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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6 21:42:00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넘어옴

나폴레옹 전쟁 전개
제2차 이탈리아 원정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파일:attachment/Austerlitz-baron-Pascal.jpg

1. 개요2. 진행3.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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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ar of the Third Coalition
(1805 ~ 1806)

나폴레옹 전쟁의 네번째 국면으로 오스트리아 전쟁이라고도 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구성한 주요국으로는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 동군연합, 스웨덴 등이 있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중립을 지켰다.

2. 진행

1803년 5월, 영국은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해 프랑스 해상을 봉쇄하여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끼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예 영국을 점령해 굴복시키자는 생각에서 불로뉴에 무려 18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고 이 병력은 여차하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본토로 침공할 기세였다. 이에 맞선 영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나폴리 왕국, 스웨덴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를 위해서는 도버 해협의 제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나 해군 운용, 군함 등이 열세였던 프랑스는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다수의 군함과 수송선을 건조해 일단 구색은 갖추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빌뇌브 제독에게 명령하여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빌뇌브의 서인도 제도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어쩔 수 없이 귀환하던 빌뇌브의 함대를 로버트 칼더가 지휘하는 영국 해군이 습격하여 1805년 7월 22일, 피니스트레곶 해전이 일어났다. 빌뇌브는 여기에서도 패배하여 간신히 스페인 카디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8월이 되자 육상의 전투도 나폴레옹의 계획과는 어긋나 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결국 영국 침공이 어렵겠다고 판단한 후, 불로뉴에 있었던 대군을 라인강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사실상 영국 침공을 포기한 것이었다. 거기에 해군 전력들을 트라팔가르 해전으로 대부분 잃어버려 영국에 상륙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국 침공을 준비하면서 한 행동들은 이후의 오스트리아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 침공을 앞두고 나폴레옹은 원정군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행토록 했고 이는 부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레지옹 도네르 훈장을 제정하는 등 수훈 제도를 정비하고, 병사들과 만나서 그들의 고충과 무훈 등을 직접 언급해 주고 이를 해결해 주려는 모습을 보여서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이었는데,
"오랜만이군 장 아무개 상병.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자네가 XXX 전투 때 용감히 싸웠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네. 자네 같은 용사가 아직 훈장을 받지 못했다니 큰 실수야. 내가 지금 훈장을 수여해 주지!"
"알베르 소위. 임관한지 얼마 안 되어서 힘들텐데 그 고충은 나도 잘 알고 있네. 이번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다면 귀관의 진급은 물론이고 훈장 또한 약속하겠네."
등 이런 식이었다. 당연하지만 나폴레옹은 사전에 장병들에 대한 뒷조사(?)를 한 뒤였다. 물론 평소에 나폴레옹이 장병들에게 인기와 명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행동은 원정군 병력이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병력을 불로뉴에 집결시키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라인강 유역의 방비가 허술해졌다고 판단하고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70,000명의 병력과 러시아 제국군바이에른으로, 카를 대공의 병력이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갔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바이에른군을 격파하고, 바이에른의 중심지인 뮌헨을 점령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폴레옹은 불로뉴의 병력을 라인강 쪽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이때의 나폴레옹군은 그야말로 당대의 군사적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빠른 행군 속도로 600Km가 넘는 거리를 거의 한 달여 만에[1] 주파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프랑스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레이베리히는 나폴레옹군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10월 20일, 레이베리히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

레이베리히가 항복한 그 사이 해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건 해전이 벌어졌다. 10월 19일, 프랑스 연합함대가 나폴리를 향해 출발하자 이를 알아낸 호레이쇼 넬슨프랑스 해군을 추격했고 10월 21일, 스페인의 트라팔가르곶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피에르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는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처절하게 캐발렸다(...). 물론 넬슨이 전사하는 불행이 있긴 했지만. 이로서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은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폭풍우 때문에 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나폴레옹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사실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군은 진격을 계속해 11월 1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 입성했다.[2]

수도 빈이 함락된 오스트리아군은 러시아군과 전열을 정비한 후 결전을 감행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지 1년여가 돼가던 12월 2일,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3]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 제국신성 로마 제국황제 프란츠 2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래서 세 명의 황제가 모인 전투라 하여 3제(帝) 회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쾌승을 거두었고, 트라팔가르 해전의 참패로 인한 위기를 단숨에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12월 4일 양자는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강화협상이 이루어져 12월 26일, 프레스부르크에서 강화가 이루어졌다. 조약의 내용은 오스트리아 제국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며, 베네치아를 할양하고 프랑스에게 이스트리아 반도달마티아 지역을, 그리고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에게는 티롤을, 뷔르템베르크, 바덴에게는 슈바벤 일대의 흩어진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4]를 할양하며 프랑스에 4,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신 보상이랍시고 잘츠부르크 선제후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영국에선 이 결과로 인해 피트 총리가 병으로 사망하고 윌리엄 그랜빌이 차기 총리에 취임했다. 피트는 이전부터 정무에 따른 과로와 음주로 인해 건강이 나빴는데,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결과를 접하고 결정적으로 심신이 무너져서 사망한 것이었다. 피트는 죽기 전
"지도를 말아두게. 앞으로 10년 정도는 지도 따윈 필요없을 거야."(Roll up that map; it will not be wanted these ten years)
라는 말을 남겼다. 지도가 필요없을 정도로 나폴레옹이 전 유럽 대륙을 장악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3. 결과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본래 목적으로 했던 영국 본토 침공은 실패했으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격파하여 명실상부한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 전쟁 이후 나폴레옹은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서 이듬해인 1806년 2월,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을 깨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여 형 조제프를 나폴리 왕에 앉혔다.[5] 또한 7월에는 베르크 대공국을 창설하고 조아킴 뮈라를 대공에 임명했다. 그리고 1,000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키고, 서남부 독일의 친나폴레옹 영방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라인 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런 나폴레옹의 세력 확장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위협을 느꼈고, 이후 다음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 8월 29일에 출발해 9월 말에는 전 병력이 라인강 방면에 집합했다.[2]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당시 빈에서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초연되었다[3]체코 슬라브코프우브르나(Slavkov u Brna)[4] 콘스탄츠, 프라이부르크 등.[5]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페르디난도 1세는 스페인 제국 카를로스 4세의 동생이었는데 1차, 2차 대불동맹에 발을 담가 일시적으로 로마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에게 털리고 평화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후 제3차 대불동맹에 참여해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이번엔 나폴리 왕국 전역을 날려먹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영국의 도움으로 시칠리아로 도주했다. 조제프는 이후 1808년 스페인의 호세 1세로 즉위했고, 나폴리 왕위는 조아킴 뮈라가 이어받았다.