항복의 8대조 이과와 사촌지간이다.[9] 신립과 정충신도 권율의 사위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야사의 오류다. 공식적으로 권율의 정실 소생 자녀는 이항복의 부인 한 명이고 아들조차 없었다.(친형의 아들인 친조카를 양아들로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신립의 정실 부인은 이씨와 최씨이며 정충신의 정실 부인은 양씨다. 즉 권씨는 없다.[10] 한음문고에 따르면 1578년이라고 한다.[11] 세간에는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장성해서 만났는데 친우가 된 것이다.[12] 경진(庚辰) 2월 25일 알성방(謁聖榜).[13] 이덕형과 같은 광주 이씨(廣州 李氏)이다. 이정립은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장남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의 5대손이고, 이덕형은 이인손의 4남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5대손이다.[14] 경진(庚辰) 3월 18일 별시방(別試榜). 인순왕후(仁順王后)를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한 일을 기념한 시험.[1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죄민수로 패러디했다.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실록의 이 표현을 "그 대감 진짜 웃겨"라는 말로 풀었다.[16] 귀양이라고 다 똑같은 귀양이 아니다. 한양에서 먼 귀양일수록 무거운 처벌인데 과천, 수원 정도로 귀양을 보내는 건 가벼운 벌이고 제일 심한 귀양은 함경도 추운 고장으로 보내는 귀양으로 이건 얼어 죽으라고 보내는 귀양이다. 한양에서 멀리 보내도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보내면 살만한 편으로 귀양을 어디로 보내는가를 보면 조정 분위기를 알 수가 있다. 또 한 가지는 절도, 그러니까 섬으로 보내는 귀양으로, 이건 죽일 생각은 없는데 한양하고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고 싶을 때 보내는 것이다. 어쨌든 이항복 귀양지는 함경도 이곳 저곳으로 바뀌다가 마지막에 북청도호부로 정해지는데, 이항복의 건강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북청에 가서 얼어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이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을 지지해주었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증오하게 되고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17] 1618년(광해 10) 1월 18일 철령(鐵嶺)을 오르며 지은 노래(歌)이다.[18] 이항복 본인을 지칭함.[19] 원문의 옛한글을 최대한 그대로 옮겼으나 입력의 한계로 다소 차이가 있음. 한문으로 된 곳은 괄호 안에 한문을 표기함.[20] 근데 막상 처가는 동인쪽 집안이다. 장인어른 권율이야 관직에 늦게 오르고 핵심적인 공무원 생활을 죄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시기에만 활동하여 동인서인 둘 다 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 조상대로 가면 동인 쪽으로 보아야 한다. 그 후손들은 동인 중에서도 남인이 되었다.[21] 근데 막상 이덕형의 처가는 완벽한 북인이다. 이덕형의 장인은 북인 중에서도 시조이자 대지도자인 영의정 이산해 정승이다. 이산해는 정철 문제로 류성룡과 완전히 갈라서서 거의 철천지원수가 되며 북인의 영원한 시조가 사람이다.[22] 이항복, 이광좌, 이종성, 이유원.[23] 이태좌, 이경일.[24]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을 가리킴.[25] 사실 이 이야기의 원조는 영조 대의 인물 장난 대감 이문원이다. 이문원의 일화에서는 한층 악랄하게 깨 혹은 좁쌀을 세라는 것으로 나온다. 그냥 '옛날 옛날 어느 댁 도령이...'라거나 옛날이야기에 흔히 나올 법한 아무 이름을 넣은 이야기도 있다. 어떤 버전이든 간에 이 이야기의 핵심 전개는 '꾀돌이 도령이 한 되만 세어 놓고 곱하기로 어림을 잡아서 회초리를 면했다'는 것이라 그 부분은 동일하다. 위기철의 논리 시리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벼루를 깬 벌로 콩을 세라는 벌을 받았고, 결말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 이놈 머리를 좀 썼구나, 허나 그것은 대충 맞다고는 해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예 아버지, 아마 오백 개쯤은 틀렸을 것입니다."-"그럼 백 개에 한 대씩 해서 종아리 다섯 대만 맞으면 용서해주마"라고 해서 다섯 대만 맞고 끝이 난다.[26] 밤만 되면 나타나는 천체인 만큼 당연히 고대인들도 은하수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허셜이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를 천문학적으로 해석하려 한 시도이며,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 외우주 관련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27]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상투를 잡아당겼다는 것으로 순화되기도 한다.[28] 이때 우의정 이덕형이 좌의정이 되었고, 이항복이 이덕형의 우의정 자리를 이어받았다.[29] 어린이용 이야기책에서는 이야기를 순화해서 '이항복이 윗옷을 벗어서 맨몸을 보여줬다'로 표현하기도 한다.[30] 당시에는 여성이 배꼽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젖먹이 아이가 있으면 밖에서도 젖을 먹이려 가슴을 불쑥 꺼내기도 했지만 배꼽은 아니었다고 한다.[31] 무슨 뜻인고 하니 선조는 별 생각없이 오동나무 열매의 동그스름함을 형용하였으나 우연찮게도 거기에 사용된 형용사 '동실하다'의 어근은 오동나무 열매를 한자로 쓴 동실(桐實)과 발음이 같았다. 이항복이 이를 포착하고 보리 뿌리를 거론한 뒤 그 반드러움을 형용함에 그 어근이 보리 뿌리를 한자로 쓴 맥근(麥根)과 발음이 같은 '매끈하다'을 사용함으로써 우연스레 만들어진 선조의 언어 유희와 동종인 언어 유희를 제시한 것이다. 선조가 이를 눈치채고 크게 웃은 것. 정조와 윤행임도 이런 설화가 전해온다.[32] 신립이 임진왜란 초반에 왜군을 막고자 남하한 뒤 조령에 진을 치려 할 때 여인의 혼령이 나타나 탄금대에 진을 치라고 했다고 한다. 신립은 여인이 자신을 괴물로부터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 생각하여 여인의 말을 믿고 탄금대에 진을 쳤고 결과는 깔끔한 패배+신립의 전사. 여인은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간 복수를 한 것이다. 이 설화는 당대 최고의 명장 신립이 누가 봐도 패배가 뻔한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원혼에 홀려 그랬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합리화로 만들어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고 본문의 이항복 설화는 이 설화와 만나 전해지는 야사인 듯 하다.[33] 홍진의 초상화는 지금도 전해지는데 코 위치에 징그러울 정도로 큰 혹이 있다. 현대 의학적으로 해석하면 '비류'라고 하는 병으로 병이 생기면 코가 뻘겋게 부어올라 흔히 딸기코종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초상화를 그릴 때도 홍진의 병은 심각하게 진행이 된 상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2년 뒤 홍진이 사퇴를 청하면서 밝히기를 병이 뿌리째 깊어 백약이 무효하다고 밝히고 있다. 사관 또한 홍진이 병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런 것치고는 80에 가깝게 장수했다. 재밌는건 화공의 말대로 홍진의 혹 부분에 붉은 색이 아예 없이 그려져 있다.[34] 이항복으로부터 먼 시간대인 숙종 시기 김석주의 조선왕조실록 졸기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서 '무릇 역적은 물고기나 자라처럼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항복이 한 말과 같은 바가 있다고 나온다.[35] 일화에 따라서는 누워 있는 선조에게 절을 했다고도 하나 예법상 누운 사람에게는 절대 절을 하지 않는다. 누운 사람에게 절하는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조문하는 경우뿐이기 때문. 만일 그랬다면 절하자마자 선조가 잔뜩 분노해서는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사대부인 이항복이 누운 사람에게 절하지 않는 예법을 몰랐을리 없다.[36] 즉 절을 2번 하긴 했으나 2번의 의미가 각각 다르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 어쨌든 죽은 사람으로 하는 절 2번은 같은 의미로 할 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7] 우는 닭은 수탉뿐이다.[38]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환관의 수염으로 순화되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환관의 특징 중 하나를 적절하게 고른 것인데 환관의 양물은 잘렸으니 당연히 양물의 영향으로 자라야 할 수염도 없다.[39] 뭐가 웃긴지 이해가 안간다면 환관에게 머리채를 잡힌 스님과 스님에게 그 곳(혹은 수염)을 잡힌 환관을 생각해보면 된다. 스님은 삭발해서 머리가 없고 환관은 거세해서 양물(수염)이 없다.[40]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박상충을 연기했는데 이 배역도 개그 캐릭터면서도 불의를 용납 안하는 성격이라 이항복과 유사하다. 그런 면에서 <화정>의 캐스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41] 정확히는 먼저 왔던 퇴마사가 귀신을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면서 목덜미에 점이 있는 남자만이 귀신을 물리칠 거라고 둘러댔다. 그후 때마침 지나가던 이항복의 목덜미에도 점이 있었기에 휘말려든 것.[42] 아들이 병에 걸려 죽어가던지라 성급히 약을 지어서 뛰어가던 도중 술에 취한 김여울의 할아버지와 충돌했다. 술에 취했던 김여울의 할아버지는 홧김에 이 남자를 때려죽여 시신을 유기, 결국 아들은 약도 쓰지 못한 채 죽었고 아내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